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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방, 여자의 발

2012.06.12유지성

구두가게에서 일하는 남자는 여자의 발이 좋았다. 가슴보다 더.

남자의 침대엔 베개가 많았다. 호텔도 아닌데, 한 침대에 베개가 네 개나 있을 이유가 있나? 여자는 침대 위에 베개가 두 개인 사람은 믿지 말라고 배웠다. 어젯밤엔 또 누가 다녀갔을지 모른다. 이 남자는 두 개가 더 있었다. 베개를 양팔에 끌어안고 잘 만큼 외로운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둥글고 곧은, 등받이가 없는 의자였다. 남자는 역시 동그란 테이블을 침대 근처로 당긴 후 의자에 앉았다.

“거기 앉아요. 이 의자 너무 불편해서.”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 침대에 앉자 갈라진 허벅지가 침대의 단면과 직각을 이뤘다. 이불이 곱게 개어 있어, 대신 베개를 하나 끌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베개가 왜 이렇게 많아요?”
“그런 용도로 쓰는 사람이 많아요.”

여자는 베개를 무릎 쪽으로 밀었다. 몇 번 잔다고 부끄러운 게 다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남자의 방은 처음이었다. 형광등 아래선 속살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세 번 만났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꽤 오래 걸었다. 점찍어둔 식당이 문을 닫은 탓이기도 했다. 여자는 발목이 욱신거렸다. 테이블 아래에서 발목을 빙빙 돌렸다. 날이 선선했지만 새 구두를 신은 탓에 속이 비치는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그 꼴이 섹시하기보단 좀 우스워 보여 여자는 남자에게 쓸데없는 말을 붙였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발목을 다치면 베개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자는 게 좋다. 발목을 심장보다 높은 곳에 두어야 붓지 않는다. 여자의 발목은 가늘고 길었다. 그래서 더 자주 아팠다. 당장 무릎 위의 베개를 침대에 올려 발을 척 걸치고 싶었지만, 남자는 아직 타이도 풀지 않았다.

“씻을래요? 미안해요 많이 걷게 해서.”

미처 갈아입을 옷을 챙겨오지 않아, 여자는 남자의 셔츠를 빌려 입었다. 여자는 침대로 올라가 다리를 쭉 뻗고 등을 기댔다. 키 큰 남자의 셔츠는 여자의 무릎만큼 내려왔다. 여자는 좀 더 편한 자세로 앉을 수 있었다. 뒤따라 씻고 나온 남자는 여자의 허벅지에 비스듬히 누웠다. 덜 말린 머리의 물기가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흘렀다. 남자는 밖에선 누구보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침대 위에선 꼭 여자의 다리 위에 누웠다“. 뒤에서 안아줘” 같은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여자는 그런 남자가 좀 귀여웠다. 어쩌면 혼자 있을 땐 사람만 한 베개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그런 채로 같이 TV를 보거나, 잠시 잠들기도 했다.

남자는 침대에서 시간을 오래 끄는 편이 아니었다. TV보단 음악을 켰고, 여자는 매번 첫 곡 이후론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여자의 무릎 쪽으로 내려갔다. 혀가 지나간 여자의 무릎이 반질반질해졌다. 정강이, 발목까지 내려갔을 때, 여자는 다시 올라올 남자를 위해 허리를 느슨히 빼고 몸을 눕혔다. 셔츠 안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어차피 곧 다시 씻어야 하니까. 남자의 머리는 점점 여자의 얼굴에서 멀어졌다. 발등… 발가락… 악! 남자의 혀는 발바닥을 훑더니 발뒤꿈치에서 멈췄다. 혀끝은 바짝 긴장해 있었다. 방금 씻은 여자의 발뒤꿈치는 평소보다 예민했고, 여자는 남자 혀의 돌기 모양까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겨드랑이에 코를 박고 있는 남자, 손가락을 빠는 남자는 있었지만, 이렇게 발을 사랑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다행히 여자는 성적 취향에 관대했다. 간지러웠지만 일단 참았다. 그런 취향이 있는 남자가 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 정도로 노골적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남자는 한참을 발밑에 더 머물렀다. 여자는 그 시간을 지스팟을 찾는 데 썼으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그보다 혹시 자기도 똑같이 해줘야 하는 게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긴 용무를 마친 남자가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고, 여자가 남자의 몸 위로 올랐다.

“저… 더 내려가요?”

남자의 양쪽 허벅지를 번갈아 오가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발은 여자보다 반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여자는 엄두가 안 났다. 남자는 다행히 여자를 번쩍 들어 배 위에 올렸다. 여자의 젖은 두 발이 침대에 끈끈한 흔적을 남겼다.
섹스가 끝나고 남자는 머리 대신, 발을 쓰다듬었다. 베개를 두 개 쌓아놓고 여자의 발을 올렸다. 베개의 용도는 확실했다. 쓰다듬다 말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남자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발을 보여주는 걸 섹스의 신호라 여긴 적이 있었다. 비 오는 날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에서 양말을 벗으면 남자들의 태도가 바뀌곤 했다. 남자를 처음 만난 날, 신발을 벗었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뭘 그렇게 자꾸 봐요?”
“240 정도 돼요? 40이 제일 좋은데.”
“35나 40. 아니, 어떻게 알아요?”
“일인데요 뭐.”

남자는 구두가게에서 일했다. 매일 수십 명의 여자에게 구두를 신겨줬다. 남자의 직업은 남자의 성적 취향과 긴밀히 닿아 있었다. 베개 위에 발을 올려놓은 여자는, 치과 의사 앞에서 입을 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의사에게 미처 발견 못한 충지가 있거나 치석이 많다는 소리를 들을 땐 얼굴이 화끈거렸다. “발에 티눈이 있네요”, “발톱 큐티클도 관리하는 게 좋아요”는 좀 더 민망하겠지. 다행히 여자의 발은 깨끗했다. 발뒤꿈치 각질도 자주 벗겨냈고, 풋크림도 꼼꼼히 발랐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일본 친구들에게 발뒤꿈치를 꼼꼼히 정리하는 법을 배웠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여자도 남자의 길고 탄탄한 발목을 보고 야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저 발목으로 얼마나 잘 뛸까, 저 발목으로 까치발이라도 든다면…. 탱탱하게 긴장된 남자의 긴 발목은 꽤 보기 좋았다. 연애할 땐 여름만 되면 남자친구에게 반바지를 입으라고 설득했다.

“그런데 왜 40이 제일 좋아요?”
“여자 키 170보다 168이 더 좋은 거랑 같아요.”

여자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여자는 하이힐을 자주 신었다. 굽이 10센티미터 이하인 구두를 신을 바엔 운동화를 신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쪽이었다. 힐을 신다 보면 발이 흉하게 변한다. 뾰족한 구두 모양처럼, 엄지발가락이 두 번째 발가락 쪽으로 쏠린다. 여자는 가끔 자기 발 모양이 돼지발처럼 못생겼다고 투덜거렸다. 이 남자는 그런 것도 알아보겠지? 여자들끼리의 은밀한 비밀이라 여겼는데…. 여자는 발가락을 꾹 움츠렸다.

생각해보면 구두를 사러 갈 때 긴 바지를 입은 적은 드물었다. 특히 비싼 구두를 사러 갈 땐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주로 짧고, 좀 노골적인 경우가 많았다. 남자가 일하는 브랜드는 바늘 같은 스틸레토 힐로 유명한 곳이었다. 여자도 언젠가 하나쯤은 꼭 갖고 싶었던 구두였다. 이 남자는 그렇게 차려입은 여자들의 발을 매일 만지는 남자다. 그럴 때마다 오늘 같은 섹스를 상상할까? CD를 공짜로 받을 수 있어 박봉이지만 음반사를 다닌다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외국에 나가는 게 너무 좋아 스튜어디스를 하는 여자는 많았다. 여자는 남자를 이해했다.

남자의 직장은 집에서 멀었다. 지금보다 두 배쯤 버는 직장에 다닌 적도 있다. 그러나 남자는 구두가게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바지 무릎이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하루에도 수없이 무릎을 꿇었지만, 하나도 힘들거나 자존심 상하지 않았다. 남자는 일하면서도 하루에 몇 번씩 딱딱해졌다. 스스로 천직이라 여겼다.

남자는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도 발을 보기 전엔 고백하지 않았다. 남자는 발레과 학생을 사랑한 적이 있다. 어렸고, 몸을 섞는 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처음 섹스하던 날, 남자는 레슬링 선수의 귀처럼 어그러진 여자의 발을 봤다. 몸을 던져 전력투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스러운 흔적이었다. 자랑스러워할 만도 했다. 그러나 어쩐지 딱딱해졌던 남자의 몸이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느슨하게 풀렸다. 남자는 그런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나 여자를 사랑할 순 없었다. 남자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와 뭐가 다르냐고 자신을 위로했다. 가끔 발이 성감대라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런 여자들과 은밀한 취향을 공유하는 기분은 꽤 짜릿했다. 소녀시대가 ‘소원을 말해봐’를 발표했을 때 남자의 리비도는 절정에 달했다. 그해 여름, 남자는 지금의 직장으로 이직했다. 올해는 5월부터 여름이었다. 벌써부터 페디큐어까지 예쁘게 바른 손님들이 가게를 찾았다. 남자는 항상 가장 먼저 출근해서, 마지막으로 매장을 떠났다.

다음 날 아침, 남자는 여자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멋진 옷을 꺼내고 있었다.

“왜 지금까진 그거 안 입었어요?”
“아, 제일 좋아하는 옷인데 주로 일할 때 입어요.”

여자는 남자의 직장이 궁금해졌다. 통장 잔고가 얼마 남았더라? 마침 여름용 샌들이 필요하던 차였다. 현관 앞에 놓인 여자의 구두는 새 신처럼 말끔히 닦여 있었다.

    에디터
    유지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Finger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