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티브는 미술사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 미술계의 생존 혹은 자유로운 기획과 실험의 최전선에 위치한 컬렉티브가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
한성대 입구역 4번 출구, ‘WESS’의 간판은 전시장이 있을 것 같지 않은 8차선 대로변에서 눈길을 사로잡기에는 아담했다. WESS는 전시 공간이자 큐레토리얼 컬렉티브의 이름이다. 공간 임대 계약 기간인 2년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로 예정되어 있으며, 11명의 큐레이터가 1/n의 월세를 내며 각자의 기획으로 전시를 여는 기획자 공동 운영 플랫폼이다. 웜업 프로그램을 거쳐 지난 5월 첫 번째 전시 <아나모르포즈: 그릴수록 흐려지고, 멀어질수록 선명해지는>이 열렸고, 두 번째 전시 <7인의 지식인>이 8월 7일까지 계속된다. 오프닝이 있던 7월 9일 밤, 후텁지근한 열대야의 시작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주유소 옆 팥죽색 건물로 모여들었다. 1층의 비어 있는 공간에서 이번 전시의 기획을 맡은, 11인의 멤버 중 하나인 박수지 큐레이터와 그의 청탁으로 이번 전시의 시노그래피를 맡은 IVAAIU City의 큐레토리얼 토크가 있었다. IVAAIU City는 시각예술, 전자음악, 무대디자인, 도시계획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5인의 아티스트가 모인 작가 컬렉티브. 에어컨 없는 공간에서 블랙이 드레스 코드인 듯 검은 옷을 입은 관람객들이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진지하게 토크를 지켜봤다. 토크는 8시 58분에 급박하게 종료되었는데, 목·금·토요일 7시부터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는 전시는 매시 정각과 매시 30분부터 12분간 ‘전시 공간이 특정한 상태로 변모’하기 때문이었다. 그 ‘변모’를 작동하기 위해 IVAAIU City 멤버들은 2층 전시장으로 다급히 뛰어 올라갔다. 전시장에는 세 점의 작품이 알루미늄으로 만든 독특한 구조물과 하나 돼 색다른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장종완 작가의 작은 버드나무 초상화 습작은 제단처럼 짜인 구조물 가운데에 걸려 좌우로 움직이며 눈을 빛내고, 황예지 작가가 자신의 눈을 클로즈업해 찍은 초상 사진은 위협적인 알루미늄 트리 안에 불편하게 뉘어 있었다. 암수의 개념이 접목된 황수연 작가의 종잇조각은 직사각형의 구조물 안에서 수직적인 움직임을 반복했다. 이토록 생경한 전시 전경은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깔리고 라이트가 리드미컬하게 점멸하며 불편한 황홀경을 선사했다. WESS라는 신생 컬렉티브의 SNS를 팔로우하지 않았다면 놓쳤을 귀한 경험이었다.
2인 이상이 협력하는 팀, 집단, 공동체, 그룹, 모임, 조합, 동인 등을 의미하는 컬렉티브는 미술계에 꾸준히 있었다. 플럭서스, 게릴라 걸스와 같이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예술가 집단이 있었고, 2015년, 터너상이 제정된 이래 최초의 집단 수상자인 런던의 건축, 디자인 컬렉티브 어셈블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 새로운 방식으로 도시를 재건하는 데 힘쓴다. 지난해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전시한 수퍼플렉스, 올가을 국내 전시를 앞둔 팀랩 등 현대 미술계에는 비엔날레 참가 팀 중 열에 하나는 컬렉티브일 정도로 그룹으로 활동하는 미술가가 많다. 2000년대 이후 국내 미술계에서도 신선하고 낯선 이름이 대거 눈에 띄기 시작했다. 파트타임스위트, 방앤리, 뮌, 무진형제, 로와정, 낫이너프타임, 보물섬 컬렉티브 등 이들 작가 컬렉티브는 광기와 외로움의 프레임에 갇혀 있던 독자 생존의 예술가 상에서 벗어나 시너지를 발휘하는 결과물을 내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전통적인 작가 컬렉티브뿐 아니라 큐레토리얼 컬렉티브, 비평가 컬렉티브 혹은 이들이 혼합된 컬렉티브 등 다양한 형태의 컬렉티브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뉴욕을 베이스로 활동하는 DIS가 가장 대표적인 기획자 컬렉티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패션지 에디터, 미술가, 웹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모여 결성한 DIS는 온라인 매거진 을 만들고 미술가 사이먼 후지와라, 브랜드 후드 바이 에어 등과 협업한 상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 ‘DISown’을 오픈하며 전방위 활동을 펼치더니 2016년에는 베를린 비엔날레 기획을 맡았다. 비엔날레는 단순히 2년마다 열리는 전시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의 도시가 주체가 되어 국제적 관점에서 열리는 행사를 진두지휘할 영예로운 자리에 전격적으로 발탁된 것. 행사 후 비엔날레에 대한 혹평도 없지 않았으나 참신한 시도가 많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2019년 3월호 <미술 세계>에는 1~2년 사이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컬렉티브 11팀을 인터뷰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고고다다 큐레토리얼 컬렉티브’, ‘개방회로’, ‘노뉴워크’, ‘반짝’, ‘불량선인’, ‘배드 뉴 데이즈’, ‘사유지’, ‘와우산 타이핑 클럽’, ‘옐로우 펜 클럽’, ‘90APT’, ‘Z-A’. 이들 가운데 지금도 꾸준히 SNS에 활동이 업데이트되고 있는 팀은 반 정도 되는 것 같다. 이들 컬렉티브는 집단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작가 컬렉티브와는 다르게 특정 공간이나 플랫폼을 기반으로 보다 유동적이거나 일시적인 연대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아 활동 기간이 오래도록 이어지기 힘든 게 아닐까 싶다. WESS 역시 2년간의 활동을 암묵적으로 정해놓고 있다. “전시 공간이 생기면 2~3년 정도의 시간 동안 신뢰를 보낼 만한 좋은 전시들을 선보이고 그 이후에는 텐션이 훅 떨어지는 선례를 종종 봤어요. 수익 모델이 거의 없는 비영리 공간의 특성상 예산 문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그때부터는 대관 전시가 이어지거나 운영자들 개인이 외부 활동으로 벌어들인 기획료나 원고료 등으로 공간 운영을 지속하게 돼요. 그럴 경우 부담감이 축적되고, 버티다가 결국 문을 닫는 수순을 밟는 거죠.” “2년 후에도 같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다른 기획자들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눠볼 수는 있겠지만, 단지 WESS를 지속하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불필요한 일들이 넘쳐나는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억지로 이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 계약 연애처럼 기간을 정해두느냐고 묻자 WESS를 주도한 송고은, 장혜정 큐레이터가 들려준 얘기다.
그럼에도 큐레토리얼 컬렉티브는 계속 생겨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해본다. 2000년대 이후 생겨난 대안 공간들이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마음껏 실험해볼 수 있는 장이 되었던 것처럼, 기획자들에게도 유형이든 무형이든 자유롭게 자신의 기획을 펼치고 나눌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안 공간들은 지난 20년 동안 4~5년을 주기로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기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처럼 큐레토리얼 컬렉티브 역시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 날지도 모르겠다.
2002년 전시 공간 겸 아트 숍으로 문을 열고 다양한 예술적 시도와 퍼블릭 프로그램을 기획 및 실행해온 팩토리는 2018년 ‘팩토리 2’라고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구성된 멤버로 꾸려지고 있다. 홍보라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지난 15년간 운영되어온 컬렉티브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여성 기획자들을 멤버로 맞아들이며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는 셈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컬렉티브 루앙루파 Ruangrupa 역시 확정된 구성원이 아닌 유동적인 인원으로 컬렉티브를 이어 나간다. 필라델피아, 뉴욕, L.A. 등에 ‘Artist-Run Space’를 운영하는 TSA(Tiger Strikes Asteroid) 또한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현재 멤버와 지난 멤버를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한시적일지언정 마음껏 기획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서의 전시를 보는 일이 얼마나 짜릿한지 경험했기에 생경한 이름의 컬렉티브가 등장하면 바로 팔로우 버튼을 누를 뿐이다. 글 / 안동선(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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