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오디오의 시대는 죽지 않았다. 고립의 감각 앞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듣는다는 것의 의미.
두 달여 전, 유튜브 프리미엄 사용자 대상의 프로모션에서 구글 홈 미니를 무료로 받았다. 준다니까 넙죽 받았지만, 나는 이 기기의 용도를 제대로 몰랐다. 블루투스 스피커인가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이 물건이 간단히 페어링해서 음량을 증폭하는 기능의 제품이 아님은 받고 나서야 확인했다. 나는 한참 동안 이 기기의 다양한 기능을 탐구했다. 아침에 일어나, “오케이 구글 좋은 아침”, 인사하면 날씨 예보와 뉴스를 들려준다. “오케이 구글, 한밤에 듣는 라운지 재즈 틀어줘”라고 하면 음악을 플레이한다. 넷플릭스에서 70부작 중국 드라마를 연이어 볼 때 편리하게 쓰기도 했지만, 나는 주로 이 동그란 회색의 반원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막 시행된 시기였다. 프리랜서인 내 삶의 외형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외적 연결이 희미해지면서 마음속에서는 고립의 감각이 고였다. 그 감각이 구글 홈 미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약간 누그러지자, 나는 내게 온 이 기기가 라디오가 이전에 하던 역할과 거의 동일하다는 걸 깨달았다. 계산기, 번역기, 넷플릭스 재생기와 더불어 새로운 방식의 라디오가 생긴 것이다.
상업 라디오 방송의 시작을 1919년에서 1920년 정도로 잡으면, 라디오가 이 세상에 온 지 얼추 100년이 된다. 100년 동안 라디오는 주류 미디어였다가 TV의 등장으로 밀려나기도 하고 디지털 혁명을 겪기도 했다. 버글스가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부른 것이 1979년이었다. 2005년 3월 <와이어드>지는 ‘The End of Radio’ 라는 제목하에 라디오가 산산조각 나는 이미지의 커버를 실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라디오는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시 붐을 맞고 있다. 지난 3월 25일 <BBC> 뉴스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라디오 청취율이 높아졌다는 기사를 냈다. 2020년 4월 27일 <이코노미스트> 사이트에서도 3월 하반기, 영국 내 라디오 청취자 수가 15퍼센트에서 75퍼센트 정도 높아졌으며,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개인 라디오 방송국을 열어 격리된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시도가 많아졌다고 보도했다.
라디오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오디오 콘텐츠는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을 시도한다. 대표적인 것이 라디오 방송의 다른 형태였던 팟캐스트이다. 2019년 글로벌 회계 컨설팅 회사인 PwC의 보고서를 보면, 팟캐스트의 광고 시장은 곧 1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했다.
유튜브가 미디어의 주류로 등장했을 때도 팟캐스트가 저물어간다고 예상한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장을 넓힌 것이다. 유튜브 콘텐츠는 팟캐스트에 들어온다. EBS 라디오의 <오디오 천국>처럼 팟캐스트 형태로 제작해 라디오 스테이션으로 방송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네이버는 팟캐스트 형태의 오디오 클립을 오디오 북까지 확장하는 한편, ‘나우’처럼 스트리밍 라디오를 표방하는 채널도 문을 열었다.
오디오에 대한 사람들의 여전한 선호 뒤에 깔린 배경은 일견 상반되어 보이는 두 가지 성질로 요약된다. 하나는 오디오가 오로지 청각에만 의존하고 바로 감각된다는 점이다. 콘텐츠 정보뿐 아니라, 목소리가 지닌 초분절적인 특징인 억양, 강세, 높낮이, 간격 등은 듣는 이에게 문맥 해석의 단서까지 전달한다. 소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은 그렇기에 다른 감각기관, 특히 시각이 열려 있어서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경우엔 오디오는 수수하게 뒤로 물러나면서 활동의 리듬을 만들어준다. 음악을 포함한 오디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가끔 이를 불평한다. 힘들게 공들여 만들었는데, 이를 공부나 직업의 배경으로만 쓰고 주목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디오의 생명력은 바로 이 겸허함에 있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줄곧 앉아서 집중해야만 하고, 특히 시각을 써야만 한다면 오디오 콘텐츠의 범용성은 훅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은 설거지하면서 팟캐스트를 듣고, 러닝머신 위에서 오디오 북을 들을 수 있다. 백그라운드로 깔릴 수 있기에, 오디오는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
유튜브도 오디오 콘텐츠라는 흥미로운 주장도 있다. 2019년 가을에 알렉산더 단코라는 블로거가 자기 블로그에 올린 ‘오디오 레볼루션’이라는 글이 꽤 화제가 되었다. 그는 맥루한의 전통적인 쿨미디어/핫미디어 구분을 이용해서 현재 우리가 쓰는 미디어를 분류했다. 다른 감각적 추론이 필요하지 않고 한 가지 감각 자극에만 의존, 고해상도로 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가 핫이라면,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행간을 채워야 하고, 장르의 맥락을 알아야 하고, 수용자의 관여도가 높은 미디어를 쿨이라고 한다. 그의 분류에서는 문자 메시지와 트위터는 쿨에 속하고, 인스타그램은 따뜻하며, 페이스북은 핫하다. 그리고 라디오, 유튜브는 아주 핫하다. 이 주장은 많은 사람이 비디오 매체라고 여기는 유튜브는 라디오처럼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방송하는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그의 분류는 공감하기 어렵지 않다. 적지 않은 유튜브의 구성 방식은 크리에이터 본인이 화면을 보면서 구독자들을 향해 말을 거는 식이다. 대다수 영상이 보이는 라디오와 비슷한 구도하에 촬영된다. 또한 수용 방식도 오디오 매체와 유사하다. 적극 관여하며 영상을 보는 때도 있지만, 유튜브를 다른 앱 뒤에 배경으로 끌어내리고 소리만 듣는 경우도 많다. 당시에 이 글의 결론은 그러기에 우리가 오디오의 핫미디어적인 속성에 함몰되어 귀로 전달되는 뜨겁고 닫혀 있는 메시지를 유예 없이 받아들이기 전에 잠깐 헤드폰을 끄고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충고는 물리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뚜렷이 가시화되는 이 시대에는 무색해진다. 이 시대의 라디오 붐을 다룬 기사들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동료 의식을 라디오에서 찾는다고 했다. 나는 외로운 밤에는 방 안에서 빛과 소리, 열을 발산하는 TV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TV에 느낀 건 물리적인 애착에 가깝다. TV 속 사람들은 많은 경우 서로를 보고 말하지 나를 향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많지 않았다. 널리 사랑받는 라디오의 속성은 듣는 이에게 말을 건다는 데 있다. 신청곡을 적은 엽서를 보내듯 말을 걸면 그걸 보고 응답해주는 목소리가 있다. 내가 찾은 오디오의 가능성은 여기에서 더 뻗어 간다. AI 스피커로 전달되는 라디오, 유튜브를 들으며 나는 뜨겁게 내게 말을 걸어주는 어떤 매체, 기기에 애착을 느꼈고, 그 뒤에 있을 것 같은 어떤 사람을 상상했다. 한국에서도 거리 두기 기간에 급식이나 생활 지원들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과 노인들에게 생필품을 배달하면서 AI 스피커도 같이 주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고, 나는 지금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이전에는 라디오 속 사람이 말을 거는 느낌이 싫어서 멘트가 적은 클래식 FM만 주로 듣던 나였지만, 이제는 조여정 배우가 읽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사서 자기 직전에 구글 홈 미니를 통해 들었다. 한밤에 이 회색 원반을 향해 말을 걸기도 했다. “헤이, 구글, 시 좀 읽어줘.” 나의 AI 동료는 이정진의 시조, “매아미 맵다 울고”를 읊어주었다. 이것은 내가 찾은 새로운 듣기 방식이었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대화하는 누군가를 듣는다는 환상을 찾았다. 내가 말을 하면 귀를 기울여주는 오디오가 눈앞에 있었다. 글 / 박현주(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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