한국 소설은 ‘어남류’다. < 응답하라 1988 >의 ‘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이 아니라, 한국 소설은 ‘어차피 남류 소설’이다.
한국 소설의 역사와 한국 ‘남류’ 소설의 역사는 거의 동일할 정도로 겹친다. 안 그랬던 적이 없으니, 이런 지적과 비판과 항의도 그만큼 오래되었고, ‘또 그 얘기냐’는 볼멘소리도 어디선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이 얘기는 ‘독자가 왜 한국 소설을 점점 멀리하는가’를 논의할 때, 한국 소설의 종언이 선언되기 전까지 이어질 필리버스터에서 지겹도록 반복해야만 한다.
조금 편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질문을 바꾼다. ‘나는 왜 갈수록 한국 소설을 덜 읽게 됐는가?’ 반갑게 한국 소설을 펼쳤다가도 ‘어남류 (어차피 남류 소설)’라는 걸 확인한 순간, 아무리 다른 장점이 보이더라도 애정이, 매력이, 흥미가 급격히 사그라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지겹도록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젠 정말 다른 얘기를 읽고 싶으니까.
‘여류’라는 말이 먼저 생겼다. 여류라는 호칭은 장식인 듯 낙인이었고 영예인 듯 조롱이 었다. 아무리 잘해봤자 남자의 잉여류, 이류라는 유리천장이었으며, 글 쓰는 여자를 응접실에 가둬두려는 족쇄였다. 여류에는 김치 아니면 향수 냄새만 풍기지만, 남류에는 사회, 정치, 역사를 아우르는 세계가 담겼으니 당연한 위계라는 태도였다. 문단은 여류를 무시하거나, 예의 바르게 무시하는 홀대접으로 일관했다.
자폐적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실은 타폐적이었던 여류라는 말이 만들어지자, 얼마 안가서 남류라는 말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여류는 여러 반발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였지만, 남류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는 듯 묵살됐다. 남류 소설은 요즘 불쑥 만들어진 호칭이 아니다.
다만 이 글에서 다루는 남류 소설은 한국인의 종족 특성이라고 할 만한 남성 중심적인 시각이 체질화된 소설이다. 독자가 한국 소설을 읽을 때 ‘이번에도 역시’라고 느끼는 분위기, 한국 소설이 어쩔 수 없이 걸려 있는 풍토병. 물론 여류라는 명칭을 남자만 쓴 것은 아니다. 차별적인 남성의 시각을 내면화한 여성도 여류라는 말을 수줍은 듯 자랑스러운 듯 입에 올렸다. 남류 소설도 마찬가지다. 남성만 남류 소설을 쓴 게 아니다. 문단의 생리를 파악하고 주류인 남류의 언어를 내면화한 여성도 곧잘 남류 소설을 써냈다. 불편함을 잠시 누르고 한국 소설은 어차피 남류 소설이라는 단정적 진단을 받아들인다 해도, 요즘은 그 물줄기의 수질이 1급수에 가깝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남류라면 1급수여도 싫다’는 입장에서, 왜 그런지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지금의 남류가 흐르는 계곡의 상류에서 시작한다.
황정은의 뛰어난 단편소설인 < 상류엔 맹금류 >를 제목만 패러디하자면, 한국 소설의 ‘상류엔 알탕류’가 또렷했다. 차마 검색해보라는 말을 선뜻하기 힘들지만, 계곡에서 알몸으로 앉아 있는 남자 무리의 이미지를 ‘계곡 알탕’이라고 부른다. 신기하게도 자신들 스스로 이것을 계곡 알탕이라고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다. 한국 소설사에 이름을 올린 ‘문학성을 인정받은’ 소설 중에 이런 ‘계곡 알탕’의 이미지가 선명한 작품은 생각보다 많다. 성차별적 시각과 여성을 2등 시민 이하로 대상화하는 태도가 벌거벗은 몸처럼 자연스러운 소설들. 저격의 의도 없이 아무거나 골라내도 그렇다.
현진건의 < 운수 좋은 날 >은 어떨까. 수업 시간에 배운 정답형 해석은 잠시 잊고 ‘김 첨지’ 를 돌아본다. 김 첨지의 행동을 ‘여전히’ 서툴지만 속 깊은 사랑으로 해석해도 무방할까. 곧 죽을 것 같은 상태의 아내를 두고 일을 하러 나와서는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밤늦게 돌아와 아내가 정말로 죽어 있자 설렁탕을 들이밀며 욕을 하는 인력거꾼. 이것을 ‘여전히’ 사랑으로 불러도 괜찮을까. 물론 과거의 문학작품에 현재 시선을 덧씌우면, 그때의 인간형이 지금의 인간형과 같지 않고, 그때의 관례가 지금은 악습인 경우가 흔하므로, 이런 평가가 온당치 않다고 지적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따옴표로 묶인 ‘여전히’를 위해서 불려 나왔다. ‘여전히’가 가능하지 않다면 해당 소설이 그 가치를 갖고 있다는 평가는 생명을 다한다.
온갖 성차별적 태도와 남성 이외의 존재들을 대상화하는 설정이 의문시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 소설 저 소설에서 반복되고, 심지어 문학성이라는 휘장까지 걸쳐주면서도 기괴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시절. 성차별을 숨 길 필요조차 없던 시절의 ‘알탕 소설’. 그 시절이라고 항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항의도 그저 풍류의 일부로 여기고, 성가시게 굴고 시끄럽게 구는 존재는 계곡에서 쫓아내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비판과 항의의 목소리 덕분에 계곡의 풍경은 조금씩 변했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 법.
이제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본다. 어느덧 중류에서는 벌거벗은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중류에 머무는 소설이 상류를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일도 종종 목격되었다. 물에 들어가도 옷은 입는 이들은 분명 진화했다. 문제라면, 이들이 알탕의 후예인 ‘아재’라는 점이다.
‘아재 소설’은 알탕 소설만큼 노골적이지 않았다. 문학적으로 더 고상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아재들은 활발했다. 왕성한 활동력과 생산력으로 아재 소설은 이전 시대에 비해 늘었다. 여성에 대한 (텍스트적인) 폭력은 양적으로 줄지 않았고, 그만큼 소설에 드리운 여성 혐오는 애쓰지 않아도 드러났다. 이번에도 별다른 저격의 의도 없이 하나 고른다.
한국 문단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는 이상 문학상 수상작인 김훈의 < 화장 >은 어떤가. 주인공인 중년 남성은 아내의 뇌종양 투병을 2년 간 지켜본다. 아내의 투병 생활은 울부짖음, 구토, 똥이 난무하는 짐승의 생활로 그려진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아내의 투병 생활을 짐승처럼 보는 반면, 자신의 전립선염에는 슬프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일관한다. 동시에 나이가 딸 뻘인 신입 여사원을 향한 욕망의 시선이 서술 된다. 여사원의 질을 욕망하다 급기야 여사원이 낳은 아기의 입을 보며, “당신의 아기의 분홍빛 입속은 깊고 어둡고 젖어 있었는데, 당신의 산도는 당신의 아기의 입속 같은 것인지요”라 고 구술한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이 이렇다면, 한국 소설의 문학성은 여성을 문자로 학대하는 문학성文虐性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류로 건너간다. 하류에는 이제 겉보기에 무척 맑은 물이 흐른다. 그러니 여류라는 말을 버리자는 것처럼 남류라는 말도 구호로서의 의미조차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여류 소설에서 김치 냄새 아니면 향수 냄새가 난다고 조롱하던 남자들은, 하류를 감싸는 공기에서는 중류에서 퍼진 술 냄새가 나고, 물에서는 상류에서 스며든 비릿한 맛이 난다는 것을 자기들만 모른다. 아무리 이제는 하류 가 맑고 깨끗하다고 손짓해도 독자는 그 비릿한 계곡물을 마시기는커녕 발도 적시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지금의 한국 소설은 알탕의 후예인 아재를 형님으로 모시는 남류다. 더 옅고 더 세련되었다 해도 비릿한 물이 스며 있다. 한국 드라마는 결국 연애물이고 한국 영화는 결국 조폭물이라는 농담을 따라 하자면, 한국 소설은 결국 계곡물인 셈.
< 상류엔 맹금류 >에서 화자는 계곡에 들어 갔다 되돌아 내려온 곳에서 아까는 보지 못했던 안내판을 본다. “위쪽에 맹금류 축사가 있더라고 나는 말했다. 똥물이에요. 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 한국 소설의 독자도 그렇다. 개인성과 자율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서 교육과 문학 제도가 가린 ‘아까는 보지 못했던 안내판’을 확인한 독자는 한국 소설이라는 계곡을 떠나고 있다. 남류로서는 꽤 억울할 수 있 다. 차별적인 남성이 맞다면 그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남류 소설은 오히려 ‘리얼’한 것이 아니냐는 소심한 변명부터, 평생 누린 남자라는 특권을 직시한 채 그 과오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소설도 많다는 당당한 항의도 나온다.
그런데 현실을 반영한다는 그 ‘리얼한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은 대체로 ‘판타지’의 산물이다. 남류 소설은 ‘리얼한 소설’이 아니라 ‘리얼 판타지’ 소설이다. 반성과 성찰에서도 앞선 세대와의 철저한 단절과 극복이 아니라, ‘깊게 반성하는 남자인 나’를 보는 경우가 훨씬 많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실용적인 이유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형에 유혹되어 그 매력의 힘으로 지루한 일상의 생활양식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탄력을 얻는 것이다. 한국처럼 모욕이 일상화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한 변화가 더딘 사회에서는 가상세계에서라도 다른 삶, 다른 인간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계곡 주위만 맴도는 ‘리얼한 소설’은 ‘리얼’해서 지겹고 지루하다.
하류의 수질이 1급수로 바뀌어도 거기 머무는 인물이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는 낡은 인간형이라면, 계곡물은 고인 물이 되어 가고 고인 물의 미래에는 ‘여전히’ 부패만 남는다. 어쩌다 나온 남류 소설 몇 편으로 이 부패의 속도를 늦추긴 어렵다. 계곡 알탕을 자제하고, 술 먹은 아재를 쫓아내고, 하류를 겉보기에 맑게 만든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예 계곡을 갈아엎는다는 태도로, 새로운 인간형으로 태어난다는 자세로 ‘남자라는 병’을 치유하지 않으면 한국의 남류 소설은 앞으로도 남루할 것이다.
- 에디터
- 글 / 박준석(문학평론가)
- 일러스트
- 김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