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범은 자신이 누군지 안다. 그의 이야기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첫 월드 투어를 서울에서 시작하는 소감이 어때요? 제 베이스가 서울이니까 여기에서 시작하고 싶었어요. 활동을 10년쯤 했으니 할 때가 됐죠.
투어 제목이 ‘SEXY 4EVA WORLD TOUR’예요. ‘SEXY 4EVA’는 작년에 발표한 곡 제목이기도 하죠. 박재범한테 섹시하다는 건 뭐예요? 저한테 섹시하다는 건요,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요.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믿고 행동해요. 그러면 남들이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결국 날 그렇게 봐요. 그러니까 섹시한 건 자신감의 문제죠.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해왔어요? 네. 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의심해도, 남들에게 맞추지 않고 나대로 행동했어요. 처음엔 무시하던 사람들도 이젠 제가 생각한 제 모습대로 보고 있죠. 내가 날 안 믿으면 누가 믿어주겠어요.
다큐멘터리 <Jay Park: Chosen1>에 박재범의 역사가 다 있던데, 왜 ‘Chosen1’이에요? 그거, 너무 ‘자뻑’ 같지 않아요? 전 다른 제목으로 하려고 했어요. 진짜로요. 전 누구나 선택받았다고 생각해요. 재능 있는 사람은 정말 많아요. 저도 뭐 하나 엄청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단지 어떤 마음가짐을 먹었고 원하는 걸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 그게 다른 거예요.
거기서 9년 전 ‘Nothing on You’를 맑게 부르는 영상을 보는데, 시간 참 빠르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박재범의 시작이었죠. 그땐 모든 게 담백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자고 이런 사람을 아이돌 그룹에 넣어놨나 싶어요. 저도 신기해요.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일했던 타이어숍에 방문했던데, 기분이 어땠나요? 반가웠죠. 그때도 타이어숍에서 일하는 거에 대해선 별생각 없었어요.
그때 박재범이 굉장히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우울했다면 거기서 일하지 못했겠죠. 솔직히, 진짜 우울했으면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 정도로 큰일이었죠. 근데 전 그냥 돈 벌면서 앞으로 뭐 할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인생의 한 사건이었고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제가 남의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으면 그때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 이 자리에도 없었을 거고요.
그 후의 박재범은 계속 반증해왔습니다. 그때그때 필요한 능력치를 채워 여러 방면에서 자신을 증명해왔어요. 래퍼로서, 알앤비 보컬리스트로서, 회사의 설립자이자 대표로서. 전 어느 신에 있든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하나를 엄청 잘하진 않지만 여러 가지를 하는 게 제 강점이란 걸 알았죠. 저는 많이 던져보는 사람이에요.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안 되는 것도 많지만 되는 것도 많아요.
실패한 적 있어요? 많죠. 앨범이 다 잘되진 않았으니.
최근 발매한 <The Road Less Traveled>는 한국어 가사가 거의 없는 묵직한 힙합 트랙으로 가득 채웠죠. 대중을 위한 앨범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중을 위한 앨범은 아니죠. 힙합 문화와 시애틀을 위한 앨범이에요. 시애틀 친구들을 참여시키고 싶었고, 영어로 제대로 된 힙합을 해보고 싶었어요. 제겐 자랑스러운 작업이에요.
고향인 시애틀은 당신에게 어떤 곳이에요? 날 만들어준 곳이죠. 태어나고 자란 곳이잖아요. 친구, 친척, 비보잉 크루, 학생 때 활동한 힙합 동아리도 거기 있죠. 힙합엔 출신지와 동료들을 소중히 하는 공동체 문화가 있어요. 시애틀은 힙합 신이 활발하지 않아서 거기 있는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요.
미국에 사는 동양인으로서 비보잉, 힙합 문화를 즐기는 데 한계가 있진 않았나요?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동양인이 왜 농구하냐”, “가서 수학 공부나 해라”, 뭐 그런 거. 근데 저는 그런 애가 아니었죠.
십 대 때 처음 온 서울은 어땠어요? 한국에 혼자 왔더니 이번엔 제가 미국인인 거예요. ‘양키 새끼’라고 하고, 한국말 못 한다고 놀리고. 외로웠죠. 하지만 결국 제 정체성을 완성해준 곳은 서울이죠. 이젠 서울이 미국보다 편해요. 제일 좋아하는 술도 소주고.
‘아시안은 힙합과 어울리지 않아’, ‘한국 아이돌은 이런 모습이어야 해’ 같은 편견과 계속 싸워왔던 게 박재범의 삶이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 단정 짓는 게 싫어요. 아이돌은 이래야 한다, 래퍼는 저래야 한다, 동양인은 그래야 한다, 그런 게 어딨어요? 사람마다 다른 거죠. 이젠 제가 꽤 오래 해왔으니, 박재범은 식상하다는 편견도 있겠죠. 그런 편견은 늘 있는 거예요. 제가 은퇴할 때까지 맞서야 하는 거죠. 남들이 절 어떤 편견을 가지고 보더라도, 전 다른 사람과 어울리려고 제 모습을 바꾸지 않았어요. 저는 저대로 하고, 사람들을 제게 모이게 했죠.
1백여 명이 넘는 국내, 해외 아티스트들과 협업했죠? 많은 이가 박재범을 찾는 이유가 뭘까요? 2백 명은 넘을걸요. 이유는, 음, 해주니까? 전 잘난 척 안 해요. 어리거나 데뷔가 늦다고 나보다 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 똑같은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잘하는 사람을 보면 먼저 연락하고, 잘한다고 표현하죠.
AOMG, 하이어 뮤직 레코즈의 수장이기도 하죠. 박재범은 어쩌면 박재범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찾는 사람 같아요. 결국 절 움직이는 건 사람들이에요.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혼자 잘 사는 게 무슨 소용이에요? 사람들이 절 필요로 하고, 도움을 주고, 그들이 잘 되는 데서 행복을 느껴요. 힙합은 커뮤니티잖아요. 전 힙합을 통해 많은 걸 얻었죠. 이렇게 <GQ>에도 나오고,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먹고살고. 저도 받은 만큼 이 커뮤니티에 돌려줘야 제 역할을 하는 거죠.
타고난 보스 기질이 있는 건지. 전 보스 아녜요. 보스는 회사가 잘되기를 원하지 사람이 잘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저는 보스보다는 그냥 사람. 회사보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항상 너무 바쁘잖아요. 외로움도 타요? 음, 제가 있는 위치에서의 부담감, 이런 느낌을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가끔은 혼자인 것 같죠.
슬럼프는 없었어요? 지금이요. 사실 좀 지쳤어요. 전 그해 2월이면 1년 스케줄이 다 정해져요. 오늘 촬영 끝나고도 일정 있고, 해외 다니면 곧 2020년 되겠죠?
어떻게 스스로를 달래가며 일하고 있어요? 언젠가 은퇴할 때를 생각하면서. 하하. 당장 하겠다는 얘긴 아닌데, 농담도 아녜요. 하고 싶은 건 거의 다 해봤고, 열심히 성실히 최선을 다해왔으니까.
은퇴하면 뭐 할 거예요?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고 싶어요. 연예인을 은퇴하고, 제작자로 활동한다든지, 비하인드 신에 참여하는 식으로 지내고 싶어요. 전 지금도 하는 일이 음악인 거지, 직업이 연예인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전 남들이 저를 쉽게 보고 쉽게 생각하는 게 싫어요. 제가 연예인이란 이유로, 마치 제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거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네. 사람은 항상 멋질 수가 없잖아요. 인간이니까.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완벽할 필요도 없고요. 추할 때도, 슬플 때도, 화날 때도 있죠. 전 사람들이 저를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많은 걸 이룬 박재범이 여전히 갖지 못한 게 있다면 뭐예요? 저한테 없는 거? 많죠. 일단 키. 그리고 말 그대로 대박 난 게 없어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음악을 해왔지만, 메가히트한 순간 같은 건 없죠.
지난해와 재작년에 상을 휩쓸어놓고 그런 말을. 하하. 하지만 뭐, 만족해요, 10년간 차근차근 쌓으면서 올라온 거. 못 가진 것보단 가진 게 많잖아요.
가진 것 중 가장 자랑스러운 건 뭐예요? 영혼. 하나도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아직까지 갖고 있다는 거죠. 돈과 유명세를 위해 내 자신을 깎아내리진 않았으니까. 영혼을 팔지는 않았으니까.
윌 스미스의 오래전 인터뷰를 봤는데, 그가 랩에 욕을 안 쓰는 이유는,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자기 생각을 멋있게 표현하기 위해 그런 말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래요. 박재범이 힙합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가요? 자기가 뱉은 말을 책임질 줄 아는 것. 힙합이란 문화를 존중하는 거요.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해서, 막말을 해도 되는 장르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이나 뱉으면 안 돼요. 자기 랩에 책임을 져야죠.
스무 살 무렵의 인터뷰에서 비행기 타는 게 무섭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저, 아직도 무서워요.
아직도요? 밥 먹듯 미국에 다니는데? 전보단 훨씬 괜찮아졌지만 하늘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해요.
이 얘기를 하면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해서 던진 질문인데 의외의 답이. 그런 건 변하지 않나 봐요.
박재범의 영혼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요? 네. 아직 제가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음, 백 퍼센트 깨끗한 건 아니더라도요. 하하.
- 에디터
-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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