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시계를 보지 않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연말 같은 것.
잘 못 보던 와인과 치즈
와인과 치즈는 클래식한 조합이지만 막상 파티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려니, 세 번째 보는 재방송처럼 재미없는 페어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와인을 좀 신선하게 바꿔보는 건? 와인과 치즈의 페어링을 좀 더 과감하게 해보는 건? 몇 가지 변화만으로도 ‘와인과 치즈’는 다시 새로워질 수 있다. 파티 기분을 내기 위해 와인잔을 개츠비가 썼던 그 동그란 쿠프 글라스로 바꿔보는 것도 좋겠다. 가장 좋아하는 꽃을 꽃병에 정처 없이 꽂아본다. 클래식이 한층 더 흥겨워지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도멘 파리고 크레망 드 부르고뉴 2013 샴페인과 같은 품종, 같은 방식으로 와인을 만드는 이름난 부르고뉴 크레망. 피노누아와 샤르도네가 가장 잘 자라나는 명산지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웬만한 샴페인에 뒤지지 않는 품질을 자랑한다. 질감이 섬세해 브리아 사바랑과 같은 크리미한 연성 치즈와 잘 어우러진다.
앙리부르주아 상세르 레바논 2017 루아르 상세르 지방에서 생산되는 소비뇽 블랑은 염소 치즈와 교과서적인 궁합을 이룬다. 앙리부르주아는 지역을 대표하는 최고의 생산자로 치즈는 샤브루, 크로탱 드 샤비뇰과 황홀한 시너지를 낸다. 흰 꽃, 감귤류의 섬세한 아로마와 미네널러티가 복합미를 더한다.
도멘 기베르토 레 물랑 2016 잘 만든 루아르 슈냉 블랑의 정석과 같은 와인. 브리오슈, 너트류의 부드러운 오크 터치가 살짝 느껴지면서도 풍부하고 순수한 과실 향을 담뿍 담고 있다. 샤프한 스타일로 샤브루와 같은 숙성하지 않은 치즈와 곁들이면 좋다. 캄파로 바롤로 2012 더블 디켄팅을 해도 쉽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바롤로는 파티 무드에서 볼이 넓은 잔으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레드 와인이다. 붉은 과실, 커피, 시가, 바닐라, 장미꽃 등 한번 만개하고 나면 더없이 화려한 향을 자랑한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묵직한 와인으로 콩테,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와 같은 경성 치즈와 잘 어울린다.
필리터리 아이스 와인 리저브 2014 짭짤한 치즈와 디저트 와인은 ‘단짠’의 규칙에 딱 들어맞는 마성의 조합. 생치즈에서 블루 치즈까지 종류와 관계없이 두루두루 잘 어울린다. 프랑스 정찬의 디저트 코스에 왜 치즈와 달콤한 와인을 늘 페어링했는지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최고량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만 만든 리저브 와인으로 20퍼센트는 프렌치 오크통에서 숙성해 남다른 깊이감을 보여준다. 잘 익은 서양배, 리치, 시트러스, 복숭아와 살구, 열대 과일을 비롯해 토스티한 풍미가 더해져 복합미를 자랑한다.
물랑 드 가삭 피노누아 2017 ‘랑그독의 그랑크뤼’, ‘남프랑스의 라피트 로칠드’ 등으로 불리며 스타덤에 오른 마스 드 도마스 가삭이 만드는 피노누아. 잼이 아닌 섬세한 레드베리 아모라와 신선한 산도가 특징이다. 부르고뉴에서 생산되는 워시드 치즈인 에푸아스와 함께하면 피노누아의 바디감이 상승하고 짜고 향이 강한 치즈의 강렬함을 중화시켜준다.
그랜트버지 코리턴 파크 카베르네 쇼비뇽 2012 좋은 카베르네 쇼비뇽이 갖추어야 할 모든 덕목을 지녔다. 놀라운 깊이와 복합성을 지닌 와인으로 블랙커런트, 담배, 민트, 블랙베리와 체다치즈를 연상시킨다. 카시스, 플럼과 같은 겨울 과일의 풍미에 우아하고 보드라운 타닌이 잘 어우러진다. 떼뜨 드 무안과 같은 반경성 치즈와 페어링하면 입안에서 훨씬 다채로운 질감을 체험할 수 있다.
주스티노스 마데이라 보알 미디엄 미디엄 스위트의 주정 강화 와인으로 숙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열기가 술에 닿는 칸테이로 방식으로 만들었다. 덕분에 매력적인 산화 아로마와 풍부한 부케를 가득 품고 있다. 단박에 단호박이 떠오르는 첫 노트를 필두로 스파이시한 향신료, 말린 과일, 너트 등의 다채로운 아로마의 향연이 펼쳐진다. 대부분의 치즈와 잘 어울리며 블루 치즈와 같은 강렬한 치즈와도 자연스럽다.
위스키와 꽤 경쾌한 안주
위스키는 독한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술, 식사를 모두 마치고 한잔 마시는 식후주로만 한정 짓지 말자. 그러기엔 너무나 향긋하고, 향의 결도 다양하니까. 여러 사람이 모인 파티 자리에 위스키를 곁들이려면, 작고 캐주얼한 잔에 서브해본다. 위스키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스테이크나 채소 볶음처럼 불맛이 느껴지는 메뉴이지만, 조금 더 경쾌한 요리도 충분히 잘 어울린다. 주재료, 채소 사이드, 좋아하는 견과류나 스파이스, 가니시용 허브. 이 네 가지 조합을 잘 맞춘다는 생각으로 메뉴를 짜본다. 불을 강하게, 소금은 아낌없이.
관자, 옥수수, 셰르물라, 고수 잘 달군 팬에 관자를 앞 뒤로 잘 지져둔다. 코리앤더 시드 가루, 파프리카 가루, 큐민 가루를 2:2:1 비율로 섞은 뒤 버터와 다진 마늘을 함께 녹인 팬에 붓는다. 캐러멜색이 될 때까지 약한 불에서 젓다 옥수수를 넣고 팬을 휙휙 돌려주고 접시 위에 쏟아낸다. 관자와 고수를 올린다.
돼지고기 안심, 느타리, 호두, 이탤리언 파슬리 안심은 실로 묶어 프라이팬에 겉면을 익힌 다음 175도 오븐에 20분간 익힌다. 녹인 버터에 듬성듬성 찢은 느타리를 넣고 다진 마늘과 함께 볶는다. 진한 갈색이 될 때까지 약 10분 동안 팬을 휙휙 돌리며 익힌다. 접시에 붓고 동그랗게 썬 안심을 올린다. 마지막에 볶은 호두와 이탤리언 파슬리를 더한다.
글렌로시스 위스키 메이커스 컷 글렌로시스는 통통한 병이 시그니처로 지난해 애드링턴 그룹이 글렌로시스의 소유권을 획득하면서 ‘셰리’의 DNA가 이식되었다. 글렌로시스의 솔레오 컬렉션 중에서도 ‘위스키 메이커스 컷’은 가장 돋보이는 신생아다. 퍼스트필 셰피 오크통의 기운을 생생하게 머금었다.
아벨라워 아부나흐 싱글 몰트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벨라워의 이름을 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아부나흐는 높은 알코올 도수보다도 더 강력한 향의 펀치가 있는 위스키다. 진한 색깔만큼이나 코를 슬쩍 들이대면 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달달한 향이 확 퍼진다. 셰리 캐스크의 스파이시한 기운이 깔끔하게 뒤를 받쳐준다.
샐러드로만 꽉 채운 식탁
파티에 사람을 불러놓고 집주인이 부엌에만 붙어 있는다면, 그 파티는 금방 김이 샌다. 파티 음식은 간편하게 후르륵 차릴 수록 좋고, 그래서 파티에 의외로 잘 어울리는 음식이 바로 샐러드다. 재료 손질을 미리 다 끝내두고, 마지막에 드레싱만 잘 버무리면 완성이니까. 게다가 너무 무겁지 않은 이 음식이 파티의 진짜 주인공인 술을 더 넓고 깊게 마시도록 도와준다. 차갑게 식어도 상관없으니 파티의 밤을 더 길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여러 가지 채소와 허브의 궁합을 파악하려면 레스토랑 ‘빌즈’의 샐러드를 뜯어보면 된다. 풍성하고 맛있는 교재다.
벅윗 샐러드 깐 메밀, 퀴노아, 비트, 새싹 채소, 견과류, 아보카도, 수란, 고수, 매콤한 하리싸 소스, 플레인 요구르트가 들어간다. 파프리카를 넣고 만든 매콤한 하리사 소스의 이국적인 향과 수란이 만나면 입 안에서 감동이 시작된다.
찹 샐러드 그린빈, 주키니, 양배추, 바삭한 병아리콩, 오이, 비트, 체리 토마토를 양껏 넣고 시트러스 참깨 드레싱으로 채소들을 버무린다. 가지각색 채소를 새콤하면서도 고소한 드레싱이 잘 묶어준다. 튀긴 병아리콩과 견과류는 샐러드에서 고소한 맛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치킨 시저 샐러드 로스티드 치킨, 엔다이브, 깻잎, 로메인, 적양파 피클, 빌즈 시저 드레싱. 기본적인 시저 드레싱에 미소 된장을 더해 안초비의 맛이 채소와 좀 더 둥글게 어우러지도록 신경 썼다. 일본의 시치미 양념으로 매콤한 맛을 살린 닭다리 구이는 양껏 넣으면 든든한 한 접시가 된다. 적양파 피클과 깻잎이 맛의 이름을 더한다.
연어 샐러드 팬에 구운 연어, 자몽, 그린빈, 고수, 민트, 오이, 구운 코코넛, 칠리 캐러멜 드레싱. 촉촉하게 구운 연어를 준비하고 동남아 느낌이 물씬 나도록 피시 소스로 만든 베트남 드레싱과 칠리 캐러멜 드레싱을 함께 뿌린다. 껍질을 벗긴 자몽이 샐러드에 선명한 색을 더하고, 신선한 고수는 소스의 맛을 살린다. 빌즈에서 이제 막 판매하기 시작한 호주산 하우스 로제 와인과 찰싹 붙는다.
캐비아와 눈부신 파티
세계 3대 진미라는 말은 이제 좀 바랬다. 푸아그라는 동물 복지 차원에서 거부하는 이가 많고, 트러플은 요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도 사용할 만큼 흔한 식재료가 됐다. 그럼 캐비아는? 여전히 고급스러운 이미지는 간직한 채, 여전히 알고 싶은 식재료라는 환상 속에서, 조용히 영역을 더 넓혀가고 있다. 덕분에 그저 모양으로만 인지하던 캐비아의 진짜 ‘맛’을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 국내산 양식 캐비아도 유통되고 있어 한우 구이에 캐비아를 더하는 식으로 활용도도 넓어졌다. 무엇보다 눈부시게 화려한 파티에선 여전히 캐비아가 작지만 존재감을 뽐낸다.
볼랭저 R.D. 최소 9년 이상의 장기 병 숙성 후 출시 직전 데고르주망 Dégorgement 한 와인. 100%
오크 배럴에서 발효시켜 섬세하면서도 힘차고 강렬하다. 피노누아 66퍼센트, 샤르도네 34퍼센트 블랜딩으로 미라벨과 오렌지 마멀레이드, 당 절임한 과일의 향연이 펼쳐지며 산도가 선사하는 날카로운 면도 있다. 구조감이 남달라 캐비아, 해산물을 비롯해 가금류에도 밀리지 않는다.
브루주아 디아즈 엠 뮈니에르 엑스트라 브륏 피노 뮈니에 100퍼센트의 블랑 드 누아 샴페인. 내추럴 와인이라 생산량마저 적은 희귀한 아이템이다. 천연 효모가 선사하는 구수한 아로마와 날카롭게 다가오는 산도의 기운에서 이중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러시안 캐비아 하우스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캐비아 회사다. 규모가 큰 만큼 고품질의 캐비아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생산지는 러시아 북쪽 지역이며 오세트라 캐비아를 만든다. 전체 생산량의 90퍼센트가 자국에서 소비되고 있고, 크렘린궁으로도 납품된다. 캐비아를 한 입 떠 먹으면 크림처럼 매끄러운 질감이 먼저 느껴지고, 두번째 부터는 헤이즐넛 향과 견과류의 고소한 맛도 느껴지기 시작한다. 캐비아와 샴페인은 검증된 조합이다. 러시아 현지에서는 작은 잔에 따른 보드카를 한입에 털고 손등 위에 캐비아를 올려 먹는 게 정석이다. 퍼먹을 때는 쉽게 산화되는 금속 숟가락 대신 자개로 만든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거친 스테이크와 단순 명료한 칵테일
연말에 단 한 접시, 작정하고 요리를 한다면 스테이크다. 두툼한 고기 한 덩어리로 여러 사람의 환호를 받는 한 접시를 뚝딱 만들 수 있다. 물론 집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찰 수도 있고, 재료비가 예산을 훌쩍 초과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다행인 건 요리는 라면만큼 쉽고 빠르게 끝난다. 상온의 스테이크를 후추를 잔뜩 갈아둔 접시 위에 한번 굴린 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센 불에 팬을 데우고 겉을 지지면 된다. 이 스테이크에 한 가지 새로움을 더한다면 칵테일이다. 셰이커와 큰 얼음을 구비하고 요리를 준비하듯 몇 가지 재료를 체크해둔다.
레드 콘서트 파티를 위해 한 번쯤 공들여볼 만한 칵테일로 김지현 바텐더가 이름을 붙였다. 보드카 한 병에 레몬, 오렌지 등의 껍질(흰 부분은 모두 제거)을 넣고 하루 이틀 상온에서 우린다. 셰이커에 시트러스가 우러난 보드카를 45밀리리터 넣고 백자몽 리큐르 10밀리리터, 캄파리 5밀리리터, 코앵트로 5밀리리터, 생자몽즙 15밀리리터를 넣는다. 얼음과 함께 셰이킹을 한 뒤 잔에 부으면 그간 집에서는 보지 못한 근사한 한잔이 완성된다.
X-마스 모히토 기존 모히토 칵테일 레시피에 장식 하나를 더해 특별함을 살렸다. 노무라 혹은 루모라라고 부르는 허브인데, 잔에 꽂는 순간 칵테일이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로 보인다. 라임 반쪽에 설탕과 앙고스투라 비터를 살짝 뿌리고 토치로 그을린 뒤 가니시로 올려도 좋다.
맨하탄 라이 위스키, 스위트 베르무트, 앙고스투라 비터로 완성하는 클래식 칵테일이다. 묵직하게 혀를 눌러주는 맛이 거칠게 구운 스테이크와 잘 어울린다. 와인보다 더 깔끔하게 입 안을 환기시키고 맥주보다 더 후끈하게 열기를 끌어올린다.
러스티네일 스카치 위스키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이보다 더 쉬운 칵테일이 없다. 잔을 꽉 채우는 큰 얼음을 하나 준비하고 위스키 45밀리리터와 꿀 리큐르인 듀람브이 15밀리리터를 넣는다. 무거운 얼음과 잔 사이에 스터를 넣고 몇 바퀴 돌려서 음료의 온도를 맞춰주면 끝이다.
- 에디터
- 손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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