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사랑이 사라졌다. 아니, 변하고 있다.
<협상>을 보러 갔다. 영화를 보다 말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손예진은 뭐 하러 이런 영화에 나왔을까. 내 말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배우는 각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다. 전도연은 배두나와 자리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 김태리는 전종서와 자리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 손예진은 사랑의 대사를 낭독할 때 ‘오그라들지 않게’ 하는 희귀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손예진이 나온 최근의 ‘사랑의 영화’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하지만 거의 기억나지 않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지나쳐서 <덕혜옹주>가 있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손예진이 아니다. 그런 다음 손예진은 정치에 눈먼 남편과 싸우고(<비밀은 없다>), 돈 가방을 찾아 악전고투하고(<나쁜 놈은 죽는다>), 바다에서 옥새를 삼킨 고래를 둘러싸고 활극을 벌인다(<해적, 바다로 간 산적>). ‘눈물의 여왕’을 만나려면 거의 10년을 거슬러 <오싹한 연애>까지 가야 한다. 두리번거리는 심정으로 (지난 5년간의) 박스오피스 명단을 살펴보았다. 무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언가? 사랑의 영화들. 어머니의 사랑에 관한 영화는 사랑의 영화가 아닌가요(<신과 함께>), 라고 심술을 부리는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좀 더 따분하게 설명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들.
여기 첫 번째 대답이 가능하다. 그건 시대에 뒤처진 것이 아닌가요? 나는 즉각적으로 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연인과 나누고 있는 키스는 시대에 뒤처진 것인가요? 그런데 왜 헤어진 지금 울고 계신가요? 이별에 고통받는 당신에게 누군가 점잖게 지금 당신은 시대정신에 뒤처진 것이에요, 라는 조언을 하면 기분이 어떨까. 우리는 지치지 않고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좀 더 근사하게 말했다. 우리는 사랑을 사랑할 것입니다. 나는 질문을 수정하고 싶다. 왜 사랑은 주변으로 철수했나요? 틀림없이 <1987>에 사랑이 있지만 그건 역사의 주변, 이야기의 주변, 중심의 주변으로 철수했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느끼는 아픔은 사랑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연희는 역사의 서사 안에 잘못 끼어들어간 불순물처럼 여겨질 정도로 주변을 맴돈다. 역사 앞에서 로맨스는 끼어들 틈이 없다. <택시 운전사>의 1980년 5월 광주. 일제 강점하의 강제수용소 <군함도>. 아버지 영조와 대결하면서 뒤주에 갇힌 세자 <사도>. 남북한의 긴장 속에서 사랑을 나눌 겨를이 없는 <공작> 그리고 <강철비>, 심지어 <공조>.
약간 망설이면서 당신은 두 번째 대답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하찮은 것인가요?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할 것이다. 프로이트는 만일 사랑이 없으면 정신병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 자살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대로 거지는 굶어죽지만 자살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영화에서 사랑은 보잘것 없어 보인다. 소녀는 엄청난 초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자기 앞에 나타난 근사한 소년 최우식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마녀>). 서로 싸우느라 바빠서 그들은 로맨스의 시간을 가질 틈이 없다(<범죄도시>, <청년 경찰>. <검사외전>, <마스터>. <내부자들>, <더 킹>). 나는 끝없이 목록을 더할 수 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영화에 나온 사람이 다 죽어야 영화가 끝난다. <곡성> 그리고 <부산행>, <더 테러 라이브>. 그러니 그들 사이에서 사랑은 상대를 찾을 도리가 없다. 거기엔 사랑의 욕망도 없고 증후도 없다. 거기엔 외설적 표현도 없고 병적인 발작도 없다. 이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주인공들이 사랑의 불감증에 빠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제 용기를 내면서 약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세 번째 대답을 할지 모르겠다. 사랑할 만한 대상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사랑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닌가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멈칫거리게 된다. 그걸 긍정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상을 찾는 데서 시작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고 싶다. 사랑은 대상에 눈머는 것이다. 오래된 표현. 눈먼 사랑.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몇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우회해보고 싶다. 당신이 웃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지하게 지난 몇 년간 가장 목숨을 건 사랑의 행위를 실행한 영화는 <옥자>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산골 소녀 미자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며 단순한 동물 애호가가 아니다. 이 소녀는 사랑하는 옥자를 되찾기 위해 산에서 내려와 바다를 건너 미국까지 간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내기를 해서 옥자를 찾아 되돌아온다. 이때 나는 사랑하는 대상을 양미간을 찡그려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으로써 대상 사이에 놓인 차이의 네트워크를 교란시키고 있다. 사랑의 대상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1920년대 일제 강점하에서 무장 독립단체의 배후를 캐러 들어간 이정출(송강호)이 적인지 친구인지 모호해질 때, 그것이 김우진(공유)에게 느낀 시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미인계를 쓴 정채산(이병헌)은 얼마나 유혹적인가(<밀정>). 좀 더 적극적인 사랑이 있다. 교도소에 들어온 신참 조현수(임시완)에게 악당 한재호(설경구)는 의리를 내세우는 척하면서 사랑에 빠진 자신을 걷잡지 못한다(<불한당>).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 범죄조직에 밀고자로 잠입한 이자성(이정재)의 정체를 알면서도 정청(황정민)은 그를 마지막까지 감싼다(<신세계>). 나는 단순하게 LGBT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이들은 <친구>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혹은 거의 똑같은 이야기인데도 신분을 위장하고 접근한 형사 정재곤(김남길)과 그에게 빠져드는 범인의 애인 김혜경(전도연)의 사랑은 시간을 놓친 것처럼 왜 이다지도 고전적으로 보이는가(<무뢰한>).
산업 안에서 영화 제작자들이 멈칫거리고 있을 때, 틀림없이 무언가 건드리기는 했지만 그게 무언지 정작 영화가 잘 모르고 있을 때, 대중들은 사랑의 전복적인 가장자리에로 시선을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아니, 어쩌면 대중 자신들도 잘 모르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제까지 관습적으로 사랑에서 보편자라고 정의된 대상과 특수자라고 불리는 대상 사이에서 자리 바꾸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기 시작하는 논점은 환상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순하게 감정적인 효과가 전부인 서사의 완결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없다. 거기서 환상은 감정을 실천의 계열로 옮겨가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때 이 실천은 관념에 머물지 않고 몸과 마음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을 뛰어넘어 어떤 통일을 이루려 시행착오를 시작한다. 이 통일은 해부학적 요소들, 생물학적 기능들, 사회적 전술, 쾌락의 감각작용이 일제히 동원되며 사랑의 이름으로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단 한 마디로 사랑과 섹스의 간극. 이때 이제까지 열거한 영화들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전까지 친화적이었던 사랑과 섹스의 관계가 지금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환상 자체가 찌그러진 것이다. <옥자>의 마지막 장면에서 도축장에서 구해온 새끼 돼지와 옥자, 그리고 미자 사이의 유사 가족의 이미지를 감싸는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랑 없는 섹스가 이제까지의 질문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섹스 없는 사랑이 질문이 될 것이다. 약간 평화로운 말투로 이 질문에 대답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사랑의 외설적 버전을 말끔하게 청소한 것인가요? 나는 불길하게 덧붙일 것이다. 리비도가 사라진 사랑. 당신은 질문할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인가요? 이번에도 질문이 잘못됐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퍼포먼스이며, 시도이며, 모든 것을 내건 기투다. 그때 그 내기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힘겨운 승부다. 왜 힘겨운가? 거기서 내가 내 자신에게 꼭 들어맞지 않은 나를 만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한다는 건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마주 보는 ‘낯선’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정신분석 기호학자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모든 사랑은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마주 선 거울 앞에 그저 텅 빈 이미지, 아무것도 반사되지 않는 거울이 당신 앞에 있다면 그걸 마주 바라보는 당신은 그 앞에서 어떤 기분이 될까. 모든 사랑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프로이트의 말이다. 글 / 정성일(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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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이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