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은 계속 달린다. 덜어내고 비워내 가뿐해진 몸놀림으로.
내일 생일이죠? 그러게요. 하하.
신기한 사실 하나 알려줄까요? 12년 전에 지큐와 인터뷰한 날은 생일 다음 날이었어요. 와, 정말요? 12년 전이라니. 스무 번째 생일이네요.
생일인데 별로 기쁘지 않다고도 했어요. 제가요?
여기 적어왔어요. “10대와 20대의 차이점을 잘 못 느끼겠어요. 그냥 일하면서 1년씩 지나간 것뿐이지 많이 다르진 않아요”라고 했네요. 듣고 보니 그렇게 말한 것 같아요. 그때와 비교해 가치관은 꽤 달라졌지만 시간 개념은 비슷해요. 어렸을 때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살았어요. 20대와 30대의 차이를 못 느끼고 서른둘이 됐다, 이걸 자각하지 않아요.
팬 게시판에서 이런 글도 봤어요. “무언가를 시작한 지 14년이 됐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정확히는 15년째가 됐어요. 직장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어떤 일이든 다 비슷한 것 같아요. 7년 차쯤 내가 왔던 길을 되돌아보고, 10년이 되면 슬럼프나 딜레마를 겪게 돼요. 이 일이 과연 나와 맞는지 고민하기도 하고. 일을 일찍 시작해서 남들보다 그런 지점들이 빨리 찾아왔어요. 또 그 시간을 나름 잘 보내니까 그조차도 받아들 수 있는 자아 같은 게 생겼어요. 15년을 일하면서 아는 게 많아졌고, 그만큼 고민도 있지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노하우를 얻었어요.
지금 자신만의 무기나 차별점은 뭐라고 생각해요? 전보다 여유로움을 느껴요. 20대는 치열하게 보냈어요. 처음부터 큰 관심을 받았고, 1년 동안 3~4일만 쉬고 일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정신없이 달렸는데 페이스 조절을 못 했어요. 치열함 속에 스스로를 가뒀던 것 같아요. 결국 30대를 앞두고 퍼져버렸죠. 더 이상 달릴 힘이 없어 그대로 주저앉았어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해요. 리빌딩의 시간을 보냈거든요. 숨을 고르면서 치열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일 수 있었죠? 갑자기 주저앉는다는 건 누구나 다 의연하게 넘길 수 있는 만만한 상황은 아니에요. 쉬는 동안 제 뒤에서 달리던 친구들이 저를 앞지르기 시작했고, 그들을 뒤에서 막연히 바라봤어요. 같이 뛸 때는 몰랐는데 떨어져서 보니까 저마다의 길이란 게 있더라고요. 저들과 내 길은 다를 수 있다, 쫓아가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았어요. 그래, 좀 더 쉬자. 다시 달리기 위한 에너지를 비축했어요.
결국 다시 달려야 한다는 얘기네요. 뭔가 이루고 싶은 욕망이나 간절한 것도 있어요?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너 1억, 2억 준다고 하면 이거 할 수 있어?” 하잖아요. 농담이라 해도 저는 그런 상황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가치관과 상반되는 것은 조금도 끌리지 않아요. 요즘 신경과학, 뇌과학에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을 읽고 있는데, 외적 동기에 의해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는 타입이라 할 수 있어요.
인터뷰할 때마다 “지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라고 했던 거 기억해요? 승부욕은 어떤가요? 그건 버리지 못해요. 다만 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해서 어느 순간 그 승부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젠 좀 의연해졌어요. 무조건 지면 안 된다는 식의 강박은 없어요. 그렇다고 져도 된다는 건 아니에요. 생각의 차이랄까, 라운드마다 단판 승부가 아니라 장거리 레이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기대되는 건 뭐예요? 내 길 위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같이 가고 있는 사람들과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제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 보는 눈은 명확한가요? 주위에 나쁜 사람이 없는 걸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호불호가 강한 편이기도 해요.
어떤 유형의 사람에게 호감을 느껴요? 센스가 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을 좋아해요.
막연하게라도 자신은 가까운 이들에게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같이 일하면 피곤할 수 있어요.
병역 의무를 마치고 <구미호뎐>이라는 드라마를 촬영 중인데, 뭐가 제일 재미있어요? 연기술에도 유행이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일을 해서 그런지 예전의 연기술이 몸에 배어 있더라고요. 감독님과 상의하면서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조금씩 바뀌고 성장하는 부분이 재미있게 느껴져요. 또 구미호 역할을 맡아 스타일이 굉장히 화려해요. 화보 찍을 때 입을 법한 의상을 입고,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요.
그러고 보니 복서, 호스트, 수호천사, 초능력자처럼 범상치 않은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했어요.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변화와 도전에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가 되겠다”는 소감을 말한 적 있어요.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오랫동안 지켜온 가치관 중 하나예요. 배우로서 다양한 옷을 입어보고 싶어요. 그게 연기할 때 훨씬 재미있어요. 작품에 들어가면 촬영이 끝날 때까지 캐릭터를 놓지 않으려고 해요. 카메라 밖에서도 그 옷을 입고 있죠.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닮기도 하고, 제가 가진 생각이나 가치관이 역할에 반영돼요. 그래서 예전 작품들을 다시 보면 그 시절의 제가 보여요.
실제 자신의 삶에 큰 영향력 미친 작품이 하나쯤 있겠죠? 20대 초반에 2년 가까이 휴식기를 가졌어요. 처음으로 슬럼프가 찾아와 매체나 카메라 앞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어요. 저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 작품이 노희경 작가님의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였어요. 우연히 대본을 봤는데 그 자리에서 다 읽었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아,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겼어요.
어떤 점이 크게 와 닿았어요? 노희경 작가님의 대본을 연기하는 내내 배우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많은 배움을 얻었어요. 특히 하늘이 열리고 땅이 꺼지는 게 기적이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기적이라는 작품의 메시지가 제 마음에 불을 지폈어요. 그 작품이 끝나자마자 그해에 네 작품을 연달아 했어요.
아까 변신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만약 누군가의 하루를 살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어머니요. 어머니께서 늘 저를 지지해주고 지탱해주면서 아픔도 같이 겪으셨어요. 그게 어떤 심정인지 알게 된다면 어머니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상상이라도 해봐요. 김범 같은 아들이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되게 힘들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로 하루만 살고 싶다고 말한 거예요. 하하. 장남인데 무뚝뚝하고 살가운 구석도 없어요. 애교나 간질간질한 말도 잘 못 해요.
그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요? MBTI 검사를 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동일한 성격 유형이 나왔어요. 매우 극소수에 해당하는 부류라고 하더라고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워낙 좋아하기도 해요. 그가 만든 영화들은 두세 번씩 봐야 이해가 되고 해석이 분분한 장면이 많거든요. 어떤 의도로 연출했는지 궁금해요.
아,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시나리오를 쓰는 게 꿈이라고 들었어요. 이야기의 틀만 있어요. 디테일하게 살을 붙여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나요. 아직 멀었죠. 배워야 할 게 많아요. 이전에도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시나리오에 대한 꿈은 나중에나 실현 가능할 것 같아요.
최근에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았던 꿈을 꾸었다면 어떤 내용이죠? 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떠올라요. 잠을 많이 안 자거든요. 요즘은 하루에 3~4시간쯤 자요.
어떻게 그래요? 그 정도만 자도 피곤하지 않아요.
깨어 있는 시간에 주로 뭘 하나요? 특별히 뭘 하진 않아요. 가만히 생각을 하거나 내일이나 모레 할 일을 시뮬레이션하곤 해요.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어떻게 행동하고 대처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식이에요. 실제로 맞으면 재밌는 거죠. 어제도 오늘 촬영을 시뮬레이션해봤어요. 스튜디오 들어가서 인사하고 촬영하고.
내일 일을 시뮬레이션해볼까요? 생일이잖아요. 할 만한 게 없어요. 내일은 약속이나 촬영도 없거든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평범한 하루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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