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좋은 공간 vs 나쁜 공간

2020.02.23GQ

지나치게 비슷하고 알고 보면 무의미한 공간 범람의 시대. 좋은 공간의 본질과 조건에 대해 물었다.

BOOK
동네에 없는 동네 서점
지난 수년간, 일본의 T 서점이 촉발한 ‘부티크 서점’의 범람 현상은 카페 전쟁과 다를 바 없었다. 최근 흔히 보이던 서점 창업이 준 것을 보면, 그 흐름도 주춤해진 듯하다. 창업만 준 게 아니라 있던 서점도 많이 사라진 것도 같고.

일본의 T 서점은 서점도 ‘힙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대형 서점이나 작은 서점이나 모두 조명과 가구를 신경 쓰며 ‘라이프스타일을 판다’고 어필한다. 사실 한국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생활 양식이나 태도가 아닌, 일종의 ‘스타일’로 인식된다. ‘카페 같은’ 느낌이 그것이다. 따뜻한 조명, 모던한 가구, 부드러운 음악 그리고 커피.

서점은 크게 다양한 서적을 취급하는 대형 서점과 특색을 내세워 특화한 소형 서점으로 나뉜다. 오래전 내가 살던 동네에도 작은 서점이 있었다. 그곳에는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문제집류의 서적이 절반을 이루었다. 동네에는 많은 청소년이 거주했고, 서점은 늘 학생들로 붐볐다. 나 역시 학창 시절 내내 유용하게 활용했다. 서점 주인은 학생이 주변에 많이 산다는 점에서 그런 구성을 했을 것이다.

국내 부티크 서점의 문제를 여기서 찾는다. 스타일을 좇는 까닭에 힙한 장소를 찾아 느낌 있는 분위기를 내려다 보니 대부분의 작은 서점은 서로서로 닮아가고 있다. 이 서점에서 본 책과 잡지가 저 서점에도 그대로다. 집기류와 부가 상품군마저 흡사하다. 특히 ‘동네 서점’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의 작은 서점은 역설적으로 ‘진짜 동네’에 생기지 않는다. 대형 서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은 서점은 이제 한남동, 강남의 힙한 거리와 대규모 신규 공간에서만 볼 수 있다. 사람을 모으는 용도로, 공간을 채우는 대상으로 서점의 목적이 바뀐 것이다. 그 목적에 따라 서점은 분위기를 더욱 중시하는 쪽으로 변해간다. 어떤 서점은 차별화를 위해 인문학적인 메시지로 카테고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럴듯한 ‘기획’만 존재하는 허세일 뿐이다. 그런 곳에는 영락없이 온라인 쇼핑몰이나 인스타그램을 위해 사진을 찍는 이들이 가득하다.

서점 비즈니스의 변화를 단순히 온라인 서점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T 서점이 주목받은 것도 온라인 서점이 나온 이후의 이야기다. T 서점은 인간이 동경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이미지가 영화, 잡지, 음악에서 왔다고 봤다. 이를 재편집해 공간을 채웠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서점을 빛냈다.

과거의 동네 서점은 왜 모두 사라졌는지 생각해 본다. 온라인의 등장도, 책 읽는 사람이 준 것도 이유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네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부티크 서점 역시 그 전철을 밟아가고 있어 보인다 .

이달의 판매 순위를 정하거나 베스트셀러를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많다. 그런데 현재 출판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는 게 과연 몇 권을 뜻하는지, 1위와 10위는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도 의문이다. 구성과 인테리어 등을 포함한 서점 기획의 본질은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것이지, 오래 머무르게 하는 게 아니다. 작은 서점은 어쩔 수 없이 공간 제약을 받는다. 그런 만큼 다른 곳에는 없는 좋은 책을 선정해 들여놓는 게 첫 번째다. 아울러 너무 세세한 카테고리 구분은 선택을 혼란시킬 뿐이다. 작은 서점은 카페가 아닌 독서실의, 인스타그램이 아닌 유튜브의 속성을 지향해야 한다. ‘책으로의 집중’이야말로 시대가 변해도 서점이 가져야 할 필수 조건이다. 그런 면에서 도산공원 퀸즈마켓에 입점한 (지금은 사라진)P 서점은 비교적 좋은 태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내부의 낮은 조도와 단순화된 동선은 시선을 자연스레 책으로 돌리게 만든다.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지 읽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작은 서점은 폼 나는 ‘콘셉트 놀이’를 멈추고, ‘동네’에 집중해야 한다. 베스트셀러 마케팅처럼 무시해도 좋을 작은 차이를 찾으려 애쓰기보다 서점을 찾는 진성 타깃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새로운 책을 꾸준히 들여놓는 동시에 이를 SNS로 적극 홍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점이 사라지는 요즘, 굳이 서점을 시작한다면 서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글/ 최태혁(콘텐츠 디렉터)

ART
그림자가 있는 공간

공간은 사람보다 오래간다. 그러나 어떤 공간은 금방 사라진다. 왕이 집무를 보던 궁 정도 되어야 남는데 그마저 불타기도 한다. 전시가 아무리 날고 뛴다고 해도 작품과 관객은 문 안에 들어와 있다. 사각형 안에 들어와 있다. 사각형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동선이다. 걸어 다니면서 본다. 발에 모터를 단 것처럼 재빨리 전시를 볼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며 전시를 보는 이도 있다.

박찬경 작가의 <모임> 전시장에서 나는 오래 앉아 있고 싶었다. 참석하지 못했던 괴석에 대한 강연(조인수 교수), ‘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제목의 강연(정서영 작가)을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작품이 놓인 전시장에서 강연이 진행되도록 계획한 공간 배치라고 했다. 강연 때 공간을 이끌었던 강연자의 목소리가 파일에 담겨 놓여 있었다. 거기 앉아서 나는 같이 전시장에 온 옆 사람 얼굴도 보았다. 전시장에서는 주로 타인의 뒤통수를 보거나 프로젝터에 비친 영상을 가리는 몸통을 보곤 했는데, 작가가 놓아둔 자리(평상)에 앉으니 작품을 보는 눈높이도 달라졌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박찬경 개인전 <모임>은 작품들이 주거니 받거니 말 그대로 ‘모여’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특정한 전시 공간’이라 말할 수는 없다.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다. 사각형 방으로 구성된 모습도 그렇고 전시의 개별 성격도 그렇다. 공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소수의 작가들만이 선택된다. 선택은 배제를 필요로 한다. 국가 예산으로 공간 운용이 결정된다. 여기서 개인의 선택이란 벼랑 끝에 몰려 생겨났거나 뭔가 굉장한 전복으로 피어난 것이 아니다. 무색무취 공간이다. 동시에 ‘한 국가의 문화’라는 덧칠이 여러 번 덧대어진 곳이다.

박찬경의 개인전 <모임>의 공간은 사각형 프레임을 두루마리 그림처럼 넓게 또 중층적으로 나누어서 보여준다. 전시된 작품들이 공간에 짠, 하고 올라와 있는 게 아니라 공간을 ‘휘두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실제로 병풍 형태 작업이 있기도 하고, 이미지(사진)들이 사각형 벽을 채우는 방식이 그 견고한 사각의 틀을 깨어 나간다. 그러면서 새 이야기(미술사)를 만든다.

공간의 흥미로운 점은 관객이 앉거나 서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 더, 작품 하나를 보며 다른 하나를 동시에 보게 된다는 점이다. 전시장에 앉아 있는 것은 앞서 말했듯 갈색 평상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무릎보다 낮게 놓인 평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옥을 비롯한 전통 건축물의 시선이었다. 처마를 올려다볼 수 있는 낮은 구조, 천장 없이 뚫린 마당 위로 하늘이 보이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등 날씨에 일대일로 반응하는 자연관이 있는 공간이었다. 둘째 여러 작품을 동시에 보게 된다고 쓴 것은 차경을 보게끔 뚫린 사각 프레임 때문이다. 중첩해서 보게 될 때 작품들이 서로 마주 보게 된다. <모임>은 여러 개의 눈이 천천히 움직이는 배치였다. 전시장에는 여러 동물의 눈이 작가의 카메라에 찍혀 전시장으로 불려나왔다.(작품 ‘모임’) 가서 직접 보면 이 문장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독자여, 또 관람자여, ‘작은 미술관’이라는 작품을 보면 그 통로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짧은 시간을 보내게도 된다. 비디오 작업 ‘늦게 온 보살’이 나오는 영상 방은 캡슐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 있는 시간 동안 무중력 상태에 있는 듯하다. 몸은 앉아서 정면을 보고 있지만 정신은 하염없이 걷는 것 같다.

‘모여 있기’의 장소로 어디가 기억나는가? ‘장소는 사람의 행동 방식을 결정한다’고 말해보자. 걸으면서 볼 때 재밌는 점은 뭘까. 핵심은 위치다. 보는 사람의 위치가 변화하기 때문에 매 순간 좌표값이 새로이 형성된다. ‘마음껏’보다 ‘재량껏’ 정도로, 그 한계를 그어놓는 편이 적당하겠다. 전시를 움직이면서 본다는 게 왜 그렇게 나를 사로잡았을까. 좋은 전시 공간은 정신(영혼)과 더불어 육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게 내 경험이다. 이 움직이는 방식이 작품에 의해 해당 전시장 안에서만 다르게 적용된다는 점이 웃긴다. 전시장 밖으로 나가면 다시 또 공동체가 공유하고자 하는 질서에 의해 물리적 세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 현시원(큐레이터)

CAFÉ
에셔 죽이기

현재 한국 카페의 구성 법칙은 그림 두 장에 압축돼 있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와 ‘폭포’다. 사제들이 줄지어 계단을 끝없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건물 위에서 떨어진 물이 수로를 타고 올라가 다시 떨어지는, 순환과 반복의 환영이 담긴 작품에는 외국에서 밀려든 각종 트렌드가 자기 복제와 상호 합성을 통해 좀비화되는 카페 공간의 본질이 담겨 있다. 스칸디나비안, 인더스트리얼, 미드센추리 모던 등 카페를 장악한 각종 스타일은 시간이 지나면 응당 사라질 거라 생각했지만, 매뉴얼화를 통해 일종의 공동 자산으로 영속성을 획득했다. 도나캐나 쓰이고, 맥락을 거세하고 합쳐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만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근본 없는 변종을 만들어 낸다. 재료 면에서 골드, 로즈 골드, 코퍼 등 금속 소재와 대리석의 조합은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이미지를 뽑아내는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 거대한 식물을 심은 화분은 카페 정중앙을 차지하고, 각종 식물들은 벽과 기둥, 천장에 달라붙으며 플랜테리어를 외친다. 유행 타는 것마다 고착화되고 DB화되어 무차별적으로 온갖 공간에 매핑되는 상황은 절망적이다. 끝없이 호출되며 출구 없는 윤회를 지속하는 에셔의 그림처럼.

이런 현상의 본질은 ‘미믹 Mimic’이다. 남을 흉내 내며 주변에 동화돼 부족한 자신을 감추는 것. 카페에서 에셔를 죽이려면 오리지널리티의 자생이 필요한 이유다. 창작자의 자기 확신에서 비롯되는 오리지널리티는 다양성의 세계에서 개성을 키우는 게 핵심이다. 이런 공간 두 곳을 콕 집어본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의 ‘오설록 1979’. 아모레퍼시픽이 한라산 황무지를 녹차밭으로 개간한 1979년을 모티프로 삼은 이곳의 가구와 공간을 총괄한 이광호 디자이너는 ‘재료’에 주목했다. 자연물의 특성을 활용해 차를 즐기는 상상을 하며 돌, 나무, 금속, 패브릭 등 재료의 물성을 정직하게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검은 화강암 ‘인도 블랙’을 덩이째 가져와 카운터, 바, 테이블에 아낌없이 사용했다. 인도 블랙은 자연 상태에서는 회갈색의 조합이지만 가공하기에 따라 진한 검정부터 짙은 회색까지 그윽하게 변한다. 통돌로 만든 카운터는 곡면 처리한 매트한 회색 부분과 회색과 갈색이 거칠게 넘실대는 원석 부분이 공존한다. 물기에 닿으면 금세 톤이 진해졌다가 제 색으로 돌아오는 테이블을 생각해보면, 돌의 생명력에 둘러싸여 자연의 선물인 차를 음미하는 셈이다. 매트한 회색 돌과 조화를 이루며 문지를 때마다 색상이 변하는 녹색 새틴 패브릭, 딱 12개만 만든 기묘한 비례의 바 스툴, 스티로폼 블록을 열선으로 얇게 깎으며 현장에서 바로 골라 붙여 제주의 바람을 표현한 전등까지, 오설록 1979은 이광호의 개성 있는 미의식으로 가득하다. 카운터, 테이블, 소파, 바, 바 스툴 등의 다양한 비례와 곡면 비율, 두께가 디자이너의 취향에 근거하는 이곳에서 트렌드를 논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랴.

압구정에 있는 카페 겸 내추럴 와인 바, ‘에세테라 Et Cetera’. 가구를 맡았다가 공간까지 책임진 서정화 디자이너는 금속, 석재, 목재 등 여러 재료의 궁합과 효과를 미니어처로 실험하다 투명한 아크릴과 거친 흰색 석재의 조합에서 영감과 확신을 느끼고 대범하게 디자인을 진행했다. 사거리 코너에 있는 매장 파사드는 유리로 처리하고 진입부와 입구, 외벽, 카운터에는 거칠게 해체한 콘크리트를 활용했다. 거대한 대리석처럼 자유로운 음영을 지닌 바닥과 현무암 소재의 사각기둥 분재 거치대, 주물 직후의 알루미늄 조각을 용접해 만든 시그니처 작업인 테이블과 의자, 벤치를 보라. 황동 소재의 전등, 의자 시트에 쓰인 원목과 화강암은 유리창과 함께 매끈하고 섬세한 물성을 풍기며 나머지와 대조를 이룬다. 서정화는 상호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끌어안았다. 유리창을 기요틴 삼아 벤치와 자연석을 반으로 나눠 내외부의 시각적 연결을 극대화한 것. 모호해진 경계에서 콘크리트 테라스가 내부로 전이되자 조명 아래 안과 밖이 엮이며 감도 높은 섬세함과 독창성이 빛난다. 혹 ‘에셔 죽이기’에 관심 있는 이라면 발걸음을 해보시길. 글/ 전종현(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MUSIC
공연장이 당신의 고막을 울릴 때

얼마 전, 아일랜드가 낳은 세계적인 록 밴드 U2의 첫 내한공연이 열렸다. 마돈나, 롤링 스톤스와 함께 한국의 음악 팬을 수십 년간 기다리게 만든 야속한 존재. 한 달 전부터 공연의 첫 곡이라는 ‘Sunday Bloody Sunday’를 새삼 다시 반복해 들으며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공연장이 하필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이라는 사실. 그 돔에서 메탈리카, 브리트니 스피어스, 아리아나 그란데, 케이티 페리, 샘 스미스 등 굵직한 팝스타들의 공연을 본 터다. 그 거대한 돔은 단 한 번도 흡족한 소리를 들려주지 못했다. 덩어리진 소리 뭉치들….

고척스카이돔은 대체로 보컬과 기타를 제외하면 악기의 무덤이다. 달리 말하면 보컬과 기타는 빨랫줄 타구처럼 쭉쭉 뻗는다. U2의 공연에서도 기타리스트 ‘디 에지’는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듯 불을 뿜었다. 기타 사운드는 수정을 벼려 만든 비수처럼 명료하고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 들어왔다. 그러나 다수의 곡에서 세 연주자가 만드는 특유의 미니멀하면서도 탄탄한 피라미드 사운드는 대체로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여러 대의 딜레이 타워(Delay Tower·음향의 시차를 없애기 위한 스피커 탑)를 설치하고, U2와 41년간 일한 오디오 디렉터가 동행했음에도 정복하지 못한 돔….

‘고척 참사’는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까.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을 생각하면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2007년 엔니오 모리코네 내한공연은 장소 선정만으로 시작 전부터 뭇매를 맞았다. 체조경기장은 당시만 해도 일각에서 ‘목욕탕’으로 불릴 지경이었다. 형편없는 콘서트 사운드의 울림 탓. 록 사운드도 그럴진대 관현악 공연을 그곳에서 연다는 사실에 특히나 클래식과 영화음악 팬들이 분노했다. 그러나 2013년 아이슬란드 록 밴드 ‘시구르 로스’의 콘서트는 두 귀를 의심케 했다. 그 무렵부터 체조경기장에서는 좋은 사운드의 공연이 여럿 나왔다. 밴드 전속 엔지니어의 역량과 장비 성능, 충분한 사운드 체크 등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어떤 공연장은 구조상 구제불능’이라는 선입견이 깨진 데 주목할 만하다.

중소형 공연장의 소리들은 어떨까. 마포구의 ‘무브홀’, 광진구의 ‘예스24라이브홀’이 늘 20퍼센트 부족한 사운드를 들려준다면, 마포구 ‘CJ아지트 광흥창’은 놀랍도록 선전하는 편이다. 김창완밴드의 앨범 <분홍굴착기>부터 영화 <군함도>까지 다양한 녹음도 이뤄진 이곳 홀은 베테랑 음악감독 박병준 씨의 지휘까지 만나 근사한 소리를 뿜는다. 반사판과 목재 등 전문 공연장으로서 구조적 설계에 심혈을 기울인 클래식·대중음악 겸용 홀들은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이다. LG아트센터,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등 말이다. 여기서 재앙 수준의 사운드를 경험한 기억은 없다. 2011년 박정현이 LG아트센터에서 부른 ‘하비샴의 왈츠’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뇌에 각인돼 있다. 지난해 12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김동률 콘서트 역시 관현악과 밴드 사운드 양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래도 아직 ‘롯데콘서트홀’에 필적할 곳은 없어 보인다. 대중음악 공연 유치가 드문 게 아쉬울 뿐이다. 2018년 칙 코리아 솔로 콘서트, 지난해 3월 양방언과 국립국악관현악단 공연은 잘 설계된 홀의 장점이 전통적인 서양 관현악에만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코엑스 건너편 현대산업개발 빌딩 1층에 자리한 강남구 ‘포니정홀’은 잠재력을 지닌 숨은 명소다. 아벨 콰르텟, 안숙선 명창 등 실내악과 국악 공연이 주로 열린 이곳은 규모는 작지만 소규모 편성의 어쿠스틱 공연에 강하다. 평소에 음악 강연 아카데미도 여는데, 프랑스 포칼사(社)의 그랜드 유토피아 스피커를 비롯한 최고급 음향기기를 갖춰 고막에 윤기를 더하고픈 이들의 구미를 당긴다.

높아진 입맛만큼이나 맞추기 힘든 게 ‘귓맛’이다. 그래서들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대의 오디오를 집에 설치하기도 한다. ‘내 앞에서 진짜 그 밴드가 연주하는 것 같다!’는 ‘내 앞에서 진짜 그 밴드가 연주한다!’를 이길 수 없다. 가히 성스러운 체험을 온전히 하기 위해 가끔 공연장에서 눈을 감아보기를 권한다. 바로 뒤 관객의 시야각을 침범하며 치켜든 스마트폰 카메라는 잠시 내려두고. 글/ 임희윤(<동아일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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