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주도하에 지은 계획도시지만,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시’에 관한 희망이 없었던 건 아니다. 모든 새로운 것이 낡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신도시는 몇 년을 살아도 ‘터전’이 되지 않았다.
지난해 5월, 을지로 3가의 술집 신도시가 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신도시에 가봤느냐고 물었다. 그게 뭐냐고 되묻는 사람은 있어도 지명은 거론되지 않았다. 신도시는 작은 술집보다 낡은 이름이었다. 황무지 위에 세운 아파트, 경고장처럼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니는 빨간색 좌석버스, 실제 거리 이상으로 낯선, 방언처럼 들리는 동네 이름. 누구나 신도시를 알지만, 심지어 사는 사람조차도 그곳을 말하지는 않는다. 작년 한 해 서울 유출 인구 17만2천명은 18년만의 최고치였고, 경기도 순유입 인구 9만5천명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지만, 다들 집을 찾아간 것일 뿐 터전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신도시라는 이름에 막연한 기대감을 갖던 시절도 있었다. 어쩌면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속 주인공이 찾던 ‘아메리카’와 비슷했을까. 그때는 신도시가 뭔지 몰랐지만 흥분했고, 지금은 신도시가 뭔지 알지만 잊어버렸다. 마땅히 있을 거라고 믿는 ‘신도시’가 있었으나 너무 오래되었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표현에 따르면 신도시는 “소매가 아닌 도매 방식으로 도시를 바꾸”려는 계획이었다. “30만 가구에 달하는 엄청난 물량의 신도시 아파트들은 도시화의 주력 부대였던 베이비붐 세대의 무주택자들을 위한 주거 모델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왜냐면 신도시 자체가 그들에게 학력과는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보통 사람’의 지위를 제공하는 압도적인 사회적 이동 경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는 중산층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내 집 마련’을 돕기 위한 양산형 주거 모델”로 기능했다. ‘4.19 세대’라는 꼬리표가 붙은 40년대생들이 그 시작이었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집을 사는 것으로 사회적 이동을 수월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70년대의 강남 그리고 1980년대의 목동, 상계·중계, 고천 등지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솟아올랐고, 그 아파트들은 당시 집 장만에 나선 기성세대 일부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들 대다수는 분양가 상한제 덕분에 비교적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9년 불어닥친 부동산 가격폭등으로, 베이비붐 세대 사이에서는 이전 세대가 누린 사회적 이동을 누릴 수 없게 될 거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젊은 세대,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발명한 세대의 분위기였다. “1990년을 기준으로 25~39세 구간의 연령대, 즉 당시 생애 주기 상 내 집 마련의 시점이었던 유신 세대와 386세대 일부(이상 단락 내 모든 인용은 <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 박해천)”가 그들이었다.
같은 해 4월, ‘보통 사람’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제6공화국의 노태우 대통령과 현재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당시 경제수석이던 김종인이 발 벗고 나섰다. 제1기 신도시는 서울의 집값 폭등을 안정시키고, 주택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서울의 주택 보급률은 57.9퍼센트에서 68퍼센트로, 수도권은 63.3퍼센트에서 76.7퍼센트로 뛰어올랐다. 도매 시장에서 뭘 사본 적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들은 얼마라고 말하지 않고 몇 개를 살 거냐고 묻는다. 국가가 보장한 막대한 물량이 있었고, 분당 신도시와 일산 신도시의 경우 폐허 혹은 농지 위에 계획되어 도심 재개발에 비해 효율도 뛰어났다. 분양가상 한제도 여전했다. 그렇게 저렴한 가격으로 분당 9만7천1백 가구, 일산 6만9천 가구, 중동·평촌·산본 각 4만2천5백 가구가 건설되었다.
제1기 신도시의 수혜자는 베이비붐 세대 만이 아니었다. 대기업에게 신도시는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화된 역량을 매우 저렴한 가격에 실험할 수 있는 무대였다. 박해천은 말했다. “예컨대 신도시의 백화점은 항상 아파트보다 늦게 들어가죠. 일단 굉장히 싼 가격에 택지를 분양받아 놓고, 추이를 보면서 묵히는 거예요. 상황을 봐서 팔 수도 있고 거기다 백화점을 지을 수도 있어요. 자동차도 마찬가지예요. 1985 년에 1백만 대였던 자동차 보급률이 불과 10년 사이에 1천만 대를 넘어서요. ‘베드타운’으로서의 신도시가 큰 역할을 했죠. 자동차에 기반한 생활문화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었던 거예요.”
자동차와 대형 할인매장은 신도시가 낳은 두 가지 특징적인 생활문화였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준중형’이라는 자동차 등급도 이때 등장했다. 신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경제력은 중형보다는 낮고, 소형보다는 높았다. 신도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차는 아반떼였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중산층이라는 의식에 젖어 들기 시작했으나 (아직 아파트값이 오르기 전 이었으므로) 백화점에 갈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이마트는 서구의 대형 할인매장이 한국에서 하지 못한, 매대를 낮추고 조리 식품 등으로 고객에게 다가서는 전략을 통해 신도시를 사로 잡았다. 한국에서 구글이 성공하지 못하고 네이버가 성공한 배경과 유사했다.
자동차를 타고 서울로 출퇴근하는 남편과 대형 할인매장에서 카트를 끌고 장을 보는 아내가 마침내 바라보는 곳은 이전 세대 중산층과 다르지 않았다. “말로만 들어보고 실제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세계, 한때는 소수 상류층의 전유물이었으나 전두환 정권 시기에는 사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세계, 그리하여 ‘동경’의 대상이 될 법한 나름의 연혁을 갖춘 세계(<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 박해천)” 사교육이었다. 대치동을 근거지로 삼던 사교육은 고교 비평준화 지역인 신도시로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에 무지했던 아버지 세대를 반면교사 삼아, 베이비붐 세대는 치열한 교육을 통해 자신의 아이들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게 될 거라고 믿었다. 풍요로운 교육적 토대에서 탄생한 신도시의 아이들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한 축을 짊어질 것이었다. 다만 이 아이들은 자신들을 구원해줄 신도시가 없다는 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78년생의 제약회사 영업직 K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처음 일산 신도시 마두동의 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이미 목동 아파트를 구입해 일정 이상의 성과를 거둔 4·19세대 였다. 일산 신도시 아파트가 속속 완공되어가던 1994년이었다. 구일산이라고 불리던, 아직 시골이나 다름없는 능곡, 탄현에서 온 친구들과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뒤섞인 독특한 분위기의 고등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요즘의 ‘휴거’ 사태처럼, 부모님의 집이 친구를 차별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활발하고 개구진 학창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마두동의 집값이 오르기 시작 할 무렵 아파트를 팔았다. 1년만 늦게 팔았어도 1억 이상의 차액을 챙길 수 있었던, 좀 성급한 결정이었다. 집안은 일산 신도시 서쪽의 탄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는 뭇 사람들이 명문이라고 부르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를 다녀왔다. 졸업도 하기 전에 국내 굴지의 제약 회사 입사를 확정했으며, 7년을 연애한 여자와 결혼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선배들이 말하는 남을 밟고 올라서는 사회생활 없이도, 허겁지겁 돈만 좇는 삶을 살지 않아도 행복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혼살림은 일산 백석의 브라운스톤에서 시작했다. 브라운스톤의 19평 복층 오피스텔은 신혼부부들이 호텔에 머무는 것처럼 들 뜬 기분으로 살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 직장은 강남이었지만, 자신도 아내도 익숙하고, 친구 부부도 많이 사는 일산이 좋았다. 거의 집안 도움 없이 3년의 직장생활을 통해 저축한 돈만으로 전세를 얻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외국계 제약회사로 이직한 후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 시간 1시간 30분 전인 아침 7시 30분까지 출근하는 생활이었다. 직장동료들은 그를 경이롭게 바라봤다. “일산이니까 늦을 거야, 라는 사람들의 생각을 일산인데 이 시간에 온다고? 로 바꾸는 게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했어요.” 연봉을 제외한 상여금만 매년 2천5백만원 이상 받던 시절이었다. 모든 빛이 그렇듯이, 어둠을 마주하기 전까지 그것이 얼마나 밝은 것 인지 알지 못했다.
제1기 신도시는 업무 상업용지였던 정자동 일대가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로 설계 변경되는 1999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정자동에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 유명한 정자동 ‘카페 거리’가 조성되었다. 서구적인 패션, 디자인, 인테리어 공간이 생겨났다. 제2의 청담동이 라는 호칭이 따라붙었다. “다른 신도시의 경우 90년대 모델로 계속 굴러가고 있는 상황에서 분당이 치고 나가게 된 거예요. 한 도시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건 결혼한 지 10년 내외인 가구들, 30대 가구들이거든요. 그들이 소비문화 그리고 사교육의 주도권을 쥐고 도시를 개척해나가니까요. 강남의 중상류층 30대들이 분당에 모여든 거죠.” 박해천이 설명했다.
제1기 신도시의 집값이 정점을 찍은 2006에서 2007년을 기준으로, 일산 신도시의 집값은 약 5배, 분당 신도시의 집값은 약 10배가 뛰었다. 서울의 6~7배에 비해서도 일산 신도시의 집값은 낮게 올랐다. 여타 신도시의 사람들에게 사회적 이동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의식이 생겼다. 마침 국가는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줄 테니 얼른 집을 사라고 권했다. K 역시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집주인이 결혼하는 딸에게 그 집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안 그래도 K와 아내는 아이를 가질 계획을 세우고,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 하려던 참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의, 같은 백석에 위치한 31평형 고급 오피스텔을 봤는데 아내가 너무 좋아했다. 그녀가 좋아하면 됐다. 별 고민 없이 전세 계약을 마쳤다. 그런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집주인이 파산 신청을 하면서 전세보증금이 날아갔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이때 K는 부동산 자산과 관련한 첫 번째 결정을 한다. 엄청난 부자가 되길 바란 적도 없고, 이미 지금의 벌이로도 풍족했다. 그 돈을 받으려고 소송을 벌이면 회사 일을 제대로 하기 힘들 것 같았고, 그 스트레스가 아내와 아이에게 이어질 것 같았다. 그는 소송을 포기하고 그 집이 경매로 나왔을 때 일부 은행 대출을 받아 구입했다. 비교적 넉넉한 살림살이에 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상처의 틈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참을 수는 있다”고 말하는 K는, 아버지에게 집과 관련된 사항을 비밀로 했다. 짐작하건대 많은 어른이 도달하는, 어렵고 귀찮은 걸 하느니 차라리 돈을 낼 지언정 안 하는 걸 선호하는 단계였을 것이다. 아이도 있는데 내 집이 없으면 되겠냐며 당신들이 돈을 보탤 테니 탄현의 한 아파트를 사라고 권했다. 두 번째 결정을 내렸다. 역시나 별 고민 없이 자신의 돈까지 얹어서 샀다. 부모님이 탄현의 아파트를 권한 배경에는 일산 GTX가 들어온다는 허위정보가 있었다. 하지만 영업실적의 압박과 사내 정치의 피로감에 비하면 그리 심각하진 않았다. 백석의 오피스텔에 세를 주고 탄현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보증금을 날리는 타격을 입었지만, 은 행 대출을 안고 있었지만, 직장은 튼튼했고 그의 위상도 여전했다.
신도시부터 시작되는 부동산 시장의 ‘시나리오’는 아버지와 K 사이의, 베이비붐 세대와 386세대가 써내려갔다. 박해천은 그들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그를 재신임하지 않았다”고 봤다. “초기 설정이 박정희로 시작하는 세대죠. 극과 극만 있어요.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반발하는 사람 혹은 일 열심히 하고 가정 잘 꾸려나가는 게 애국애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2004년에 종합부동산세 법안이 통과되는데, 이걸 주도한 게 노무현이에요. 우리 나라는 1가구 2주택에 양도소득세를 부과하지 않아요. 국가가 1가구2주택을 일종의 복지 수단으로 장려해온 거죠. 하지만 1가구2주택 이상을 넘어가는 경우의 양도차액에 대해서는 절반에 가까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죠. 실제 가격의 1/3 정도밖에 안 되는 기준 시가로 양 도소득세를 매기던 것을 현재 시세로 매기도록 바꾼 거예요. 조중동에서 노무현을 거의 죽이려고 달려든 이유였죠.”
전통적인 부자들만 반발한 게 아니었다. 2004년은 신도시의 베이비붐 세대와 386세대가 부동산으로 자산을 불리는 시기였다. “노무현의 조치는 정당했지만, 늦은 시점이었어요. 1989년과 같은 부동산 폭등을 이미 경험했으면 국가가 진즉 부동산 세제를 현대화하려는 노력을 했어야죠.” 그들이 신도시를 국가라는 도매 시장에서 얻은 혜택이라고 느끼기엔 너무 많이 지나온 터였다.
K는 아내에게 미술학원도 차려줬다. 아이가 태어나자 아내는 자신의 삶이 주부로 끝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내가 결혼 전 처럼 일을 하면 좀 괜찮아질 것 같았다. K의 예상은 반만 맞았다. 예전의 활기를 되찾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보고 온 새로운 아파트 이야기를 했다. 일산 덕이 지구의 아이파크 아파트였다. 아내는 그곳에 푹 빠졌다.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한동안 아내의 기분이 조금만 안 좋아도 아이파크 아파트가 떠올랐다. 세 번째 결정으로 이어졌다. 조금 손해 보며 탄현의 아파트를 팔고 아이파크 아파트를 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내가 좋아했고, 투자가 아닌 살 집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대출액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늘어났다. ‘하우스 푸어’의 시작이었다. 계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파크 아파트는 할인 분양을 발표했다.
제1기 신도시 아파트 대개가 지은 지 20년이 넘은 상태다. 노후화를 논의하는 단계지만, 낮지 않은 용적률과 낮은 경제성으로 재건축에 관한 전망은 비관적이다. 오히려 ‘신도시의 신도시’가 속속 계획되고 있으며 이미 상당히 완공되었다. 김포, 파주, 양주, 송파, 판교, 광교, 동탄의 제2기 신도시, 검단, 오산, 용인 등등의 제3기 신도시.
덕이지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일산이지만 파주 신도시에 더 가깝다. 몇 번의 부침을 겪었으나 K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고, 대한민국 직장인 상위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돈을 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는 곳은 신도시의 신도시였다. 국가는 신도시에 살고 있던 그들에게 또 하나의 신도시를 내밀었을 뿐, 그 것이 이전의 신도시와 어떻게 다른지 말해주지 않았으며 책임지지 않았다. 박해천은 말했다. “아파트를 통해 자산 소득을 올리기는 거의 힘들어진 상황이죠. 달랑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을 가진 사람이 집으로 돈을 벌겠다? 미친 짓이에요.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분양권에 당첨돼서 집을 사면 저절로 올랐어요. 2000년대 중후반에 집값이 오른 건 한국 경제가 성장해서가 아니라 금융 대출 때문이죠.”
청담동 이상으로 번성할 것 같던 정자동 카페 거리도 예전 같지 않다. 지금은 판교 백현동의 카페 거리가 더 활기차다. 판교에는 현대백화점, 죽전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웅장하게 들어섰다. 분당 신도시 역시 신도시의 신도시로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강남을 등에 업고 신도시의 신도시에서도 새로운 문화를 일굴 수 있는 금전적 여유를, 아파트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단지 돈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도 시 대도 우주의 기운도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혼자 싸워나가는 절망감을 모르고 살 수 있었다.
K는 집에 있어서 처음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이파크 아파트 비상대책위원회에 들어갔다. 입주 후에는 입주자 대표로도 일했다. 시청, 은행, 시공사를 오가며 할인 분양에 대해 항의하고, 입주자의 의견을 전달하는 데 앞장섰다. “정말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이런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는 걸 알았다. 전국적으로 할인 분양에 대한 보상을 받아낸 예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의 항의는 비단 아이파크 아파트의 관계자가 아닌 더 크고 높은 곳을 향하는 지도 몰랐다. 집이 있는데 없다고 느끼면서 살고 있었다. 잘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었다. 신도시에 살면서 ‘신도시’에 살고 싶었다.
K는 백석동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덕이지 구의 아이파크 아파트에는 세를 놓았다. 싸울 만큼 싸워본 뒤, 더 이상 집에 끌려다니면서 살지 않겠다는 나름의 결단을 내렸다. 부모님 집에서 몇 년간 머물렀으며, 그동안 예쁜 딸을 얻어 네 식구가 됐다. 하여튼 신도시를 떠나지는 않았다. 운 좋게 옥상과 창고까지 쓸 수 있는 환경에 기꺼워하며 지금은 파주 운정 신도시의 빌라에 산다.
신도시가 단지 과거의 유산만은 아니다. 1989년 제1기 신도시 계획에 포함되어 있던 마지막 부지의 건물이 올해 6월 완공을 앞두고 있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불과 20분 거리, 자유로를 지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일산 방면으로 빠지는 길에 처음 만나는 백석 요진 와이시티다. 상업지구로 허가가 났지만 끝까지 개발이 안 되었던 고양종합터미널 옆 농협 부지를 요진건설산업이 사들여 주상복합 단지로 지었다.
최대 59층의 마천루 주상복합 아파트 6동 2404세대, 오피스텔 298세대를 기본으로 극장, 쇼핑몰, 호텔, 병원, 터미널 등이 모두 단지 내 혹은 단지를 면하고 펼쳐져 있다. “차 없이 모든 걸 즐길 수 있는 곳”, 즉 일산 신도시 내 하나의 독립된 도시를 의도했다. 2013년 6월 최초 분양 시에는 전 평형 미분양이 발생했으나, 요진시티의 야심찬 전망과 합리적인 가격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전량 소진되었다. 여전히 할인 분양을 남발하면서도 미분양이 속출하는 제2기 신도시 아파트들과 대조적이다. “애초에 입지를 의심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입주자의 대부분인, 서울에 직장을 둔 30~40대에게 매력적이었을 거예요.” 요진건설산업의 조철우 차장은 말했다. 일산 신도시의 입구에, 더 이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상복합단지. 신도시와 거리로든 문화로든 가장 먼 사람들이, 제1기 신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완성하려는 참이다.
K는 국내 제약회사로 한 번 더 이직했다. 지점장을 할 만 한 경력에 접어들고, “큰 일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걸 깨닫고, 작지만 젊고 전망 있는 회사를 찾았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시절 빼고 이만큼 행복했던 때가 없다고 했다. 연봉을 줄여서 와야 했지만, 사내 정치가 아닌 일을 하는 사람들과, 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했다. “제가 만족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면서부터, 고객과 대화를 나누는 깊이가 달라졌어요.”
집에 빨리 들어오라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그는 자신에게 빛만 가득했던 시절을 얘기할 때보다 더 밝은 얼굴이 됐다. “전 신도시가 좋아요. 대학교 빼고 전부 해결할 수 있는 도시죠.” 신도시의 커다란 입구가 존재했고, 출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집이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라 살아가는 장소라면, 아무도 출구를 찾지 않는, 그래서 출구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도시야말로 이상적일 것이다. 물론 부동산의 신화를 덧씌우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결코 닿을 수 없다. 우리는 ‘신도시’에 갈 수 있을까? K는 여전히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 30분까지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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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정우영, 이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