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요리 시간이 필요한 지금 이 순간. 그들 각자의 힐링 레시피가 도착했다.
한우 플라시보
경북 북부 내륙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한우란 봉화 송이의 계절에 ‘맛있는참(대구 지역 소주)’ 병에 든 참기름으로 구워 먹는 연중 의식의 부재료 쯤이었다. 집안에 힘든 일이 있던 십수 년 전 어느 여름, 어린 시절 자주 가던 갈비 골목의 오래된 단골집에서 온 가족이 한우 수십 인분을 해치우고 살얼음 동동 낀 식혜 한 대접을 들이켠 후 이틀 낮밤을 잤다. 깨어나자 아무 일 없었던 듯 말복이 지나버린 신비로운 경험 이후로 고기의 힘을 믿게 되었다. 한참 후 등심과 안심은 배를 채울 고깃덩어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셰프를 남자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그가 식당 벽난로에 참숯을 피워 쫄깃쫄깃한 치마살을 프로방스산 올리브 오일로 재운 샬롯과 함께 한 점 한 점 구웠던 날이 떠오른다. 바닥에 앉아 샤토네프 뒤 파프 블랑을 마시며 평생 식구(食口)가 될 것을 예감했다. 몇 년 후 육회로 먹을 법한 질 좋은 한우를 고춧가루에 빠르게 볶아 무를 넣고 뭉근하게 끓여낸 경상도식 소고기뭇국은 그의 ‘최애’ 보양식이 되었다. 한우 플라시보가 필요한 날은 기신기신 팬 프라이로 고기를 굽는다. 먼저 약한 불에 고기를 올려 속을 은근히 익히는 동안, 마늘과 샬롯과 버섯을 순서대로 넣고 나머지 고기를 올린 후 불을 세게 높인다. 미리 속을 익힌 것은 부드러운 식감의 웰던이 되고 나중에 올린 것은 불 맛이 입혀진 레어로 즐길 수 있다. 이쯤 되면 ‘어떤 화이트를 마실까?’ 하는 암묵적 눈빛이 오간다. 오늘은 선지 요리가 유명한 루아르 지방의 시농 블랑이다! 소테법을 사랑하는 게으른 나는 근사한 기름이 남은 프라이팬이 몹시 아깝다. 용수사 원행 스님에게 사사한 치암고택 장복수 여사의 된장을 한 숟가락 넣고 바글바글 끓이다 밥을 넣고 자작해지면 불을 끈다. 북어포가 감싸고 있던 콩들을 알알이 느껴본다. 된장죽이 반 정도 남았을 즈음 갓 짠 참기름 한 방울을 넣어보라. 또 다른 맛의 세계가 열린다. 완전한 수미쌍관을 이루며. 이상민(미식 칼럼니스트)
궁극의 미더덕 비빔밥
마산에 살던 어린 시절 미더덕을 넣은 된장찌개가 밥상에 자주 올랐다. 함께 살던 할아버지가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미더덕을 입 안에 넣은 다음 자루를 터뜨려 내장과 액을 빼먹은 후 돌기 부분과 그에 붙어 있는 자루를 밥상 한편에 둑처럼 쌓아 두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하다 입천장을 자주 데었다. 맛과 식감은 독특했다. 바다의 비릿한 짠맛과 육지의(된장) 구수한 짠맛이 미더덕 향과 어우러져 입 안을 가득 메웠고, 돌기 부분을 씹을 때는 단단한 것을 쉽게 부수는 듯한 쾌감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산을 떠난 이후에는 된장찌개에 든 미더덕을 자주 보지 못했다. 나는 어린 시절 밥상에 미더덕 된장찌개가 자주 오른 또 다른 이유를 서른 후반에 알게 되었다. 아내의 추천으로 찾아간 진동면의(구 마산, 현 창원) 한 횟집에서 아내, 나, 아버지는 미더덕 비빔밥을 주문했다. 아내와 나는 생전 처음 먹는 것이었고,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마산, 진동이 국내 미더덕 생산량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고. 그래서 미더덕을 밥에 비벼도 먹고 회로도 먹는다고.(아버지의 과장이었고 실은 생산량의 절반쯤이라고 한다.) 그때 이후로 봄이 되면(미더덕은 4~5월에 집중 출하된다) 미더덕 비빔밥이 가끔 생각나서 집에서 해 먹는다. 요리 방법은 간단하지만, 손이 좀 간다. 찬물에 미더덕을 씻는다. 돌기 부분을 가위로 자른다. 돌기는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둔다.(된장찌개 끓일 때 쓴다.) 액이 빠져나가면 속을 뒤집어 한 번 더 흐르는 물에 씻는다. 흰쌀밥 위에 손질한 미더덕과 날치알을 쌓는다. 조미하지 않은 김 가루를 얹는다.(참깨를 덧붙여도 된다.) 참기름을 조금 흘린다. 비빈다. 반쯤 먹다 보면 물리기 시작한다. 그럼 초장과 상추를 넣어 다시 비빈다. 된장찌개 국물로 비벼도 된다. 김기창(소설가)
파릇파릇 냉이 파스타
‘치유’라는 키워드에 ‘봄’이 떠오르고 ‘봄나물’로 이어지는 흐름이 너무 식상한가도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우중충하고 하 수상한 시절에 파릇파릇한 봄나물만큼 내게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음식이 또 없기 때문이다. 봄나물 중에서도 냉이는 이른 봄에 가장 먼저 얼굴을 내밀어 새로운 계절이 왔음을 알린다. 시장에서 냉이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지고, 욕심껏 한 무더기 사게 된다. 이제 며칠은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냉이 향기가 집 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시작은 가장 기본이 되는 냉이 된장국. 쌀뜨물 또는 멸치 육수에 된장을 풀고 두부와 냉이만 넣어 단출하게 끓인다. 식사로도 좋지만 숙취가 있거나 속이 불편할 때 밥 없이 냉이 된장국만 훌훌 떠먹으면 속이 편안하게 다스려진다. 실제로 냉이는 비타민이 풍부해서 원기를 돋우고 피로 회복에도 아주 좋은 식재료로 알려져 있다. 일단 된장국 한 그릇 든든히 먹고 나서 밑반찬 또는 안주로 먹을 냉이무침도 마련해둔다. 살짝 데친 냉이에 된장, 고춧가루, 참기름, 다진 마늘을 넣고 조물조물 무치면 된다. 식초나 매실액을 넣으면 풍미가 좋아진다. 냉이를 손질할 때 침을 꼴깍꼴깍 삼켜가며 가장 고대하는 요리는 냉이 파스타다. 냉이 고유의 향을 살리기 위해 마늘조차 쓰지 않는 섬세한 레시피도 있지만 나는 되레 센 맛으로 간다. 올리브 오일에 편마늘, 청양고추, 그리고 안초비를 볶아 향을 낸 후 알단테로 삶은 파스타 면과 냉이를 넣어 볶는다. 냉이는 숨이 죽을 정도로만 짧게 익힌다. 이렇게 맵고 짭짤하게 간을 해도 냉이란 녀석은 결코 기죽지 않는다. 여전히 향긋하고, 된장국이나 무침보다 훨씬 꼬들꼬들하게 씹히는 게 아주 일품이다. 입 안 가득 냉이를 넣고 우물우물 씹고 있으면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에 건강한 기운이 깃드는 게 느껴진다. 두말할 것 없이 봄의 기운이다. 봄은 짧지만 매년 꼬박꼬박 돌아온다는 사실이 문득 고맙다. 올봄도 놓치지 않고 냉이를 잘 챙겨 먹었으니 또 힘을 내봐야겠다. 미깡(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작가)
무념무상의 토마토 살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면 우리의 몸은 먹고 마시는 일보다 잠자는 일에 순서를 내어준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먹고 싶다는 욕구와 뭔가 해보겠다는 의지가 결합돼야 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내 경우 토마토를 천천히 잘게 써는 일은 조금 달랐다. 요리를 즐기지 않지만, 동이 나면 습관처럼 채워 넣는 식재료가 토마토였다. 보통은 바나나를 걸어둘 법한 주방 어딘가의 갈고리에 나는 골프공 크기의 미디 토마토를 줄기째 주렁주렁 달아놓곤 했다. 붉고 탐스러운 토마토가 17세기 유럽 정물화처럼 주방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풍성해졌다. 잘 익은 토마토는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에 살짝 절여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뭉근하게 끓인 뒤 으깨서 포모도로 소스를 만들어도 근사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이 열매를 가지고 열에 일곱 번은 살사 크루다 Salsa Cruda를 만들었다. 요리를 완성하면 한 입 맛보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살사’는 스페인어로 ‘소스’라는 뜻이다. ‘살사 크루다’라고 하면 ‘Raw Salsa’, 즉 갓 만들어 신선한 소스인데 주로 토마토를 사용하니 생 토마토소스인 셈이다. 아삭하고 싱싱한 식감과 황홀한 천연 색감만큼이나 날 사로잡은 건 중독적이리만큼 단순하면서도 모종의 성취감을 주는 무념무상의 요리 과정이다. 채소를 잘게 써는 것 이외의 조리 스킬은 필요하지 않고, 재료도 딱 다섯 가지면 된다. 토마토, 적양파, 할라페뇨 고추, 고수, 그리고 라임. 차마 ‘레시피’라고 부르기 민망한 나의 살사 만드는 방법 첫 번째 단계는, 잘 익은 토마토를 고르는 일이다. 로마 토마토라고 불리는 세로로 길쭉하게 생긴 이탈리아 매실 토마토가 가장 적합하다지만, 국내에서 본 적은 없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채소 가게에 가서 그날 제일 예쁜 빨간색 토마토를 골라오면 된다. 생할라페뇨 고추는 피망이나 파프리카로, 적양파는 흰 양파로, 고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바질이나 파슬리로 대체할 수 있다. 이렇게 재료가 준비되었으면 둘째, 토마토의 하얀 심 부분과 물기 많은 씨를 모두 제거한 뒤 잘 드는 칼을 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잘게 조각내면 된다. 양파와 할라페뇨 고추도 같은 크기로 썰어 라임즙에 5분 정도 재워 매운맛을 조금 뺀다. 고수도 잎과 줄기를 깨끗이 씻어 잘게 썬다. 셋째, 큰 볼에 토마토를 넣고, 라임 주스를 머금은 할라페뇨 고추와 양파를 더한 뒤 고수까지 넣고 라임즙을 한 바퀴 더 뿌려준다. 넷째, 소금과 후추도 한 꼬집씩 넣어 뒤적거린 뒤 과즙이 어우러지도록 15분 정도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다가, 차게 먹으면 된다. 클리셰지만 재료 본연의 맛이 전부라, 사실 이건 누가 만들어도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더더욱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를 두게 된다. 말 잘 듣는 칼을 들고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같은 모양으로 조각내는 그 시간은 결코 만능 다지기에 내어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나는 살사를 만들기에 앞서 늘 언젠가 이케아에서 사둔 칼갈이를 꺼내 칼을 곱게 갈곤 했다. 꾸준하고 안정적인 만족감을 보장하는 나만의 식재료 다루는 방식을 ‘레시피’라 부를 수 있다면, 나의 살사 레시피 첫 번째 순서는 ‘칼 갈기’라고 정정하는 게 맞겠다. 김은아(프리랜스 에디터)
그 무엇의 대신도 아닌 두부
혼자서도 너무 혼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날, 그런 허기가 지는 날, 나는 ‘두부 간장 밥’을 해 먹는다. 나와 허기를 화해시키는 나름의 의식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간단한 음식에 들이는 최대한의 시간에는 뭔가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나는 ‘두부 간장 밥’을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만든다. 엄청나게 배가 고프지만, 먼저 내가 가장 아끼는 그릇을 꺼내(개수대에 있다면, 울면서 설거지를 먼저 한다) 밥을 담아 준비한다. 기름을 조금 두른 프라이팬에 키친타월로 물기를 조금 걷어낸 두부 반 모를 으깨면서 굽는다. 다음은 나무 주걱으로 두부를 프라이팬 바닥에 꾹꾹 눌러 뭉개며 약한 불 앞에 선다. 전자레인지를 사용해도 되지만, 구태여 프라이팬을 사용하는 까닭은 이 끼니의 포인트가 시간을 들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맥주가 있다면 맥주를 천천히 마신다. 와인이 있다면 와인을 천천히 마신다. 두어 모금 마시는 동안 두부가 익으면서 나는 좋은 냄새가 허기를 잠재운다. 그것을 아주 조심스럽게 퍼서 밥 위에 고슬고슬하게 담는다. 뜨거울 때 간장을 한 바퀴, 참기름을 한 바퀴 두르고 참깨를 솔솔 뿌린 다음 수저로 잘 뒤섞어 비빈다. 마시다 만 술을 마저 두부 간장 밥에 곁들인다. 두부는 참 신기하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술과도 잘 어울린다. 철 따라 먹을 수 있는 과일, 채소 그 어떤 것과도 산뜻하게 조화를 이룬다. 복숭아 두부 샐러드, 당근 두부 부침, 셀러리 두부 마리네이드, 내가 만들어 놓고 감탄하는 우리 집 한정 메뉴에도 어울리고, 된장찌개, 카레, 심지어 전날 먹고 남아 버리기는 좀 아쉬운 콩나물국에도 어울린다. 라면에 넣어도 좋고, 유자청만 듬뿍 뿌려 먹기도 한다.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은 두부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소금만 조금 뿌려 위스키와 먹기도 한다. 그럴 때 두부는 뜨겁고 부드럽고 세상에서 가장 하얗게 빛난다. 고소하고 든든하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접시다. “마음이 급한 대로 너는 나의 심장에 손을 대고. 두부 가게를 차리겠다고 한다.”(‘영구 인플레이션으로의 부드러운 함몰’中, 신해욱)로 시작되는 어떤 시를 떠올리기도 한다. 두부는 무엇과도 어울리지만 그것을 먹는 나와 제일 잘 어울린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하다. 먹을 때마다 단정해지고 먹을 때마다 나를 나로 있게 한다. 김복희(시인)
남해식 멸치국수
서울살이 20년째건만 서울 토박이들과 요리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주눅이 든다. 결이 고운 서울 음식에 비하면 내 고향 경상도의 음식은 거칠고 투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멸치국수 앞에서만은 ‘나는 남해의 딸이다’. 어깨가 펴진다. 이십 대 때부터 과음 계획이 있던 (거의 매일)날에 한 냄비 가득 멸치 육수를 우려놓고 나온 지 어언 이십 년이다. ‘비린내’를 피하기 위해 찬물에 멸치를 담가 냉장고에서 하룻밤을 우려낸다는 사람도 있지만, 남해의 멸치국수는 맹물에 담갔다 빼는 간지러운 스타일이 아니다. 문을 열면 뽀얀 흰 김이 가득 메웠던 장날의 국숫집만큼은 아니더라도 집 안에 구수한 냄새가 가득할 만큼 육수를 우려야 한다. 멸치국수의 시작은 물론 좋은 멸치를 찾는 것부터다. MSG를 뿌리지 않고 바닷물로 깔끔하게 말려 산화시킨 쩐내 없는 깨끗한 국물용 멸치를 사면 된다. 오랜 구매처가 없다면 통영이나 남해로 여행을 다니다 좋아 보이는 멸치를 깔아놓은 수산시장 가게의 명함을 가져오면, 요즘은 전화로 멸치를 보여주고 택배 배송도 해준다. 다음은 멸치 손질인데,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엉덩이를 깔고 앉아 손질하면 생각보다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이때 배를 갈라 똥을 빼내고 머리는 남겨둔다. 다른 많은 생선처럼 머리에서 꽤 진한 고소한 육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육수를 낼 때는 냉동실에서 꺼낸 멸치를 큰 주먹 하나만큼 마른 팬에 볶아 습기와 냄새를 날린다. 정수를 넉넉히 부은 뒤 두툼한 다시마와 마른 고추, 파뿌리, 양파 껍질, 버섯 기둥, 통후추, 황태 대가리를 넣고 청주를 한 바퀴 휘 돌린다. 파르르 끓기 직전에 약불로 줄이고 다시마를 건져낸 뒤 뭉근하게 한 시간 정도를 우린다. 진한 국물 스타일이라 담백한 채수를 더하면 맛이 한층 더 깊어지고, 부드러우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산다. 망에 넣어 깔끔하게 끓일 수도 있지만 은은한 대류 현상으로 우려내는 국물의 진한 맛은 이기지 못한다. 원하는 색과 맛이 우러나면 촘촘한 체에 걸러낸 뒤 국간장과 어간장을 섞어서 끓여둔 집간장으로 간을 한다. 구수한 육수에 쿰쿰한 간장 냄새가 퍼지면 그 전날 독하게 술을 먹어 꼼짝 못 하던 남편도 방에서 슬슬 기어 나온다. 그다음엔 삶아서 헹궈둔 소면을 그릇에 담고 정구지(부추), 채 썬 호박, 김을 넣고 양념장을 풀어 마지막으로 팔팔 끓인 육수를 부어주면 된다. 김은지(타이이펙트 이사)
포근한 현미밥
자취를 시작할 때, 엄마가 챙겨준 첫 주방 도구는 ‘공기’라 불리는 밥그릇과 국그릇, 그리고 전기밥통이었다. 전기밥통은 처음 몇 번만 쓰고, 금세 붙박이장처럼 박제된 가전제품이 됐다. 밥을 노랗게 만드는 작은 전기밥통 대신 ‘압력’ 전기밥솥을 들였다. 이 녀석은 기특하게도 곡물을 오래 불리지 않아도, 어떤 종류의 잡곡을 넣어도 물만 적당히 잘 맞추면 윤기가 흐르는 차진 밥을 한 시간 이내로 대령한다. 또한 밤, 고구마, 연근, 은행, 콩, 말린 나물, 버섯 같은 채소 그리고 소금 조금을 함께 넣고 밥을 지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완전한 한 그릇 음식이 된다. 밥은 어디를 배회하든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포근한 집처럼 매일 간편하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 공은 전적으로 작고 편리한 ‘압력’ 전기밥솥에 있다. ‘압력’에 따옴표를 단 것은 부엌에 붙어 있을 시간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압력 취사만큼 곡물을 익히는 데 적절하고 편리한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백미를 잘 쓰지 않는 나는 현미와 혼합 잡곡을 반반씩 넣고, 곡물의 양보다 1.5배 정도의 물을 넣는다. 물은 그냥 수돗물보다 끓인 물이나 정수가 좋다. 손등을 넣었을 때 가운뎃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가 충분히 잠기면 적당하다. 시간이 충분히 있다면 곡물을 한 시간 정도 물에 불린다. 40~50분 정도 기다리면 마침내 따끈한 잡곡밥이 완성된다. 이때 밥솥의 뚜껑을 바로 열지 말고 15분 정도 뜸을 들여야 하는데, 그 시간 동안 곡물이 좀 더 부드럽게 익기 때문이다. 고구마나 말린 나물, 다시마, 껍질을 깐 밤이나 은행, 연근이나 우엉, 감자 등을 먹고 싶은 만큼 잘라 넣어도 잘 어울린다. 부재료를 곡물과 뒤섞어도 되고 곡물 위에 얹어 밥을 해도 된다. 간이 배도록 소금 한 꼬집을 넣어주면 좋다. 말린 나물은 그대로 넣으면 밥 지을 물을 흡수하므로 반드시 먼저 불린 다음 꽉 짜 수분을 조금 머금은 상태로 넣는 것이 좋다. 밥을 지을 때 온 집 안을 감싸는 고소하고 포근한 냄새가 좋다. 곡물이 천천히 익어가는 향기다. 어쩐지 된장국과 밥 짓는 냄새만큼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밥이 다 지어진 소리를 듣고 조금 기다렸다 뚜껑을 열면, 알알이 익어 솥을 가득 채운 밥이 있다. 별다른 것은 없지만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기분이다. 물을 살짝 묻힌 주걱을 세워 곡물이 뭉개지지 않게 살살 가장자리부터 섞듯이 떠서 공기에 먹음직스럽게 담고, 참깨와 간장 혹은 소금 조금, 제대로 짠 참기름을 슬쩍 둘러 구운 김과 함께 먹으면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가득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니, 이건 아무래도 내 몸과 마음이 아주 좋아한다는 뜻이다. 안아라(홈그라운드 대표)
영혼을 데우는 홍합 3종 세트
언젠가 마트에서 호기심에 캠벨 수프를 산 적이 있다. 오로지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본 적이 있어서였는데, 무슨 맛을 고를까 망설이다가 이왕이면 생소한 ‘클램 차우더’를 골라보았다. 그것이 조개 수프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뚜껑을 땄을 때 나는 냄새보다는 그 이미지 때문에 후회했다. 아무리 통조림이라지만 금속 깡통 안에 조개처럼 싱싱해야 할 재료가 보관되어 있다는 점이 너무 그로테스크했기 때문이다. 홍합이 내게는 그런 이미지였다. 이 조개는 이를테면 대도시의 항구 같은 곳. 도시가 너무 거대해 근처에 바다가 있는 줄도 모르겠는 그런 산업항에 살 것 같았다. 이 값싼 재료가 훌륭한 주재료로 쓰인다는 것은 웹에서 이국적인 레시피들을 따라 해보는 게 유행하면서부터다. 짬뽕에서 심심풀이로 건져 먹던 이 조개는 사진 속에서 영혼을 데우는 요리의 귀한 주재료로 등장하고 있었다. 벨기에식 홍합 요리 ‘뮬’이었다. 처음 홍합 한 봉지를 샀고, 와인 붓는 걸 해보고 싶어 홍합 와인찜을 해보았다. 다행히 이 와인찜은 조리법이 쉽고 성공률이 높아 요즘도 가끔 해 먹는다. 홍합 3종 세트의 첫 번째인 와인찜은 이렇게 만든다. 우선 올리브 오일을 두른 프라이팬에 편마늘을 넣고 데우면 잠시 후 기분좋은 향이 나기 시작한다. 여기에 미리 씻어둔 홍합을 우르르 쏟아 넣은 다음 와인을 한 수저 정도 따르고 뚜껑을 덮는다. 몇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외울 필요도 없다. 설마 싶을 때 열면 홍합이 이미 커다란 껍데기를 벌리고 있으니까. 보통은 입을 벌리면 익은 거라고 하는데, 살짝 확인할 겸 더 기다렸다 불을 끄면 완성이다. 물론 여기에 레몬, 양파, 고추 등의 재료를 취향에 맞게 더하면 된다. 이제 할 일은 그저 껍데기를 담을 그릇을 하나 챙겨 손으로 열심히 홍합을 까먹는 것이다. 뭔가 몸에 좋은 걸 먹는다는 느낌과 해산물까지 직접 요리해 먹는다는 뿌듯한 자신감이 밀려올 것이다. 홍합을 까먹으며 그 효능을 검색해보는 것도 좋겠다. 기력을 회복시키고, 나트륨을 배출시키고, 조혈 작용까지 한다는 내용을 읽다 보면 더욱 홍합 요리를 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다 먹을 즈음 팬의 바닥을 보면 뽀얀 국물이 고여 있을 텐데, 이것이 두 번째 요리의 욕구를 자극한다. 별로 넣은 것도 없고, 잠깐 데운 것만으로도 홍합은 진한 육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육수로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세 번째 요리이자 내가 통조림으로 처음 접했던 ‘클램 차우더’를 만들 수도 있다. 양파를 잘게 썰어 버터에 오래오래 볶은 다음, 홍합 육수와 약간의 우유 혹은 삶아서 으깬 감자 등을 넣고 약한 불로 저으며 끓이면 근사한 조개 수프가 된다. 참고로 이 클램 차우더에 대한 나의 호감도가 변한 건 오로지 소설 <모비딕>에 이 수프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테스크했던 통조림 ‘클램 차우더’는 추운 항해를 하고 와 이 영양 많고 담백한 수프를 떠먹는 선원들의 기분으로 뒤바뀌었다. 여러분도 인생의 백경 같은 존재 때문에 삶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라면, 이 홍합으로 끓인 수프가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김목인(뮤지션)
- 피쳐 에디터
- 김아름
- 일러스트레이터
- 김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