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몸을 던지듯 강물에 차를 던졌다. 물보라가 시원하게 일어 마음이 다 씻겼다.
랜드로바 레인지로버 4.4 보그 SE
레인지로버가 사람이라면 기꺼이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생각한다. 339마력을 내고 4,000cc가 넘는 디젤 엔진을 혹사시킬 때도 이 차가 내는 소리는 그저 진중하다. 어떤 속도로든, 아주 거친 길이라도, 그저 안긴 것처럼 달릴 수 있다는 듯이. 경춘고속도로를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릴 땐 바로 거기가 호수 같았다. 실제로 물 위를 달릴 때도 다르지 않았다. 바닥이 모래인지 자갈인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믿을 수 있는 사람과는 어디라도 상쾌하게 떠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오후 같은 것. 자동차가 이렇게까지 품위를 지킬 수 있다면 내 몸가짐부터 바르게 해야겠다고 반성하는 아침. 레인지로버는 그런 차다.
TIP! “예쁘다”는 말 뒤에
레인지로버는 예쁜 차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흉했던 적도 실망시킨 적도 없다. 몇 번의 변화를 거쳤지만 핵심을 잃지 않았고,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정체성은 지켜냈다. 이번 레인지로버는 4세대째다. 차체는 100퍼센트 알루미늄이다. 철보다 가볍고 단단하다. 무게는 총 420킬로그램 덜어냈다. 전반적인 주행성능이 개선됐다는 뜻인데, 이건 정말 운전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범주에 있다. 완고할 정도로 지켜낸 아름다움의 이면엔 이런 기술의 진보가 숨어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 ML350
ML이야말로 메르세데스 벤츠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벤츠야말로 고급함을 제대로 다룬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ML이 편안함을 바탕으로, 언제든 발톱을 드러낼 수 있는 맹수에 가까운 SUV라는 사실은 어떨까? AMG가 튜닝한 벤츠가 아니라도 그렇다. ML350은 듬직한 SUV다. 거친 자갈, 하늘만 보이는 오르막,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내리막에서도 신경 쓸 일은 별로 없다. 전형적인 오프로더보다는 도시에 어울릴 것 같은 풍모를 지녔으면서도. 좋은 차에 앉았을 때 운전자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다. ML350은 길의 조건과 관계없이, 휴식에 가까운 이동을 보장한다.
TIP! 꾸미지 않았다고
메르세데스 벤츠는 화려한 이름이지만 ML350은 그렇지 않다. ‘화려한 벤츠’를 꼽자면 SL63AMG나 G65AMG를 꼽겠다. 지붕이 열리는 클래스 카브리올레가 ML보다는 호사스럽다. ML은 행렬 말미에서 모든 걸 내려다보는 듬직한 장수 같다. 실력을 함부로 보이지 않고,다른 모든 장수의 장점을 고루 갖춰 포용할 줄 아는. 신차는 매년 출시된다. 새로운 건 강박 같다. 하지만 ML 같은 매력이라면, 시간에 쫓길 일은 없을 것이다. 꾸미지 않았다고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라서.
폭스바겐 투아렉 R 라인
투아렉에는 폭스바겐의 욕심과 패기가 담겨 있다. 폴로와 골프 같은 합리성보다 파이톤의 권위에 더 가까운 SUV다. 운전석에서 내려다보는 보닛은 광활하다. 높이도 상당하다. 덩치와 관계없이, 시속 100킬로미터까지 가속하는 데 5.8초밖에 안 걸린다. 포르쉐 카이엔과는 딱 0.1초 차이다. 같은 플랫폼을 쓰는 SUV라 해도, 흔히 폭스바겐에 기대하는 수치를 훌쩍 넘어선다. 같은 값을 지불한다고 가정했을 때 고를 수 있는 다른 SUV의 종류가 많아서, 폭스바겐 투아렉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만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 거기서부터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TIP! 플랫폼을 공유한다는 것
플랫폼은 차체 구조, 섀시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자동차의 기본이 되는 골격이다. 새로 설계할 때 가장 큰 비용이 들고, 한 번 만들어놓으면 변경이 쉽지 않은 게 플랫폼이다. 따라서 하나의 플랫폼으로 다른 종류의 자동차를 여럿 만들 수 있다면 비용을 확실히 절감할 수 있다. 폭스바겐 투아렉과 포르쉐 카이엔, 아우디 Q7은 같은 플랫폼을 쓴다. 그렇다고 “다 같은 차 아니야?” 거칠게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자동차의 성격은 아주 사소한 특징 하나로 달라지기도 한다. 한 가지 기계적 공통점이 설명할 수 없는, 백만 가지 감정의 조합이 또한 자동차라서.
포르쉐 카이엔 S 디젤
S는 포르쉐의 고성능 모델에만 붙는 명칭이다. 포르쉐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정확한 조준점을 찾아냈고, 정확히 명중시켰다. 카이엔 S 디젤은 배기량이 높은 디젤 엔진을 써서 연비와 힘을 동시에 챙겼다. 이제 포르쉐 카이엔은 명실상부 고성능 SUV의 주류다. 포르쉐처럼 달릴 일 없어도 카이엔을 산다. 트랙이라도 빛날 성능인데, 도로에서는 말할 것도 없는 수치. 굳이 필요하진 않아도 갖고 싶고, 가질 수 없어도 꿈꾸게 된다는 데 포르쉐의 진짜 힘이 있다. 그러다 마침내 가졌을 때,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질 거라는 기대와 확신 또한.
TIP! 전통과 도전 사이
고집이라면 포르쉐를 따라갈 회사가 별로 없을 것이다. 포르쉐 911은 부동의 상징이다. 운전석 뒤에 얹는 수평대항 6기통 엔진도. 두 개의 동그란 헤드램프, 조붓하고 둥글게 솟은 운전석과 조수석도 마찬가지다. 카이엔은 ‘포르쉐가 만든 SUV’라는 역설 속에서 숱한 반대와 편견에 둘러싸여 있었다. 1세대 카이엔을 두고 영국 BBC <톱기어>는 “자동차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심각할 정도로 징그럽게 느낀다”고 평했다. 하지만 극복이라면 또한 포르쉐를 따라갈 회사가 없으니, 지금의 농익은 카이엔을 보면 모든 게 한낮처럼 명백해진다.
지프 그랜드 체로키 3.6 오버랜드 서밋
지프는 거짓말을 못한다. 눈속임도 없다. 지프가 만든 자동차의 기능과 디자인에는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균형이 있다. 모든 디자인 요소에 쓰임이 있고, 그 자체로 완결돼 있다. ‘도심형 SUV’라는 말로 포장할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고, 순수함 자체로 아름다움을 성취해낸 회사다. 그랜드 체로키는 오프로드에서의 성능과 가능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내외에 고급함을 보탠 차다. 지프의 성능을 그대로 가지면서 도시에서의 품격까지 지켰다는 뜻이다. 오버랜드 서밋은 그랜드 체로키 중에서도 최상위 모델이다. 시트에 쓴 가죽 색깔은 미국 서부 사막같이 투박하지만 정교해서고급하다. 부드러움이나 날렵함이 고급함을 담보할 수 없다는 걸 지프는 알고 있으니까. 세세한 부분을 다 뜯어봐도 그렇다. 이 차야말로 오지의 험난함과 고급함을 제대로 조율했다. 고인 물을 건너면서 물 밑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 잠시 바퀴가 헛돌더라도 곧 탈출할 수 있다는 확신까지.
TIP! 랄프 로렌의 말
그는 전무후무한 패션 브랜드 랄프 로렌의 창시자다. 미국 상류사회의 고급한 스타일을 전 세계에 전파한 선구자, 진정한 자동차 애호가이기도 하다. 지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지프야말로 SUV로서의 가장 고유한 형태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모든 부품에 진중한 목표가 있죠. 사람들은 지프의 투박함과 순수를 사랑합니다. 저는 지프를 볼 때마다 한 벌의 낡은 청바지를 떠올려요. 멋지고 기능적인.” 경험이 쌓인 모든 자동차는 고유하다. 어쩌면 세상 모든 지프가, 지프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다.
- 에디터
- 정우성
- 포토그래퍼
- 이신구
- 스탭
- 어시스턴트/ 강승균, 이현석, 진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