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빅뱅의 초기 앨범을 듣는 것은 고전파 취향쯤으로 분류한다던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트리뷰트의 대상이 되는 데뷔 9년 차 아이돌에 대해 얘기하려니 어쩔 수 없이 역사를 돌이키는 자의 예의를 갖추게 된다. 나는 2007년 2월 원더걸스의 데뷔 무대를 녹화 현장에서 목격했다. 당시 여성 아이돌 시장은 빅스타없는 일종의 공백기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 아이러니 > 무대를 본 나는 당장 거물이 등장했음을 알아차렸다. 특히 열다섯 살이 된 멤버들은 그야말로 미래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현아는 아주 독특한 에너지와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야생마’라는 별명으로 통할 정도로 날것의 매력이었다. 소희 또한 기존에 없던 신유형의 미인이었다. 지금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 ‘쌍꺼풀 없는’ 미인형 얼굴의 최초 지표였다. 그중에는 선미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랑스러운 미소녀가 의외의 발성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인상밖에 받지 못했다.
그해 원더걸스는 ‘텔미’의 빅히트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현아는 그전에 이미 사라졌고, 소희는 ‘국민 여동생’이 되었다. 선미는 여전히 잘 웃고 순한 얼굴을 한 소녀였다. 언뜻 그늘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퍽 명랑해서 소희의 우울한 느낌과 종종 대비되는, 그때까지는 그게 전부였다. 보아를 보고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경북 경주 출신의 ‘얼짱’, 자칭 ‘순수천사’였다는 소녀 말이다.
원더걸스는 9년 동안 질곡의 시간을 이어 온 아이돌이다. 그중 선미의 커리어는 기이하기까지 하다. 선미는 원더걸스가 미국으로 진출한 지 얼마 안 되어 2010년 1월 활동 중단을 발표했다. 학업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곧장 납득 하기는 어려웠다. 이후 원더걸스의 새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선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열다섯 살에 데뷔해서 단숨에 전성기를 누리고 여전히 십 대의 나이로 그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삶일까. 3년 후 선미는 솔로 가수로 돌아왔다. 떠날 때처럼 별반 설명도 없이 계속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24시간이 모자라’와 ‘보름달’로 이어지는 활동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예전에 다소 희미하게 보였던 선미는 자신의 오랜 동료들과 비견될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은 커리어로 대중 앞에 나타나 있었다.
K-POP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수명이 연장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성 아이돌의 유효기간은 짧다. 연장되었다는 그 수명도 국내에서 인기를 이어간다기보다는 해외 시장에서의 지지도가 반향된 데 가깝다. 그런데 선미는 성공적인 솔로 활동 이후 또 ‘난데없이’ 원더걸스에 합류해 자신의 커리어를 재차 일신했다. 원더걸스 합류 이후로는 솔로 활동의 다음 단계로 팀과 자연스레 조화를 이뤘고, 지금은 확고부동하게 팀의 인기를 추동하는 주역이며, 어엿한 싱어송라이터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선미는 지난 시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원더 걸스)는 잘해왔다”고 잘라 말했다. 선미는 지금껏 자신의 공백과 컴백과 기타 모든 과정에 대해 축축한 설명이나 심경 고백 따위를 한 적이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한 단계씩 거치며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발견해왔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에서 여성 연예인이, 아이돌이 생존하기 위해 어떤 고역을 겪어야만 하는지 보아온 모든 사람에게 선미의 유유한 행보는 그 자체로 퍽 신화적이다. 지금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감탄하게 만드는 끊임없는 부활의 과정이다.
지난 7월에 발매된 원더걸스의 ‘Why So Lonely’는 꽤나 긴 시간 동안 차트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관심을 요구하는 듯한 가사와는 영 다른 내용의 뮤직비디오가 재미있다. 공개 직후 바로 전방위적 화제가 된 이 뮤직비디오에서 멤버들은 감히 손을 쳐든 멍청한 인형 남자를 시원하게 응징해 트렁크에 처넣고는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다. 선미는 입에 물고 있던 성냥개비에 불을 붙인다. 조금도 상냥하지 않은 냉소적인 눈으로.
한국에서 여성 가수가 보여주는 ‘섹시’라 는 콘셉트는 오로지 남성의 시각과 취향에 맞추어진 타자화된 육체와 수동적 제스처의 총체로서 소비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섹시한 여성 가수들은 무대 위에서 공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뒤, 무대 아래에서는 애교를 선 보여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굉장히 안전한 유혹, ‘말을 걸면 대답해 줄 것 같은’ 친절로 포장되곤 했다. 가슴과 엉덩이를 동시에 보여주기 위한 곡예적 자세를 취한 채 남성 소비자를 향해 수줍게 손을 내미는 포즈가 그들에게 요구되는 단적인 답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섹시’가 그런 것이었을까. 많은 남성 스타에게서 발견되며 또 몇몇 여성 스타 역시 관철시키고 있는 성적 매력의 기본은 자기애와 통제력이다. 자신의 육체와 성적인 매력을 한껏 만끽하는 모습, 그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자기만족을 거리낌없이 발산하는 것 이다. 육체가 가진 매력과 힘을 권력처럼 과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비욘세 사진 밑으로 “뚱뚱하다”는 댓글이 달리는 곳이다. 원초적 에너지로서의 성적 매력은 잘 통하지 않는다. 몸 안에서 솟구치는 에너지에 휩쓸린 자신만만한 모습보다는 ‘하반신이 탈수기에 들어간 듯한’ 각종 교태 어린 동작들이 안전하게 ‘섹시’ 의 범주를 구획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선미의 ‘24시간이 모자라’와 ‘보름달’은 어디에도 위치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기존의 십대 아이돌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섹스어필을 전면에 내세운 듯 했지만, 일말의 아양과 교태가 없다. 이 콘셉트는 선미의 특질에 맞춘 변종적 페티시에 가깝다. 선미는 신경질적으로 깡말랐고 체격도 작다. 한 눈에 쉽게 이해되는 성적 매력을 표현하는 육체가 아니다. 선미는 거기서 자신을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에게 걸맞은 예민하고 위태로운 자아도취를 몇 가지 코드로 변환해서 입었다. ‘24시간이 모자라’에서는 단발머리와 맨발, ‘보름달’에서는 창백한 피부와 새빨간 립스틱 등을 선택했고 이러한 요소들을 냉랭한 무표정이 최종적으로 봉합시킨다. 물론 노골적일 만큼 성적인 함의를 담은 동작이 많았다. 그러나 앞서의 이유들로 인해 선미가 최종적으로 전시하는 무대는 남성의 시선에만 봉사하는 것을 넘어선다. 결국 선미는 표준화된 성적 매력을 소비하는 남성보다는 코드를 이해하고 거기서 매력을 발견하는 눈 밝은 여성들에게 더 강력하게 소구한 것 같다.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온갖 풍파를 뚫고 살아남은 데뷔 9년 차 선미는 무대 밖에서 몹시 견고한 태도를 보여준다. 팬들과 함께 있는 자리일 땐 여전히 밝고 명랑하며 잘 웃는 모습이다. 그러다 뮤직비디오로 돌아가면 거의 웃지 않는다. 타들어간 성냥개비를 툭 뱉을 뿐이다. 아름답고 섹시하지만 어리광을 부리거나 교태를 떨지 않는다. 이제 스물넷, 선미는 드물게도 ‘성인 여성’이다.
- 에디터
- 장우철, 손기은, 정우영, 유지성
- 글
- 박호(자유기고가)
- 일러스트레이터
- 이자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