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나 홀로 먹고 마신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고요한 공간에서.
빅라이츠 #biglights_seoul
서울에 지금처럼 강렬한 내추럴 와인 바람이 불기 이전부터, 낯설고 아름다운 맛의 세계를 차근차근 알려주었던 빅라이츠가 조용히 둥지를 옮겼다. 한남동 리첸시아 근처 골목을 여러 번 꺾으면 기묘한 대나무 숲이 등장한다. 그 사이로 보이는 아날로그적인 건물 2층. 이제는 주차도 가능하고, 안에도 화장실이 생겼고, 훨씬 넓어진 공간이 빅라이츠의 오랜 단골들에겐 반가운 변화일 것이다. 조만간 새롭게 들여올 프리츠 한센의 가구, 드비알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리드미컬한 음악, 벽을 채운 새로운 그림들도 반갑다. 여전히 변함없는 건 술을 부르는 어여쁜 음식과 다채로운 내추럴 와인 포트폴리오, 매주 열리는 ‘대광 토요 낮술회’. 펑키한 맛부터 기품 넘치는 고고한 맛까지, 3년 동안 사람들의 기호를 섬세하게 관찰하며 업데이트해온 알곡 같은 와인 리스트야말로 빅라이츠의 하이라이트다. 훈연한 평창 송어, 감자 밀푀유, 장작에 구운 오이나 셀러리악 등 여러 가지 요리를 시켜두고 혼자 천천히 한 병을 비워내도 좋겠다.
양출서울 #yangchulseoul
양출서울은 호젓한 논현동 주택가에 숨어 있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 길게 드리워진 투명한 커튼 사이로 테이블이 보인다. 미니 오이, 콜리플라워, 아보카도, 채끝 등심과 비트, 알감자와 오징어. 채소가 주인공이자 때로는 빼어난 조연으로 활약한다. 양출서울의 디데이는 화요일이다. 그날 홍성에 있는 농장 ‘채소생활’에서 형형색색 채소 꾸러미가 올라온다. 오픈 주방에서 알맞은 속도로 나온 요리가 테이블 위로 하나둘 오르면, 거기에 컬러가 어여쁜 내추럴 와인을 곁들인다. 권재우 작가가 빚은 도자기 그릇에 담긴 음식이 더욱 선명하게 색을 드러낸다. 33도를 웃도는 뜨거운 여름날에도 이곳에 앉아 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빈 병이 대리석 테이블 위로 행렬을 이루며 밤은 길어진다. 다음번에 함께 오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안티트러스트 #antitrust_seoul
앤드다이닝, 묘미를 거쳐 동빙고동 안티트러스트에서 새로운 챕터를 시작한 장진모 셰프. 1980년대에 지은 가정집은 세월이 흐른 후, 음식과 예술 작품이 공존하는 새로운 다이닝 공간으로 변했다. 안티트러스트는 파인다이닝의 최전선에 있던 장 셰프가 식재료, 가격, 맛, 공간 등 복합적인 고민 끝에 선보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한입에 먹을 수 있는 바이트 메뉴, 단품과 코스 등 취향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다. 초여름 새롭게 개편한 메뉴 가운데 눈에 띄는 건 오리의 변주다. 삼계탕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메뉴는 볏짚과 누룩을 이용해 숙성시킨 오리에 들깨, 치아씨드로 크런치한 식감을 살리고, 라벤더 향을 살짝 입혔다. 바다 맛이 가득 들어찬 농어 요리에 샤르도네를 곁들이면 이보다 더 완전한 여름은 없을 것 같다.
ebt #ebt.official
‘eat better’ 라는 작은 글자가 숨어 있는 하얀 간판의 건물. 엘본더테이블에서 새롭게 문을 연 그릴&바 레스토랑이다. 채광이 좋은 유리 창가 좌석에 자리를 잡는다. 경쾌한 발걸음의 서버와 소믈리에, 오픈 키친에서 집중도 높게 요리를 만들어내는 셰프들. 공간의 중심에는 맛의 핵을 만들어내는 그릴 오븐이 자리 잡고 있다. 200~300도 고열에서 구워내면 재료의 육즙과 향이 배가된다. 고기도 채소도 촉촉하고 부드럽게 익는다. 계절 채소를 후무스에 찍어 먹는 샐러드와 상큼한 생참치 요리를 시작으로 묵직한 이베리코 스테이크를 즐긴다. 탄수화물이 부족하다 싶으면 초록 빛깔의 완두콩 보리 리소토도 꼭 맛볼 것. 노해동 셰프가 추구하는 멋 부리지 않은 심플하고 신선한 요리로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
보틀러 #bottler
술에 대한 사랑을 양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을지로에 생겼다. 술을 병입하는 사람을 뜻하는 ‘Bottler’는 마시면 마실수록 이득을 보는 바다. ‘1인 1병’을 달성하면 와인 가격을 30퍼센트 할인해 준다. 유쾌한 언어와 제스처로 박보경 소믈리에가 사려 깊게 와인을 추천해준다. 닭 반 마리를 호방하게 구워 홍고추 소스를 뿌리고, 바삭바삭한 양파 칩을 얹은 요리가 테이블 위로 오른다. 박지영 셰프의 ‘킥’이라고 할 수 있는 꽈리고추 프로슈토는 자꾸만 손이 가는 마성의 메뉴다. 주변 노포에서 영감을 받아 을지로 골뱅이를 오마주한 메뉴도 조만간 선보인다. 보틀러는 낮에는 느긋한 베이커리 카페로, 초저녁부터는 근사한 바로 천천히 변화한다. 늦은 오후부터 자리를 잡고, 두 가지 상반된 매력을 모두 경험해봐도 좋겠다.
화이트 와인 개러지 #white_wine_garage
은은한 조명 아래 와인과 위스키가 나란히 놓일 수 있는 바가 청담동에 생겼다. 홍대 지역의 맏형 같은 바 디스틸이 10주년을 맞이한 올해. 그들의 술과 음식 페어링에 대한 고민과 도전을 응축한 공간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면 5미터가량의 높은 천장에 마음이 탁 트인다. 한때는 사진 스튜디오로, 창고로 사용되어온 공간에서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가 흘러나오면 타임 슬립한 기분이 든다. 정교하고 섬세하되 자유분방하게. 분위기든 음식이든 이곳이 표방하는 모토다. 계절의 정점을 보여주는 해산물을 적극 이용한 작고 귀여운 요리를 선보인다. 숯으로 겉을 그을린 전갱이와 우니, 초된장에 버무린 농어와 방풍나물, 숯불에 구운 항정살과 고사리 등등. 익숙한 듯 낯설고 새로운 조합의 한식 요리와 함께 화이트 와인, 그리고 디스틸에서 수년간 컬렉팅해온 한정판 위스키도 맛볼 수 있다. 이종덕 방짜유기 장인이 만든 와인 쿨러에서는 기품이, 해장을 돕는 마무리 국수에서는 배려심이 느껴진다.
- 피쳐 에디터
- 김아름
- 포토그래퍼
- 홍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