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TV가 영화를 몰아낸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해 눈부셨던 영화들을 생각하니 그건 착각이었다. 그 복된 얼굴들이 척 클로즈의 대담한 앵글에 사로잡혔다.
– <킹콩>에 대한 평. 1976년 10월 25일, <타임>.
– 폴린 카엘이 <스트리트 스마트>를 보고 한 말. 1987년 4월 20일, <뉴요커>.
– 할 힌슨이 <그리프터스>를 보고 한 말. 1991년 1월 25일, <워싱턴 포스트>.
– 평론가 데슨 호우가 <천상의 피조물>을 보고 한 말. 1994년 11월 25일, <워싱톤 포스트>.
– 케네스 튜런이 <비포 나잇 폴스>를 보고 한 말. 2000년 12월 22일, <LA타임스>.
내가 틀렸던 걸까? 얼굴을 붉혀야 할 정도로 잘못 생각했을까? 나는 <배니티 페어> 2012년 5월호에서 모든 근거를 모아 TV가 창조적으로 성숙했고, 그만큼 힘이 생겼으며,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영화를 이겼다고 주장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바보상자니, 광활한 황무지니, 유리로 된 공갈 젖꼭지니 조롱받았던 그 TV 말이다. TV에 비하면 영화의 매력은 철저히 갈리는 쪽이었다. 여름용 블록버스터 시리즈가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잔뜩 극장으로 끌어들였다면, 과감하고 우울한 소규모 인디 영화나, 장인 같은 감독들의 최신작은 점점 줄어드는 영화광의 신전에 간신히 촛불을 밝혔다. 그러는 사이 TV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증폭되며 팬들을 얼어붙게 만들고, 평론가들을 전도사로 만들었다. <매드맨>, <다운튼 애비>, <브레이킹 배드>, <홈랜드>, <왕좌의 게임>, <워킹 데드>, <보드워크 엠파이어> 같은 강력한 드라마들이 주축이 되었다. 캐릭터 묘사의 깊이와 심리 역학, 기발하고 날카로운 반전, 입이 떡 벌어지는 시퀀스, 여성 캐릭터의 다양한 역할…. TV는 승승장구 영화를 앞서 갔다. 영화가 거대한 로봇이나 갖고 놀고 있을 때 벽난로 같은 HD TV의 평면 화면은 순식간에 멀티플렉스를 대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매체가 바뀌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내 칼럼을 부드럽게 반박한 사람도 있고, 섬세하거나 우아할 리 없는 인터넷에 내 험담을 올린 사람도 있다. 하지만 2013년이 되어선 나 스스로도 점점 의심이 생겼다. 다시 영화와 TV의 재대결이 벌어질 것 같았달까? 최소한 다시 고려해 볼 필요는 있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하길, 나는 이번 시즌은 완벽하게 영화가 TV를 이겼다고 본다. 반론의 여지가 없다. 매년 베스트를 뽑는 데 지쳐 예수가 걷는 고난의 길을 걷는 듯했던 평론가들도 <크리스마스 캐롤>의 소년 타이니 팀과 같은 축복을 받았다. 선물이 워낙 많았으니까.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같은 스펙터클. 나이 많은 대학생 같은 캐릭터들이 벌이는 탐욕과 방탕의 기괴한 카니발. 이에 비하면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작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의 쾌락주의는 달콤 쌉싸름한 파이 같다.
스티브 맥퀸의 <노예 12년>처럼 역사의 부당함을 파고드는 끔찍한 이야기. <오스카 그랜드의 어떤 하루>, <블루 카프리스> 같은 현대를 배경으로 한 비극들.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고양이 간수를 잘 못하는 포크 가수의 이야기)처럼 패배자, 뒤에 남겨진 사람들, 험상궂게 살아남은 사람들, 정신 못 차리는 낭만주의자, 속고 있는 영혼들을 섬세하게 연구한 캐릭터들이 나오는 작은 스케일의 영화들. 알렉산더 페인의 <네브라스카>, 스파이크 존즈의 <허>(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스칼렛 요한슨의 밀어를 들으며 석양을 즐기는 호아킨 피닉스). J. C. 챈더의 <올 이즈 로스트>(로버트 레드포드가 바꿀 수 없는 운명을 상대로 힘겹게 싸운다).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한때 사교계 명사였던 케이트 블란쳇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온갖 것들이 뒤범벅된 타임머신 같은 영화들도 있다. 지나치게 근엄할 뻔했으나 오프라 윈프리와 테렌스 하워드가 잘 살려낸 리 다니엘스의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 한편 데이비드 O. 러셀의 <아메리칸 허슬>은 말아올린 머리와 디스코가 넘실대는 가운데, 놀라운 5인조가 – 크리스찬 베일, 에이미 아담스, 제니퍼 로렌스, 브래들리 쿠퍼, 제레미 레너 – 70년대 코스프레를 뛰어넘어 신들의 프롬 파티 같은 경지까지 다다르게 만든 영화다(제니퍼 로렌스는 활을 들고 나온 <헝거게임:캣칭 파이어>로도 압도적인 성공을 거뒀다).
사람들이 구분하기 힘들어하는 두 영화, <디스 이즈 디 엔드>(할리우드 형제들이 세상의 종말과 싸운다)와 <더 월즈 엔드> (<새벽의 황당한 저주> 팀이 다시 뭉쳤다). 그리고 보는 사람마다, ‘내가 다시 매력적인 소녀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만든 성장 로맨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도 있었다. 박스 오피스에서 성공하지 못한 영화조차도 70년대의 영화 전성기를 떠올리게 했다.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던, F1 레이싱 실화를 다룬 론 하워드의 <러시, 더 라이벌>이 좋은 예다.
한편, TV 드라마를 좋아하는 착한 게으름뱅이들은 애정이 조금 식었다. 다섯 시즌 동안 곧 터질 것 같은 폭탄처럼 시청자들을 이끌던 <브레이킹 배드>는 광활한 남서부 교외의 연금술사이자 파우스트인 월터 화이트의 상처 받은 마음에 작별을 고했다. 그의 마약 연구소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이것이 일요일 밤에 남긴 슬픈 구멍은 <로우 윈터 썬>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해 보인다. (<브레이킹 배드>의 프리퀄 <베터 콜 사울>은 빈스 길리건이 제작한다고는 하지만 원작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열렬한 팬들조차 의심하고 있다.) <매드 맨>은 60년대가 시들해지는 시점으로 들어가자 드라마의 에너지마저 잃은 것 같았고, 주인공인 돈 드레이퍼의 비관적 세계관은 달 그림자의 내면까지 보여주는 듯하던 강력한 힘이 떨어졌다. 그를 포함한 여러 캐릭터가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자는 것도 두서없다. 잔뜩 비난을 받고 있는 <워킹 데드>는 이리저리 헤매며 뻔한 내용을 반복하면서 강력한 견인차 역할을 못하고 있다. <홈랜드> 시즌 3는 토요일 밤마다 트위터에 올라오는 험담을 보건대, 상당수의 팬을 실망시킨 것 같다. <다운튼 애비>에 대한 비판도 점점 커지고 있다. 옛 의상과 흰 피부, 대성당 인테리어, 영국의 고운 안개를 즐기며 안락의자에 앉아 현재에서 벗어나는 향수에 젖은 사람들에게 계속 인기가 있기는 하다지만 가장 열렬한 팬조차 드라마로서 시시해졌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것이다. 생기 없는 캐릭터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고, 작가 줄리안 펠로우스가 새로 산 집게를 시험이라도 해보는 것 마냥, 커플들이 헤어졌다 만났다 한다. <킬링>은 히스테리컬하면서도 물에 불어버린 듯한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었고, 사이코 스릴러 <덱스터>는 아주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그렇다고 TV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HBO의 강렬한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선혈이 낭자하는 올해 최고의 결혼식 장면을 만들어냈다. 넷플릭스는 자체 제작한 <하우스 오브 카드>와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으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더 아메리칸즈>의 첫 시즌은 갈수록 더 단단해지고 있다. <스캔들>과 <굿 와이프>는 힘을 더해가며 소셜 미디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헤이든 파네티어가 <내쉬빌>에서 연기하는 진격의 컨트리 가수 줄리엣 반스는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비열하고 못된, 강렬한 나쁜 여자인데, 아직 훌륭한 여배우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걸작이라는 메달을 너무 일찍 걸게 된 2013년의 영화들 중 일부는 평론가와 관객에게 고결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려고 열심히 만들어낸 허수아비 같기도 하다. 오스카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기억상실의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영화들. <샤인>, <미스 리틀 선샤인>, <크래쉬>, <슬럼독 밀리어네어>, <블랙 스완>처럼 마조히스트가 아니면 절대 자진해서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은 예전 수상작들을 보면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영화가 다시 상승세를 보이며 얻게 된 것은 장르의 탁월함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동등함이다. 디지털 기술의 융합과 아이팟부터 아이맥스에 이르는 다양한 전달 채널로 인해 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영역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점점 화면의 크기에 대해 덜 까다로워지고 있다. 물론 지금도 깜짝 놀라며 감탄하고 싶어 하는 부류가 있고, 손목시계만한 크기의 화면으로 보는 스트리밍 컨텐츠로 만족하려 들지 않는 부류도 있지만 그 폭은 점점 줄어드는 흐름이다. 여기서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여러 다른 종류의 융합으로부터 TV가 마치 영화처럼 예술성에 목을 매는, 조금 가학적인 비관주의자들을 양산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날씨가 우울한 북유럽의 느와르가 영국과 미국의 탐정 드라마에 미친, 저주스런 영향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이 좋지 않다. 마침내 TV에서 일하는 정상급 제작자들이 더 큰 과대망상에 굴복하게 된다면, TV는 가식과 격언적인 자기성찰로 인해 화석화될 수도 있다. 바로 ‘테렌스 말릭 증후군’이다. 나는 FX의 바이커 드라마 <썬즈 오브 아나키>에서 사람들의 두개골이 수박처럼 박살나고 갈비뼈를 칼로 찔리는 상황에서도 어떤 장중함을 보여주려는 에피소드를 몇 개 본 적 있다. 근엄한 건 정도껏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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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제임스 월콧(James Waolco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