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려는 마음, 비워내는 시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그 사이에 배우 공유가 있다.
클래식한 것을 좋아하세요? 옷뿐만 아니라 가구, 자동차 모든 장르에서 클래식한 것을 점점 더 동경하게 돼요. 시간이 흘러야 비로소 알게 되는 멋이 있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과하거나 화려한 것보다는 오늘 입은 옷처럼 베이식하고 클래식한 멋이 있는 옷을 좋아해요. 제 나이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도 하고요.
클리셰 같은 질문이긴 한데, 왜 늙지 않으세요? 저 나이 많이 먹었어요. 가까이서 보면 티 많이 나요(웃음).
내년에 데뷔 20주년을 맞이하시죠. ‘그들 각자의 공유관’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영화 <용의자>를 꼭 언급하고 싶어요. 사실 제가 쌓아온 필모그래피에 대한 애정은 본질적으로 같지만, <용의자>는 확고한 결을 갖고 있는 작품이었어요. 극한의 상황까지 저를 몰아붙인 영화죠. 지금까지 찍은 작품 가운데 물리적으로 가장 힘들었어요. 체중 감량을 하면서 잔인하고 혹독하게 몸을 만들었으니까요.
고통 끝에 찾아오는 무언가가 있나요? 육체적으로 힘든 영화를 찍는다는 건 고난의 연속이에요. 그걸 고집했던 이유는 멋들어진 육체미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캐릭터를 위한 정서적인 훈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어요. 그 과정이 지동철이란 인물을 표현하는 데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생각해요. 화면을 통해서 스스로도 처음 보는 저의 낯선 표정을 봤어요.
크랭크업한 영화 <서복>에서도 체중 감량을 꽤 했다고 들었어요. 다이어트를 한 번 더 감행한 이유는 얼굴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였어요. 기헌이란 인물이 건강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캐릭터의 특성상 얼굴이 좀 피폐해 보여야 했거든요. 운동을 병행하니까 얼굴살은 빠지고, 근육량은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몸을 좀 키우게 됐어요. 영화 속에서 제가 복제 인간 서복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역할이거든요. 서복 역을 맡은 보검 씨가 생각보다 골격도 있고 여리여리하지 않아요. 그런 부분을 계산해서 제가 덩치를 좀 키웠죠.
<서복>의 이용주 감독뿐만 아니라 조성희, 최동훈, 김용화, 김태용 등 많은 감독이 차기작으로 SF 영화를 준비하고 있어요. 이런 흐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고요의 바다>, 특별출연으로 참여한 영화 <원더랜드>까지, 공교롭게도 앞으로 선보일 영화가 모두 일관성 있게 근미래를 다루고 있더라고요. 제가 요즘 갖고 있는 정서나 사고방식이 반영된 선택 같아요.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다가올 미래가 궁금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도 돼요. 요즘 우리가 그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시국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 지금 이런 거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작품에 자연스럽게 끌렸던 것 같아요. 혼자서 얕게 든 깊게 든 여러 가지 망상과 상상에 사로잡혀보곤 하는데, 그러다 보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눈길이 향하게 되네요.
어둡고 서늘한 작품 속에서도 공유 씨가 연기한 인물 대부분은 ‘휴머니즘’을 관통했다고 생각해요. <용의자>, <도가니>, <밀정>, <부산행> 등등 차갑게 시작해서 끝끝내 뜨거워지는 캐릭터들이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갑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제 필모그래피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시작점은 인간에 대한 연민인 것 같아요. 그 연민 안에는 제 자신도 포함되어 있어요. <도깨비>를 촬영할 때 ‘유약하다’는 표현을 많이 썼거든요. 저는 인간이 정말 한없이 유약한 동물이라고 생각해요. 거창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해요. 서로 간에 연민의 감정을 잘 쌓아가면 언젠가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을까?
“배우 공유 씨는 본인이 튀려고 하지 않고 중심을 잡아줬다. 연극적이지 않고 힘을 빼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유의 연기는 분명 더 빛날 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말이다”라는 연상호 감독의 말에 연기에 대한 소신을 읽어준 것 같아 코끝이 찡했다고 했었죠. 관객이나 시청자 입장에서 작품을 볼 때 가끔 자극적이거나 작위적이거나 너무 극적인 연기를 보면 저는 오히려 몰입이 깨지더라고요.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 같지가 않아서. 어떤 배우가 미친 듯이 울지 않아도,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그 슬픔이 훨씬 더 깊게 전해질 때가 있어요. 연기의 톤이 담백했을 때 극에 집중이 잘돼요. 그래서 생활 연기를 좋아해요. 누군가는 이런 스타일의 연기가 밋밋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어디까지나 취향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연기에 정답은 없으니까요
배우 공유도, 인간 공지철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편안하고 유연해진 것 같아요. 저는 욕심이 별로 없어요. 너무 상투적인 표현인데 이걸 대신할 말을 찾기가 힘드네요. ‘내가 지금 꼭 저걸 당장 안 해도 괜찮다’, ‘급하게 가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끊임없이 되뇌었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나이가 지금인 것 같고요. 이제는 나름 여유도 있고 용기도 생겨서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요. 예전에는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게 너무 싫었는데 지금은 별로 상관 안 해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다가 온전히 내가 즐길 수 있는 걸 놓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이 모든 게 영원한 것은 아니니까 언젠가 제주도에서 작은 식당을 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어요. 휴대 전화 사진첩에서 음식 사진이 거의 80퍼센트를 차지해요. 어떤 레스토랑의 음식이 너무 맛있어 보이고 그 맛이 궁금해지면 직접 가봐요. 먹는 즐거움이 큰 낙인 사람이라서(웃음). 아마 식당을 내고 싶다고 말한 건 결국 어떤 공간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을 거예요. 아주 협소하더라도 예쁘고 소박한 공간에 머물고 싶다는 판타지가 있어요. 나중에 진짜로 식당을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전원 가까이서 살고 싶긴 해요. 지금처럼 빌딩 숲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요즘은 여행이 공상이 되어버렸어요. 그리운 기억이 있나요? 캘리포니아 햇볕이 그리워요. 예전에 미국에서 딱 한 달을 살아본 적 있어요. 눈뜨면 동네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고, 차를 빌려서 서부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하고, 매일매일 아무 길을 걸었어요. 수영복에 쪼리 차림으로 해변으로 나가서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천국이었죠. 원래 태닝하는 걸 좋아해요. 집에 작은 테라스 공간이 있어요. 거기에 하얀색 플라스틱 선베드를 들여놨어요. 날씨가 좋으면 맥주 한 캔 손에 쥐고 선베드 위에 가만히 누워 있어요. 음악 들으면서 광합성을 하는 거죠. 소소한 행복이에요.
다린, 오왠, 죠지, 오존, 92914. 공유 씨가 추천한 뮤지션 리스트예요. 조명받았으면 하는 음악을 열심히 디깅하는 편인가요? 옛날만큼은 못 해요. 그때는 정말 뭐에 한번 꽂히면 집요하게 팠어요. 내가 먼저 그 아티스트를 발견했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어요. 그런데 지금은 음악을 그냥 편하게 들어요. 컴퓨터와 친하지 않지만 음악을 찾아 들으려고 그나마 모니터를 켜요. 요즘은 제 취향과 비슷한 음악을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면 그 리스트를 즐겨 들어요. 쉬고 싶을 때 음악을 틀어놔요.
“고독은 곧 독립을 뜻한다”는 어느 소설가의 문장이 공유 씨와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오늘 하루도 잘 보냈다”고 생각하는 보통날의 루틴은 무엇인가요? 평범하지만 너무 당연한 습관처럼 운동을 해요. 그 전날 과음을 해도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꾸역꾸역 헬스장으로 향해요. 땀 흘리고 난 뒤 샤워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래도 오늘 하루는 실패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어요. 일종의 강박이기도 해요. 운동을 해야 마음 편히 뭘 먹을 수 있거든요. 나이가 들면 몸이 망가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더라고요. 관리를 안 하면 고스란히 드러나요. 마흔이 넘어가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건 몸은 절대 거짓말을 안 한다는 거예요. 요즘엔 헬스장에 갈 수 없으니까 홈트레이닝을 해요.
공유라는 배우의 품격은 세월이 흐를수록 스스로를 잘 컨트롤하고 지키려는 마음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해요. 몸처럼 마음도 무너지거나 무뎌지지 않도록 하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을까요? 아직 인생의 반밖에 안 살아봐서 이런 말이 조심스럽긴 한데, 결국 제가 했던 작품들이 곧 저이기도 하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제가 실제로 그만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판타지를 가미하기도 해요. 평소에 보여지는 모습, 인터뷰 때 제가 풀어놨던 말들에 가산점이 많이 부여되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보다 그렇게 넓고 깊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렇게 긍정적으로 바라봐주는 시각이 저로 하여금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주더라고요. 저를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는 이들과 제가 굉장히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서로 같이 잘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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