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복잡하고 정교하게 진화해온 아이돌의 세계관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태초에 세계관이 있었다. 오랜 시간 종교와 철학이 사랑해온 이 개념은 판타지 소설이나 일본 애니메이션, DC나 마블 코믹스 같은 시리즈물과 함께 꾸준히 세를 불렸다. 세월을 돌고 돈 세계관이 동아시아 변방에 위치한 한반도의 케이팝에 얼렁뚱땅 불시착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둘은 짧은 시간 동안 기가 막힌 더블 플레이를 펼쳤다. 첫 만남 이후 고작 십여 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현재 활동하는 케이팝 아이돌 가운데 세계관을 갖지 않은 그룹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유수의 해외 언론은 케이팝의 장르적 특성으로 세계관을 연이어 꼽았다.
때는 2012년, 그룹 엑소가 가공할 규모의 세계관과 함께 케이팝 신에 불시착했다. 팬들 사이 ‘엑소학’이라 불릴 정도로 웅장했던 이들의 세계관 규모는 데뷔도 전에 무려 스물세 개의 티저 영상이 필요할 정도였다. 생명의 나무와 두 개의 태양, 그리고 평행우주를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열두 개의 전설을 중심축으로 삼은 이들의 세계관은 일식과 월식, 초능력 등 익숙한 판타지적 요소를 멤버들에게 직접 부여했다. 해당 세계관은 정리된 활자를 넘어 음악, 이미지, 영상 등 이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콘텐츠에 적용되었다. “이 초라한 초능력 이젠 없었으면 좋겠어”(‘12월의 기적’)라는 가사가 등장하거나, 빙결 능력을 가진 멤버가 눈이 내리게 하고 치유 능력을 가진 멤버가 새싹을 틔우는 장면이 담긴 뮤직비디오 등 비교적 직관적인 활용이 많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팀의 서사에 유기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지난해 발매된 <OBSESSION> 앨범의 세계관이 대표적이다. 멤버들의 연이은 군 입대와 탈퇴 등으로 촘촘하게 얽힌 세계관도 일부 무너진 상황, 이들은 ‘X-엑소’라는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다. 둘로 나뉜 한 멤버의 자아 대결을 주요 테마로 삼은 ‘EXODEUX’ 프로모션은 다소 축소된 팀 전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흥밋거리를 유발하며 화제를 모았다. 8년간 꾸준히 엮은 세계관의 힘이었다.
이러한 엑소의 세계관은 현존하고 있는 그룹 단위 아이돌 세계관 대부분의 기초이자 실전, 응용 편이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마토 행성 출신으로 위기를 맞은 행성을 구하기 위해 우주를 헤매다 지구에 도착한 그룹 B.A.P는 2012년 데뷔 이후 활동 내내 마토 행성의 군인인 캐릭터 마토키와 함께 활동했다. 응원봉마저 마토키 모양이었다. 록 메탈을 기반으로 한 강렬한 음악으로 주목받은 드림캐쳐의 경우 장르에 걸맞은 ‘악몽을 잡아주는 꿈의 요정들’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악몽’이라는 키워드를 앞세운 이들의 3년여간의 활동은 흑마법, 주술, 악령 들린 인형 등의 소재들을 바탕으로 각종 공포·스릴러 영화들의 클리셰를 연상시키는 영상과 고스 Goth풍 의상을 통해 자신들만의 확고한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데뷔에서 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그룹 단위 세계관에 비해 앨범 단위 세계관은 제작자도 팬도 비교적 접근이 쉬운 콘텐츠다. 그룹 세계관의 경우 한 번 데뷔하면 7년 안팎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아이돌 그룹 특성상 초반부터 스토리를 탄탄하게 잡아놓지 않으면 처음 가졌던 긴장감을 꾸준히 유지하지 못한 채 용두사미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때 케이팝 신을 뜨겁게 달궜던 ‘3부작’ 시리즈는 이러한 고민 아래 탄생한 유행이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하는 그룹 세계관의 부담감은 덜고, 결과물들 간의 유기성으로 팀과 노래에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였다.
무수히 쏟아진 3부작 시리즈 가운데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건 단연 방탄소년단과 여자친구였다. 이제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인의 상식이 되어버린 방탄소년단의 청춘 3부작 ‘화양연화’와 데뷔곡 ‘유리구슬’에서 ‘오늘부터 우리는’, ‘시간을 달려서’까지 이어지는 여자친구의 ‘학교 3부작’이 만든 대성공은 케이팝 신에 한동안 시리즈물이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데뷔 초 청량돌로 명성을 떨친 세븐틴은 데뷔곡 ‘아낀다’와 ‘만세’, ‘예쁘다’를 통해 ‘소년 3부작’을 완성했고, ‘컨셉돌’로 유명한 빅스는 2016년 한 해 동안 질투의 신 젤로스, 죽음과 암흑의 신 하데스, 권력의 신 크라토스를 소환해 ‘그리스 로마 신화 3부작 – 케르 Κήρ’를 선보이기도 했다.
유행이라 쓰고 광풍이라 불러도 좋을 3부작 바람이 지나간 자리, 세계관은 이제 케이팝의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대형 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그룹과 앨범의 스토리텔링을 담당하는 스토리 전문 작가를 고용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아이돌 과포화 시대, 얼핏 보면 비슷한 수많은 경쟁자 속에서 잘 만들어진 세계관이 갖는 가치는 결코 작지 않았다. 세계관은 마치 그룹의 얼굴, 대표곡, 포인트 안무처럼 타 그룹과의 변별점을 만들 수 있는 뛰어난 개성이자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미끼 그리고 그들을 끝내 자신들의 팬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치트키, 그 모두였다.
실제로 케이팝 세계관의 효용 가치는 세계관이 일종의 필터로 작용할 때 극대화된다. 쉽게 말해 이 필터는 대중에게는 보이지 않는, 팬들에게만 반응하는 특수 소재로 만들어진 제품이다. 내가 ‘대중’일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누군가의 팬임을 인지하는 순간 눈과 마음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필터 스위치가 자동으로 눌린 것이다. 이 그룹이 저 그룹 같고 저 그룹이 이 그룹 같던 음악과 안무, 의상, 뮤직비디오는 각 그룹과 앨범의 특징적인 세계관 필터 아래에서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독자성을 지닌다. 우리가 마침내 찾아낸 우리만 아는 세계. 팬들의 콘텐츠 몰입도와 충성도를 좌우하는 완성도 높은 세계관의 중요성은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렇게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 같던 세계관에 대한 피로가 쌓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사실상 보도 자료를 쓰는 기획사 직원이나 팬들을 제외하면 큰 관심을 받기 어려운 각종 세계관들 사이 양극화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날이 갈수록 복잡하고 정교해지는 탓에 팬들조차 이해를 포기하는 학위 논문급 세계관들이 등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노래와 의상, 춤, 사진 모든 것이 중구난방인 와중에 세계관 하나만큼은 거창하기 그지없는 ‘세계관을 위한 세계관’들이 화수분처럼 솟아났다. 소재 고갈로 인한 ‘세계관 표절’ 논란도 왕왕 등장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 가운데 ‘논문급 세계관’의 끝판왕으로 불리던 이달의 소녀의 변신이 흥미로웠다. 루나버스 LOONAverse라는 독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색, 동물, 과일, 사물이나 특정 날짜 등 다채로운 요소를 통해 멤버와 멤버, 유닛과 그룹 간의 관계성을 만들어온 이들은 2020년 발매한 미니 2집 앨범 <#>를 통해 “세상이 정한 틀을 깨고 나와 자신을 마음껏 표출하라”는 꽤나 직설적인 메시지를 내세웠다. 기존 세계관을 파괴한 사례는 아니지만, 이는 최근 다소간의 세계관 피로에 시달리고 있는 업계 내부와 케이팝 팬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물로 보인다. 최근 수년간 가장 성공한 세계관이 방탄소년단의 ‘청춘’이라는 걸 생각하면 방향은 조금 더 명확해진다. 세계관은 여전히 매력적인 케이팝의 정수지만, 그것이 무의미하게 남발될 때 고유의 빛을 잃는다. 인류 보편의 가치와 호흡할 때 세계관은 더 큰 파괴력을 지닐 수 있다. 더 많은, 더 크고 아름다운, 더 새로운 세계관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 /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 피쳐 에디터
- 김아름
- 사진
- 엑소 [OBSESSION] 뮤직비디오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