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용에겐 더할 것도, 보탤 것도 없다. 그 자체로 담대함과 선명함이 번뜩인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더니 그칠 줄 모르네요. 기분 괜찮아요? 이런 날씨 싫지 않아요. 어렸을 때는 비가 별로였어요. 우중충해지는 건 싫더라고요. 근데 나이가 들면서 달라졌어요. 오늘 같은 분위기를 좋아해요. 비가 오면 기분 전환이 돼요.
이런 날엔 뭘 해야 더 특별할까요? 빗속을 걷는 거요.
정말요?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던 날 한번 해봤어요. 집에 혼자 있느라 되게 답답하고 심심했거든요. 안 되겠다, 나가자. 그러고는 우비로 중무장을 하고 한강을 따라 비를 맞으며 걸었어요.
맙소사. 그런 날씨에 산책을 하는 사람은 흔치 않죠.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다녔겠어요. 사람이 많든 적든 원래 걷기를 즐겨 해요. 어제도 꽤 걸었어요. 15킬로미터 정도.
뭐가 그렇게 장기용을 밖으로 이끄나요? 고민거리가 있을 때 집에 가만히 있다 보면 고민은 더 커지고 마음은 복잡해져요. 그런데 밖에서 바람을 쐬고 사람들에 섞여 같이 걸으면 생각이 가벼워져요. 똑같은 고민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죠. 아무 생각 없이 걷기도 하고 혼잣말도 하고. 그러다 보면 이게 크게 고민할 일인가 싶어지기도 해요.
언제부터 그렇게 계속 걸었어요? 아버지가 운동을 무척 좋아하세요. 주말이면 가족끼리 등산을 하고 온천 들렀다가 집에 와서 ‘1박2일’을 보곤 했어요. 그러면서 걷기가 일상이 됐죠. 모델 일을 하기 위해 혼자 울산에서 서울로 왔을 때도 정말 많이 걸었어요. 처음 1년은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집에서 잡생각을 하며 축 처지는 게 싫어서 걷고 또 걸었어요.
1년 전 이맘때는 뭘 하고 있었나요? 첫 영화를 찍고 있었어요. <나쁜 녀석들: 더 무비> 촬영을 9월부터 시작했어요. 아마 2017년 새해였을 거예요. 3년 뒤에는 영화배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고 포토 월에도 서고 싶다고 막연히 바랐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이뤄졌어요.
영화가 흥행을 하면서 한 달 가까이 상영되고 있던데 몇 번이나 봤어요? 시사회로 2번, 혼자 1번 봤어요. 나중에 혼자 볼 땐 생소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입장권을 사고 내가 나오는 영화를 보다니! 살면서 처음 겪는 경험이라 재미있고 신선했어요.
곧 새 영화에 들어가죠? <나의 아저씨> 이후 쉬지 않고 온 것 같은데 스스로 몰아세우는 타입인가요? 쉬고 싶지가 않아요. 쉴 때는 쉬어야 재충전할 수 있겠지만 저는 걷고 뛰듯이 계속 움직여야 에너지를 얻는 쪽이에요.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용기를 내 <고백부부>, <나의 아저씨> 오디션을 봤어요.
연기는 여전히 용기를 내야 하는 범주의 일인가요? 그쵸. 어렸을 때부터 엄청 소심하고 내성적이었어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조차 두려운 아이였고, 이렇게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건 꿈도 못 꿨어요. 모델이 돼서 사람들 앞에 서고 지금 일을 하면서 차츰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영화 <조커> 어땠어요?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한 거 봤어요. 배우로서 그런 엄청난 연기를 보면 어때요? 조커 연기가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냐는 질문을 받고 호아킨 피닉스는 오히려 재미있었다고 했대요. 어떻게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지 기대됐고 몸짓, 눈빛, 말투 모두 뭔가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거예요. 그의 연기를 보면서 알겠더라고요. 나중에 비슷한 역할이 주어진다면 난 어떻게 할까 상상을 하면서 봤어요.
매 장면 힘들면서도 재미있게 연기한 작품이 있나요? 처음 주연을 맡은 <이리와 안아줘>가 그랬어요. 사이코패스를 아버지로 둔 경찰 역이었는데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었어요. 근데 아버지로 인한 피해자의 딸을 사랑하고, 경찰이 되어 괴물 같은 아버지와 재회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궁금했어요. 쉽지 않았지만 그 장면들을 찍으면서 연기적으로 많이 배웠어요.
연기는 좋아하는 일인가요, 잘할 수 있는 일인가요? 좋아하는 거죠. 근데 그 일을 잘해야 하는 시점이 됐다고 느껴요.
좀 성장한 것 같나요? 꽤 경험이 쌓였다거나 이제 뭔가를 알 것 같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한 단계라고 해야 할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고 확신이 들었던 순간도 있겠죠? 선뜻 떠오르진 않아요. 그런 경험이 있었겠지만 크게 연연하지 않아요. 일에 관해서는 냉정한 편이에요. 욕심도 크고요. 남들이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내가 봤을 땐 별로이거나,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맘이 들어요. 이런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울 필요가 있냐며 답답해해요.
그 말에 동의해요? 근데 그런 성향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만드니까요.
모델이 되기 위해 울산에서 상경했을 때 자신이 좀 있었나요, 아니면 모험이었나요? 모험보단 도전이었어요. 안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나란 사람이, 내가 가진 흥과 끼가 통할 것 같았어요. 내 안에 뭔가 다양한 것이 있다고 믿은 거죠. 결과가 안 좋았다면 “이런 건 안 좋아하네, 그럼 다른 걸 꺼내 보여줘야지”라며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냈을 거예요.
배짱이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런가요?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스스로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잖아요. 듣고 보니 배짱이 있는 것 같아요.
스무 살에 혼자 서울로 오면서 어떤 미래를 그렸나요? 모델이 되자. 이거 하나였어요.
모델이 된 뒤에 세운 목표는요? 목표라고 할 게 없었어요. 모델 활동에 단단히 재미가 들렸거든요.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 적이 없어요. 재미 하나로 했던 건데 감사하게도 사람들이 저한테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배우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 모델에 대한 애착이 이 정도일 줄 몰랐어요. 그런 와중에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뭔가요?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 잠깐 나왔던 것을 계기로 처음 오디션을 봤는데 말도 못하게 긴장했어요. 1~2평 남짓한 공간에 카메라 한 대가 놓여 있고 감독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죠. 당연히 떨어졌어요. 그 뒤에도 오디션을 계속 봤지만 다 안 됐어요. 그럴수록 ‘될 때까지 해보자’라는 오기가 생겼어요. 그 오기로 여기까지 왔어요.
왠지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연기한 ‘박모건’과 닮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스물 여덟은 이래요. 열정은 무한하고, 지금도 열정의 주인은 나예요”라는 대사가 있었죠. 아까도 말했지만 모델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일이 거의 없었어요. 기회가 고팠어요. 그래서 작은 기회라도 소중하게 여기고, 이걸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해요. 뭐든 잘하고 싶어요.
말하자면 열정이 넘치면서 자상하고 사랑 앞에선 감정을 숨기지 않는 박모건 같은 남자, 실제로 주위에 있나요? 그런 남자는 지구에 없지 않을까요. 모건이는 판타지적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아는 장기용은 어떤 사람이죠?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진중한 것 같은데 너무 진지하진 않고 외모와 다르게 엉뚱한 면도 있어요.
스스로한테 격려하듯 하는 말도 있나요? “잘 해내고 있어.” 듣고 싶은 칭찬이기도 해요.
누가 그 말을 자주 해줘요? 가족이요. 그래도 부모님은 늘 걱정하세요. 일이 잘되는 안 되든. 밥 챙겨 먹었니? 안 힘드니? 운동은 했니?
자취 8년 차인데 생활력은 강한가요? 요리 빼고 살림은 준수하게 해요. 요리는, 정말 어려워요. 음식 잘하는 사람을 보면 대단하다고 느껴요.
못할 건 또 뭐예요. 혼자만의 시간은 잘 보내기도 하나요? 잘 보낸 지 얼마 안 됐어요. 노력을 하고 있죠. 전에는 혼자 있으면 뭐든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쫓겼어요. 요새는 잠을 자거나 대본을 보는 등 스스로를 편하게 내버려두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살면 행복할 것 같아요? 재밌게? 멋지게? 고민할 것도 없이 재밌게 살고 싶어요. 멋지게 산다고 재미가 있을까요? 재밌게 살고 있냐고 물으면 ‘예스’라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물음표 두 개 정도랄까.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과정에 있는 셈이죠. 그러고 보니 오늘 인터뷰에도 ‘재미’란 단어를 꽤 썼네요.
맘껏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고 싶은 건 뭔가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요. 2년 가까이 시간이 없어 어딜 못 갔어요. 하루라도 아무 생각 없이 여행을 하고 싶어요.
가서는 또 걸을 건가요? 우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녀야죠. 그리고 먹은 만큼 걸을래요.
- 에디터
- 김영재
- 포토그래퍼
- 김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