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비통의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로 버질 아블로가 임명된 순간, 패션 필드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파리의 루이 비통 본사. 버질 아블로의 새로운 스튜디오에 초대 받았다. 데뷔 쇼는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틀리에가 날카롭고 뾰족한 에너지로 전쟁을 벌이고 있을 즈음, 아블로의 작업실은 마치 여름 바람에 실크가 나부끼듯 차분하고 침착했다. 선즈 오브 케멧(Sons of Kemet: 영국 재즈 팀)의 새로운 노래가 흘렀고, 트레이닝 수트와 캡으로 무장한 쿨한 젊은이들이 행거 사이를 유유히 오갔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기도 했는데, 주로 패브릭 샘플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오피스 발코니에 자유롭게 기대어 있던 무리는 쇼 음악을 상의하고 있었다. 지금껏 겪은 전형적인 패션 하우스의 풍경과 가장 가까웠던 건 세련된 스태프 점심 메뉴 정도였다. 레어 로스트 비프와 완벽하게 자른 방울토마토, 발사믹을 뿌린 구운 양파(탄수화물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버질 아블로는 뻔한 것과 거리가 멀다. 스트리트 감성을 지닌 37세의 미국계 흑인 디자이너. 그는 패션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도 없다. 딱히 유난을 떨지도 않는데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무려 2천6백만 명. 이런 배경의 인물이 메이저 패션 하우스의 디렉터였던 적이 있나?
아블로가 스튜디오에 나타났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의 사이즈다. 예상보다 더 덩치가 컸다. 키가 적어도 190은 돼 보였다. 나를 발견한 그는 느릿하면서도 육중한 걸음으로 다가와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그의 미소는 따뜻했고, 경계심이 없었다. 이 시점에 어떻게 그토록 평온할 수 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 방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요. 사람들이 허락을 구하고 들어와야 하는 딱딱한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우린 팀이잖아요. 어쩌다 보니 제가 맨 앞에 섰고, 그래서 좀 더 책임을 갖고 일할 뿐이에요.”
아블로는 매우 영리하다. 사전 조사를 하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특히 작년 10월 하버드 대학에서 그가 ‘창의성’을 주제로 강연한 영상을 흥미롭게 봤다. 자신의 일과 목표를 정확히 알고 추진하는 사람들에겐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다. 아블로에게서도 그런 표정과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다 말하지 않지만 확신에 찬 눈빛, 호기심이 가득하며 약간은 거만해 보이는 듯한 표정.
스튜디오에 마주 앉자마자 그는 새로운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바로 시작했다. 아직 질문도 하기 전이었다. “외부에 보여주는 건 거의 처음이에요. 엄청나죠? 마음속에서 줄곧 이런 타입의 컬렉션을 만들고 싶었어요.” 아블로는 일리노이식의 느린 말투로 리듬을 타며 말했다. “처음엔 이 세상에 없는, 아주 대단한 걸 내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곳에 조인하고 깨달았죠.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야겠다, 자연스러운 걸 해야겠다 하고요.”
아블로의 뇌는 항상 풀 가동 중이다. 이를테면, 질문을 받기도 전에 답을 말한다. 이건 예측할 수 없는 인터뷰이의 특징이다. 게다가 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테이블에 여러 색의 보드 마커가 담긴 박스가 있었는데, 아블로는 인터뷰 첫 1분 동안 그 마커들을 조금씩 꺼냈다가 다시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같이 서 있거나 쇼룸을 돌아다니며 얘기를 나누었다. 함께 옷감을 만지고 세부를 자세히 관찰했다. 대화의 주제는 마치 핀볼링 게임처럼 총알 같은 속도로 바뀌었다. 뒤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대충 이런 식이었다. 빛의 굴절에서부터 그것이 루이 비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컬렉션의 상당 부분이 <오즈의 마법사>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그 전에 이 부산스러운 패션 천재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리노이 록포드의 건축학도가 어떻게 세계의 가장 큰 럭셔리 브랜드 중 하나인 루이 비통의 남성복 디렉터가 된 걸까?
아블로는 가나의 이민자 출신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재봉사, 아버지는 페인트 공장의 매니저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창의적이었고, 부모는 이를 북돋웠다. 특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03년, 아블로는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에서 토목공학 학사 학위를 땄다. 이어 일리노이 공과 대학에서 건축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에 그는 오랜 친구이자 협업자인 카니예 웨스트를 만났다. 항간에선 아블로가 당시 카니예 웨스트의 매니저였던 존 모노폴리와의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졸업식에 불참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2009년부터 그의 패션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카니예 웨스트가 루이 비통 협업 스니커즈 라인을 발매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한 해. 같은 시기 아블로는 이지(Yeezy)와 더불어 LVMH 소속 브랜드인 펜디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거기서 마이클 버크(전 펜디 CEO이자 현 루이 비통 최고경영자)의 눈에 띄게 된다. “저는 버질 아블로와 카니예 웨스트가 스튜디오에 변화를 일으킨 방식이 상당히 인상 깊어요.” 마이클 버크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버질은 메타포를 창조할 줄 알아요. 펜디 같은 올드 스쿨 브랜드를 묘사하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거든요. 그때부터 그의 커리어를 눈여겨봤어요.”
2012년엔 자신의 스트리트 웨어 브랜드인 파이렉스 비전을 소개한다. 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이윽고 2013년, 그는 오프 화이트를 론칭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스트리트 무드를 적극 반영한 컬렉션(스크린 프린트 스웨트 셔츠, 롱 후디, 패치워크 데님 진, 볼드한 페인트 스트라이프 데님 재킷 등이 등장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패션계에 자신의 이름을 빠르게 알렸다. 오프 화이트 2015 S/S 컬렉션을 두고 <보그 런웨이>에선 “아블로는 매우 활동적인 마인드를 지녔다. 거대하고 오래된 패션 하우스들 못지않게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라고 평했고, 2018 S/S 컬렉션에 대한 <쇼 스튜디오>의 리뷰는 다음과 같았다. “아블로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노력하고 성장하고 무르익어 간다. 그는 장벽을 부수고 소통을 시작했다.”
오프 화이트의 첫 5년 동안 아블로는 여러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다. 지미추, 나이키, 크롬 하츠 그리고 2019년에 공개될 이케아까지. 카니예 웨스트와 킴 카다시안, 나오미 캠벨, 드레이크 같은 쟁쟁한 셀러브리티가 그의 옷을 즐겨 입는다. 2015년엔 LVMH 프라이즈 디자이너 후보가 되었다. 상을 받진 못했지만 미국계 디자이너가 후보로 오른 것 자체가 대단했다. 최초였기 때문. 2017년엔 브리티시 패션 어워즈의 어반 럭스 어워즈를 수상했다. 이쯤이면 그가 루이 비통에 영입된 사실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가장 태연했던 건 아마 버질 아블로 자신일 지도 모른다. 예전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메이저 패션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고 싶다는 야망을 밝혔다. 그에게 당시 언급했던 ‘메이저 패션 하우스’가 루이 비통이었냐고 묻자 그는 과장을 더해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여러 기회가 찾아왔어요. 하지만 루이 비통이야말로 정상 중의 정상이라고 생각했죠. 깊은 역사와 거대한 아카이브를 지녔다고 해서 다 같은 레벨은 아니니까요.”
이미 잘 알려져 있듯, 아블로의 임명 소식은 그 자체로 굉장한 이슈였다. 논쟁의 핵심은 스트리트 웨어에 다소 치우친 그의 디자인이 아니라, 164년의 역사를 지닌 럭셔리 브랜드에서 미국계 흑인을 택했다는 점이다. 미국계 흑인이 LVMH 브랜드의 왕좌에 오른 건 유래 없는 일이다.(가나계의 영국인인 오즈왈드 보탱이 2003년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잠깐 맡은 적이 있지만 그는 새빌로의 테일러였다.) 그것도 LVMH 레이블 중 가장 수익률이 높은 루이 비통이다. 루이 비통은 LVMH 그룹 수익의 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작년에 올린 수익만 25억 파운드에 달한다.
“LVMH의 회장이자 CEO인 아놀드, 모든 루이 비통 패밀리가 저를 따뜻하게 받아주어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해요.” 아블로의 눈엔 진심이 어렸다. “배경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제 작업과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준 거니까요. 그것이 새로운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죠. 지금 같은 시대에 이건 매우 파격적이고 의미 있는 결정이에요.” 아블로는 계속해서 말했다. “제게 이것은 희망이에요. 더 다양하고 열린 세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희망.”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를 개척자라고 생각할까? “대단히 자랑스러워요. 이런 변화가 제게 힘을 줘요. 제 커리어의 명분이기도 하고요.” 아블로는 감격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앨라배마에 사는 어떤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그릴 때 형편이나 현실에 부딪혀 타협하지 않았으면 해요. 자신이 열정을 가진 분야의 정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걸 저를 통해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 그 점에서 강한 자부심을 느껴요. 그래서 하버드에서 강연도 한 거예요. 유명세를 얻거나 제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신호등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하는 거죠. 자신의 작업과 행보가 어떤 파급력을 가지는 것, 모든 예술가와 크리에이터가 한결같이 바라는 것 아닐까요?”
전임자인 킴 존스가 이룩한 엄청난 이윤을 유지하고, 나아가 그걸 넘어서는 것이 아블로에겐 큰 부담일 것이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이런 부담을 안고 살지만 아블로의 경우 강도가 더 세다. 그는 오프 화이트 컬렉션을 계속 선보일 계획이며 ‘플랫 화이트’란 이름으로 활동 중인 디제잉도 그만둘 생각이 없다. 내년엔 자신의 작업을 회고하는 전시도 연다.(시카고에서 열릴 예정.) 그는 할 일이 너무 많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가 일주일에 3일만 트레이닝할 순 없잖아요. 쉬는 날 늘어지고 먹고 싶은 걸 다 먹는다면 국가 대표가 될 수 없죠. 저는 지금 세대를 대표하고 싶어요. 각 세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이 있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지금 하는 일을 하나도 버릴 수 없어요. 영감을 주는 분야라면 무엇이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작업에 깊이가 생기니까요. 지금은 각 파트에 나름 시간을 잘 나눠 쓰고 있어요.”
컬렉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요.”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컬렉션을 싫어한다면 다시 생각해볼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해석한 어떤 맥락에 따라 아주 신중하게 컬렉션을 구성하고 있어요. 현실을 반영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다듬어요. 최고의 버전이 될 수 있도록.” 또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어요. 옷을 만드는 과정, 문화적인 배경도 다르죠. 어떤 사람들에겐 제 컬렉션이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무서워서 저를 포장하고 싶진 않아요.”
아블로의 몸가짐이나 태도는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 어떤 것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거만함이라기 보단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가까웠다. 한 번이라도 불안을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halo(후광)’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쿨한 아우라. 그리고 이런 에피소드를 덧붙였다. “언젠가 백 명만 들어갈 수 있는 쾰른의 클럽에서 디제잉을 한 적이 있어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전 이렇게 생각했죠. 그 백 명이 ‘저 사람은 옷도 만들고 슈즈도 만들고 디자인도 해. 그런데 디제잉도 정말 잘해. 최고의 밤이었어’라고 느낄 거라고요.” 그가 빙긋 웃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불안할 게 대체 뭔가요? 삶은 어렵죠. 하지만 패션은 그렇지 않아요.”
그를 만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고, 남성 패션 위크를 취재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목요일에 열린 아블로의 첫 컬렉션 그리고 토요일에 열린 킴 존스의 디올 데뷔 컬렉션까지. 2019 S/S 시즌 맨즈 위크의 중요한 주말이다. 공기마저 떠들썩한 기분.
팔레 루아얄 정원에 마련된 루이 비통 런웨이는 경계를 지운 무지개 빛깔로 빛났다. 오렌지, 옐로, 형광 그린 그리고 화이트. 런웨이는 무척 길었다. 뙤약볕 아래 모델들이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스탠딩 구역엔 파리의 다양한 대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가득했다. 모두 아블로의 초대를 받았다.
기분 좋은 흥분이 무르익은 가운데 셀러브리티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나오미 캠벨과 킴 카다시안, 리하나가 자리에 앉았다. 아블로의 은인이자 절친인 카니예 웨스트도 물론. 사운드 트랙은 루이 비통의 새로운 뮤직 디렉터인 벤지 B가 맡았다. 그중엔 카니예 웨스트의 곡도 포함됐다.
쇼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건 초반에 등장한 17명의 모델이 모두 흑인이란 사실. 조금 나아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패션 브랜드가 유색 인종 모델에게 냉담하다. 그래서일까. 버질 아블로의 흑인 모델 군단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다른 브랜드가 아닌 루이 비통의 런웨이란 점에서 더더욱.
상당수가 전문 모델이 아니라는 것 또한 주목할 만했다. 뮤지션 에이셉 내스트, 아티스트 블론디 맥코이, 래퍼 키드 쿠디, 스케이트보더 루시안 클라크 같은 이들이 바로 그 예.
이 쇼는 아블로가 발표한 일종의 선언문이다. 기존 런웨이에서 고수하던 암묵적인 룰을 깼다는 뜻. “루이 비통의 런웨이란 플랫폼은 영향력이 굉장히 커요. 바깥세상으로 끊임없이 울려 퍼지죠. 그것도 아주 초고속으로요.” 인터뷰 당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이곳을 제 놀이터 정도로 생각하지 않아요. 모델 역시 옷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인격체로 여기고요. 17명의 인물은 모두 흑인이지만 그보다 훌륭한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중요해요. 제 친구들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더했다. “이번 쇼를 계기로 저는 업계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플랫폼을 갖게 되었어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아요. 실제로 변화를 일으킬 겁니다. 디자이너는 트렌드를 이끌 뿐 아니라 사회적인 이슈를 강조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위치란 뜻이에요. 이걸 이용해 스스로를 부각하고 인기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전 그런 것엔 관심이 없어요. 우선 이 플랫폼을 통해 미국계 흑인 남성 그룹이 주류로 올라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17명의 모델 군단이 그 메타포예요.”
무대 연출은 물론 옷도 기대만큼 훌륭했다. 화이트 울 모헤어 소재의 더블 재킷과 더블 플리츠 팬츠를 매치한 첫 번째 룩(세라믹 LV 로고 벨트와 큼지막한 크로커다일 프린트 가죽 키폴 백을 더했다)은 뒤이어 나올 것들에 대한 힌트를 던졌다. 이후 차례로 등장한 16벌의 옷은 모두 화이트. 컬렉션 구성에 깊이와 의도를 더한 아블로의 재능이 돋보인 대목이다.
마치 코튼처럼 움직이고 실크처럼 가벼워 보이는 타이다이 가죽 팬츠와 티셔츠 역시 인상적이었다. ‘중간 옷’이라고 부르고 싶은 새로운 형태의 액세서리도 있었다. 든다기보단 입는 개념에 가까운 러기지. 포켓이 주렁주렁 달린 가죽 하네스 시리즈도 눈에 띄었다. 다양한 패치로 마무리한 화이트 포플린 셔츠, 한쪽 소매를 하네스로 변형한 재킷도 매력적이었다. “제가 만든 새로운 옷이에요. 쉽게 말하면 중간에 껴입는 옷이죠. 우리끼리는 ‘액세사모포시스(액세서리 변태)’라고 불러요.” 아블로는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스타일링 팀이 만든 단어인데, 액세서리가 옷으로 변화한다는 뜻이에요.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처럼요.”
<오즈의 마법사>에서 영감을 얻은 옷도 있다. 1939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에서 도로시 역을 맡았던 주디 갈랜드(양귀비 밭에서 잠든 모습)를 프린트한 나일론 아노락 후디와 스타디움 점퍼가 그 증거. 도로시와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와 허수아비의 실루엣을 프린트한 보라색 자카드 크루넥 스웨터도 빼놓을 수 없다.
루이 비통의 아티스틱 디렉터가 된 것, 이 사실이 자신이 바라던 ‘오즈’라고 느낀 걸까? “너무 멀리 가셨네요. 알다시피 이 영화는 뜻밖의 여정을 보여줘요. 제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영화에 빗대었을 뿐이에요.” 그는 신중하게 말했다. “컬렉션의 토대는 프리즘이에요. 그런 맥락에서 무지갯빛 시스루 백 같은 액세서리가 나온 거죠. 가방 안으로 빛이 들어오거나 굴절되며 루이 비통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의미예요. 좀 더 설명해볼까요? 하나의 빛(화이트), 그다음엔 생동감 넘치는 색이 등장해요. 폭발적인 타이다이 피스들이 이 파트에 해당하죠. 마지막은 <오즈의 마법사>가 장식하고요.”
자세한 설명을 듣자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그는 깊고 풍부한 리서치를 토대로 빈틈없이 촘촘하게 컬렉션을 구상한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은 대체 누굴까? “마크 제이콥스가 그중 한 사람이죠. 그가 있던 자리에 제가 앉아 있다니 정말 비현실적이에요.(마크 제이콥스는 1997년부터 2013년까지 루이 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다.) 피비 필로는 지금 세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해요. ‘모던 패션’의 정수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죠.” 그는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그녀의 작업은 말 한마디 없이도 굉장히 분명해요. 요즘 디자이너 중 이렇게 확고한 스타일을 창조한 인물이 또 있을까요? 거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수준이죠. 팝 컬처의 인물도 제겐 중요해요. 퍼렐, 카니예 웨스트 같은 사람들요. 브랜딩, 유럽 시장 등, 제 영역 밖의 것을 일깨워준 게 바로 그들이거든요. 그리고 슈프림의 제임스 제비아, 칼 라거펠트.”
컬렉션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피스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몹시 망설였다. 하지만 답을 피하진 않았다. 우선으로 꼽은 건 타이다이 가죽 피스들. “저지 소재뿐 아니라 가죽에도 화려한 염색을 시도했어요. 특히 수작업으로 물들인 가죽 바지는 아주 절묘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입고 싶은 옷이에요.”
다음으로 고른 건 잔잔한 피스타치오 색깔의 얇은 실크 셔츠다. 그는 완벽한 각도로 잘린 셔츠의 칼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포멀 웨어에서 자주 활용하는 디테일이에요.” 그다음은 아주 밝은색의 헤비 웨이트 티셔츠. 나 역시 너무 탐이 나서 한 장 가져도 되겠냐고 조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기본적이면서 품질이 좋은 티셔츠를 만들고 싶었어요. 옷장에 하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티셔츠 말이에요.” 아블로는 티셔츠를 들어 올려 볼드한 무지갯빛 타이다이 패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묵직하고 드라이한 소재예요. LA 최고의 빈티지 숍에서 온 것 같지 않나요? 부담 없고 기본적인 아이템을 만드는 것 역시 제겐 중요해요. 물론 전통적인 테일러링 수트도 제작하죠. 하지만 이런 건 제가 개인적으로 원하던 거예요. 명품 매장에서 쇼핑할 때마다 이렇게 클래식한 물건이 빠져 있다고 느꼈거든요.”
루이 비통의 물건이 비싸다는 건 누구나 안다. 7백 파운드가 넘는 운동화, 2천 파운드에 이르는 보스턴백을 척척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아블로의 의견은 어떨까? 그가 닿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루이 비통의 가격이 꽤 부담스럽다는 사실을 우려했을까? “장인 정신과 품질을 따진다면 이 숫자가 터무니없는 건 아니라고 봐요. 저 역시 루이 비통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걸 살 수 없었어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가치랄까, 매력이 분명 있어요.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열망이 피어나죠. 제게 직업적 윤리 의식을 불어넣어주기도 해요. 값어치를 하려면 그만큼 잘 만들어야 하니까요. 이렇게 마무리하죠. 루이 비통 가방이 이렇게 비싸지 않다면 저는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만나기 3주 전, 그러니까 자신의 데뷔 컬렉션 한 달 전, 그는 시카고에서 파리로 이사했다. 아블로는 현재 생제르망 데프레 거리에 있는 집에서 아내 섀넌과 아이들(로베와 그레이)과 함께 지낸다. 그는 1년 평균, 출장으로만 35만 마일을 오간다. 엄청난 스케줄이다. 가족과의 생활과 일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냐고 묻자 그는 특유의 낙관적인 태도로 말했다. “저는 항상 여러 곳에서 살았어요. 일주일 동안 같은 도시에 머물지 않는 스타일이죠. 지금 제 위치에선 처리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예를 들어, 빠질 수 없는 행사 때문에 중국에 가야 하는데, 뉴욕에서 열리는 멧 갈라와 CFDA에도 참석해야 하는 식이에요.” 대체 쉬긴 하는 걸까? 어떻게 이런 삶을 유지할까? “제겐 일이 휴식이에요. 뭔가 만드는 것이 행복해요. 그러니까 통상적인 의미의 휴식이 제겐 행복의 반대인 거죠. 건강한 삶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블로는 웃었다.
숨 가쁜 인터뷰를 끝내고 그는 쇼 음악을 짜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세상에서 제일 바쁜, 패션계의 가장 핫한 남자 버질 아블로. 그날의 맛있는 스태프 런치라도 즐겼길 바란다. 그의 스케줄에 음식을 위한 시간이 있을지 확실친 않지만.
- 에디터
- Teo van den Broeke
- 포토그래퍼
- Christophe Meimoon
- 사진
- Splash News, Gettyimageskorea, Jason Lloyd-Ev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