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를 입으면 하루 종일 걷고만 싶다.
Dries Van Noten
드리스 반 노튼의 옷은 기괴한 재단이나 과도한 디자인 없이도 언제 어디서든 눈에 띈다. 생각해보면 옷에 철학적 심상을 담을 수 있는 디자이너가 그 말고 또 있었나 싶다. 그가 만들면 형광 노랑색 오간자 재킷도 무척 지적으로 보이고 헐렁한 반바지도 우아하다. 이 룩을 보면 남자의 멋진 여름 룩이란 여기서 시작되고 이것으로 끝날 것만 같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단단한 확신까지 든다. 드리스 반 노튼의 옷만으로 채운 옷장에선 좀벌레마저 책을 읽고 있을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상. 이 정도면 거의 종교에 가깝지만, 어쨌거나 천박하고 상스러워지기 십상인 여름엔 드리스 반 노튼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Missoni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모두가 무릎까지 오는 쇼츠가 대유행이라 부르짖어도 올 여름엔 짧은 것만 골라 입고 싶다. 수영복이라도 예쁘기만 하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요즘엔 쇼츠와 수영복을 구분하기 힘드니까. 심지어 언더웨어를 연상시키는 쇼츠도 있다. 미쏘니의 쇼츠를 입는 건 특권과 같다. 도심에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자들에겐 파텍필립 시계를 차는 것보다 더한 충격을 줄 것이다. 나대는 감이 있지만 자신 있게 거리를 활보할 때의 자유로운 느낌은 누려본 자만이 안다. 단, 이런 쇼츠를 입을 땐 머리에 포마드를 듬뿍 발라 말끔히 넘기고, 상의는 점잖게 입는다. 그래야 정신 나간 관광객으로 오해받지 않으니까.
Trussardi
보통 남자들, 그러니까 회사에 출근하고, 회의와 외부 미팅이 많은 남자들에게 반바지를 입으란 건 아무리 더워도 무리다. 그런데도 굳이 소개하는 건, 덥기도 할 뿐더러 그리고 이 정도는 충분히 입을 만해서다. 유밋 베넌은 이번 여름 트루사르디 컬렉션을 만들면서 트루사르디 가문의 풍요로운 삶을 담았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반바지 차림도 단정하고 고매하기만 하다. 벨트가 있는 무릎 길이의 반바지와 스웨이드 로퍼 차림이라면 뭐 한 국가의 원수를 만난다 할지라도 별 무리가 없다. 이런 옷차림이라면 어딜 가든 젊고 호사스런 기분이 들 게 분명하다. 다른 건 몰라도 반바지만큼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입어야 한다.
Shades of Grey
계절에도 나이가 있다면, 여름은 참 젊다. 늙지도 어리지도 않고 젊다는 건, 그야말로 여름처럼 뜨겁고도 상쾌한 말이다. 스스로 젊다고 믿는 남자들은 여름이 되면 아스팔트를 달리고, 페달을 밟고, 스노보드를 뺀 모든 종류의 보드에 올라타기 시작한다. 혹은, 그러기를 열망한다. 후끈한 공기에 몸을 던지고, 흠뻑 땀을 흘리고, 기진맥진해 백사장이든 콘크리트든 널브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는 거야 말로 젊은 계절을 헤엄치는 젊은 남자의 호기 아닌가. 거꾸로 쓴 베이스볼 캡, 두툼하고 헐렁한 스웨트 셔츠와 티셔츠, 발목을 살짝 가리는 멜란지 삭스와 반스 슬립온, 마지막으로 스웨트 쇼츠는 여름을 사랑하는 청년에겐 선율과도 같은 룩인 것을.
- 에디터
- 강지영, 오충환, 김경민, 박태일
- 포토그래퍼
- Robert Mitra, FAIRCHILD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