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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라는 건 정말로 필요할까?

2019.11.07GQ

당신에게는 친구가 몇이나 있나? 충분한가? 혹은 적은가? 그만큼 자기 자신과 잘 지내고 있는가? 스스로와 친구가 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때로는 침묵이고, 때로는 고립이다.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와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이라는 오디오 클립을 진행하면서, 이수정 교수가 나의 말에 크게 공감한 적이 세 번 있다. 첫 번째는 대출을 집 도움 안 받고 갚았다고 했을 때, 두 번째는 인생은 원래 불행이 디폴트라고 했을 때, 마지막은 “살면서 친구는 두 명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였다. 영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때였는데, 학창 시절 친구가 많아야 하고, 친구와 잘 지내야 하고, 친구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그 시절을 힘들게 만들었던가 하는 이야기 끝에 나온 말이었다. 친구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존재라고들 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친구 역시 삶의 많은 조건들과 마찬가지로 균형을 맞춰야 할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이 종종 망각된다는 데 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우정은 이전 어느 때보다 높은 중요도로 논해진다. 같이 나이 들어갈 친구, 가까운 곳에 살면서 서로 안부를 물어줄 친구, 가능하다면 언젠가 같이 살 수도, 협업할 수도 있는 동반자 같고 동업자 같은 친구에 대한 동경 역시 과거 어느 때보다 뜨거워 보인다. 나 역시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결혼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다. 그렇게 어울리는 사람이 여럿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함께 어울리는 이들 모두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멈추었다. 그들의 연령대가 나의 나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아래로 열 살이 되고, 위로 열다섯 살이 되면서, 그리고 그들과 만나는 횟수가 대체로 1년에 3~4회를 넘지 못하면서부터, 늘 ‘또래’ 사람들과 하루 종일 어울리며 매일 같이 만나던 시기가 점점 차근히 멀어지면서부터다.

당신에게는 친구가 몇이나 있나? 충분한가, 적다고 느끼나? 당신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가, 혹은 친구는 당신에게 돈을 빌려주려고 할까? 당신이 세상 모두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 당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을 친구가 있나? 당신이 그런 신뢰를 주는 친구는 몇이나 있나? 어렸을 때 가까워진 사람들만이 ‘진짜’ 우정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나?

살다 보면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이 친구가 아니었나 싶을 때가 발생한다. 나 역시 그와 유사한 실망을 누군가에게 안기며 살고 있으리라.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라는 유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되풀이되어 왔는데, 살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배우게 된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그 내막을 궁금해한다. 세상의 많은 불행은 구경꾼을 몰고 다닌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당신의 어려운 사정을 시시콜콜 떠든다.

문제는 좋은 일이 생길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더 쉽게 축하한다. 당신에게 생긴 좋은 일에 정작 친구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게 된다. 먼저 취직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시작한 사업이 성공하는, 경사라고 부를 만한 일이 생기면 말이다. 인정받길 원했던 사람들로부터 기대하던 인정과 격려를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쉽게 실망한다. 이상적으로 보였던 우정은 큰 일이 없을 때만 가능한가 싶은 한탄마저 생겨난다. 친구에게 생긴 좋은 일에 나 자신이 속 좁게 대응하는 실감을 할 때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진다. 가까웠던 사람만이 멀어질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을 컨트롤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반응만을 다스릴 수 있을 뿐이다. 법적 배우자 혹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경제공동체와 달리 친구는 돌아설 것도 없이 애초에 남인 관계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고 그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친구를 배신하거나 배반당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친구 역시 세상의 다른 인간관계와 같은 속성을 지닌, 여러 사회적 관계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식의 어른들의 말을 불신해왔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전까지 친구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무엇이었던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와 친구가 된 이유는 오로지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것이었다.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그냥 옆자리에 앉은 일이 인연이 되기도 했다. 나는 어서 ‘동네 친구’로부터 벗어날 날을 끝없이 상상했다. 그런 내게도 이상적인 친구의 상을 제시한 글이 있었는데, 시인 유안진의 에세이 <지란지교를 꿈꾸며>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시작하는 이 글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고 한탄하며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이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보니 글로 읽기는 아름다우나 생업이 바쁜 가운데 이러한 그린 듯한 친우 관계는 점점 불가능해졌다. 진학과 취업을 이유로 다른 도시나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일 역시 이유가 된다. 그리고 어느 날, 그때 그 친구와 연락한 지 너무 오래되었음을, 신세를 지기는커녕 그런 말을 꺼내보기도 어려운 그냥 ‘한때 알던 사람’ 정도의 관계가 되었음을 깨닫고 슬퍼하게 된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과도 이상적인 일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친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던 거죠. 친구를 덜 만났으면 내 인생이 더 풍요로웠을 것 같아요. 쓸데없는 술자리에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어요.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여러 친구들의 성향과 각기 다른 성격, 이런 걸 맞춰주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책이나 읽을걸. 잠을 자거나 음악이나 들을걸. 그냥 거리를 걷던가.” 소설가 김영하가 에세이 <말하다>에 쓴 이 부분이 최근 인터넷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이 글은 한국인이 타인에 대해 갖는 관용이 부족한 듯하다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인데, 사실 이 글엔 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는 어릴 때 친구도 안 만나고 책만 읽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유명한 학자였는데, 일본 같은 사회에서 아이가 친구 없이 지내는 것이 이상하다는 지적에 “친구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책을 읽게 내버려두라. 인간에게는 어둠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다. 타인과 공감하고 유대감을 느낄 때 즐거움도 행복도 증가한다. 그 반대로 고립되고 소외되면 쉽게 우울해진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과 유대감을 느끼며 사교적으로 행동하는 편이 좋다는 믿음 때문에, 때때로 고립과 소외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된다. 모르는 것 없이 속속들이 아는 친구를 사귀는 일보다,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익혀야 할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는 데 중요한 것은 때로 침묵이고 때로 고립이다.

친구를 만들지 말라거나 친구는 없는 편이 좋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라는 단어 안에 너무 많은 기대와 소망을 담지 말라는 뜻일 뿐이다. 같이 식사를 하고 심지어는 여행을 같이 갈 수도 있는, 일을 같이할 가능성이 있는, 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 안부를 주고받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굳이 ‘친구’라는 말에 갇혀 있을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학창 시절과 같은 방식으로 가까워지기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일이든 사적 영역이든 함께 즐거울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경험상, 사람들이 ‘친구’라는 범주로 묶여 존재하려는 경향은 많은 경우 그들로부터의 비판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내포하고, 그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친구를 늘리는 대신 자신을 돌보고, 고전적인 의미의 친구가 아니어도 같이 일하고 연대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일은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에 당연한 진전이다. 나는 올해 여름휴가를 SNS로 알게 되어 처음 만나게 된 사람과 일주일간 함께 보냈다. 이번 휴가 중에는 그렇게 새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몇이나 생겼다. 지정학적 조건만을 따져서 만나기 힘들었던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세상이 된 셈이다. 세상의 작동방식이 바뀌면 우정을 쌓고 나누는 방식 역시 달라짐이 당연하다. 인간관계에는 기대를 줄이고 모험을 더해야 하며, 깊게 신뢰하는 관계는 많이 만드는 데 집중할 일이 아니라 폭이 좁더라도 공들여 깊고 높게 다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네트워킹은 단지 친구를 많이 사귀라는 뜻이 아니다. 글 / 이다혜(작가, <씨네21> 기자)

    에디터
    이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