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속에 가장 사랑하는 여름 면 요리 하나쯤은 있는 거예요.
필동면옥
필동면옥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다 보면 갖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음식은 여러 자극으로 이미지가 형상화 되기도 하는데, 필동면옥이라는 공간에 가면 내 무의식 속에 있던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읽은 최인호의 통속 소설 <별들의 고향>이다. 소설 속 주인공 경아가 하루는 같이 살고 있는 남자에게 냉면 배달을 부탁한다. 한겨울에 옷을 다 벗고 침대에 앉아 포장해온 냉면을 먹는 경아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그림처럼 생생하다. 냉면은 겨울 음식이라는 것을 처음 설명해준 고등학교 시절 교감 선생님 말씀과, 소설 속 경아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진 이미지가 냉면 그릇 속으로 들어오는 곳이 필동면옥이다. 왜곡되고 과장된 기억이 작동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다시 확인하고 싶진 않다. 그 느낌을 없애고 싶지 않다. 막국수를 먹고 싶을 땐 슬리퍼를 신고 둘레둘레 동네의 작은 가게들을 찾는다. 최근 성지 순례하듯 냉면집, 막국숫집을 찾아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 과정에서 냉면집이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냉면과 막국수는 사실 좋은 재료만 확보하면 누구든지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유명하거나 오래된 것에만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새로 생긴 좋은 가게의 가치를 몰라볼 수 있다. 깔끔한 인테리어에 도자기 그릇을 쓰는 세련된 동네 가게에서 아주 맛있게 냉면 한 그릇을 비운 기억도 있다. 내 의도가 왜곡될 수 있으니 이곳의 이름은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황교익(맛 칼럼니스트)
을지면옥, 능라밥상, 가평 송원막국수
평양냉면이 먹고 싶을 땐 을지면옥, 비빔냉면을 먹고 싶을 땐 능라밥상, 막국수가 당길 땐 송원막국수를 찾는다. 을지면옥을 좋아하는 이유야 사람마다 제각각 이겠지만, 난 냉면 육수 위에 보일 듯 말 듯 떠 있는 고추 때문이다. 어슷하게 썬 고추가 두 조각, 어느 땐 세 조각 정도 떠 있는데 이걸 씹을 때 와그작거리는 그 기분이 을지면옥 냉면을 완성하는 것 같다. 맛이 좋은 깨를 흩뿌린 것도 마음에 쏙 든다. 비빔냉면이 당길 때는 종로2가에 있는 능라밥상으로 발길을 돌린다. 오장동 근처의 냉면집도 좋지만, 인스턴트 비빔면을 좋아하는 내 입맛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익숙한 맛 같아서다. 송원막국수는 진한 감칠맛이 마음에 든다. 김가루를 많이 넣지 않은 것과 은근히 자극적인 양념장이 내 스타일이다. 이 막국수 때문에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 때도 있다. 임성은(‘헬카페’ 대표)
우래옥, 니시키
평양냉면만 놓고 봐도 의정부식, 장충동식 조금씩 스타일이 다르다. 각각 선호하는 냉면집이 있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독보적인 스타일의 우래옥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다닌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입맛이었지만, 진한 육향에 푹 빠져버렸다. 그때는 꿩고기 완자가 빠지지 않고 그릇에 올라왔다. 지금은 생략하거나 사정에 따라서 쇠고기 완자를 넣어줄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맛이 거의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나이 지긋한 어른들도 많이 보여 자꾸 발길이 닿는다. 여름엔 차가운 우동인 붓카케 우동도 별미다. 니시키의 쫄깃한 사누키 우동면의 식감을 좋아하는데 차갑고 진한 쯔유와 먹으면 맛이 더 살아난다. 이영승(<주식9단 서울 맛집 유랑> 작가, 펍 ‘잭더리퍼’ 대표)
부산 면옥향천
해운대 우동시장 안에 있는 막국숫집. 벽에 주인 아저씨의 철인 3종 경기 상패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말 그대로 동네 가게다. 박상현 맛 칼럼니스트가 추천한 걸 보고 집 근처라 들렀다가 푹 빠지게 됐다. 직접 메밀로 면을 뽑는 집이라 평양냉면처럼 면의 순도가 높고 모리소바 같은 소바류, 카레크로켓 같은 꽤 훌륭한 사이드 메뉴도 판다. 이곳 막국수는 맵고 단 양념을 올린 식이 아니라 양지를 우린 시원한 육수가 나오는 스타일이다. 순메밀 막국수를 주문하면 간장 종지 같은 그릇에 메밀 순면만 한입 크기로 담아 주는데, 이게 아뮤즈부쉬 같기도 하고, 주인의 자부심 같기도 해서 좋다. 종종 테이크아웃을 해서 집에서 먹을 때도 있는데, 이땐 순메밀보다는 면이 굵고 더 탱긍탱글한 그냥 막국수가 더 맛있다. 정미환(프리랜스 에디터)
일산 대동관, 호무랑
일주일에 한 번은 냉면을 찾는다. 메밀면이 목으로 넘어갈 때의 쾌감에 중독된 것 같다. 짜장면이나 짬뽕 같은 밀가루 면에선 느낄 수 없는 기쁨이다. 차가운 육수와 냉면 가락의 굵기는 그 쾌감을 배가시키는 요소다. 집 근처에도 찾아보면 좋은 냉면집이 많은데, 그중 대동관이 면도 육수도 맛이 좋다. 동치미 국물을 섞지 않았는데도 맛이 시원하고 깔끔하다. 평소 김치나 무절임을 먹지 않는 나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소바라면 역시나 조선호텔에서 운영하는 호무랑이 내겐 제일이다. 일본이라면 선택지가 폭발적으로 길어지겠지만, 이 정도로 마음에 드는 메밀면은 아직 한국에서 못 봤다. 자루소바, 산마소바, 순채소바를 특히 좋아한다. 한석원(웨스틴 조선호텔 ‘스시조’ 셰프)
평양면옥, 흥남집, 우래옥
서울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곳은 평양면옥이다. 사실 평양면옥은 연구 대상이다. 다른 유명 평양냉면집과는 달리 지점을 논현, 분당, 도곡에 하나씩, 세 군데나 냈고 그 지점들의 맛이 모두 훌륭한데, 오히려 본점의 맛은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냉면 애호가들에게는 각자 선호하는 냉면집이 따로 있기 마련이지만, 평양면옥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다른 지점보다 장충점이 낫다는 사람들까진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함흥냉면은 맵지 않은 흥남집의 것을 좋아하고, 우래옥의 김치말이냉면도 좋아한다. 주변에 물어보면 냉면은 먹어봤어도 김치말이냉면은 먹어보지 못했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여타의 김치말이와 달리, 우래옥 정도로 육향 짙은 진한 고기 국물에 김치와 메밀면과 찬밥을 말아서 내온다 이런 김치말이가 어디 또 있을까? 순면으로도 주문할 수 있다. 미식의별(음식 블로거)
홍천 원소리막국수
어린 시절, 외가댁이 춘천에 있었다. 할머니 손에서 몇 년 자랐는데, 그때부터 막국수가 일상의 음식이 됐다. 입맛 없을 때, 임신했을 때 늘 생각나는 음식이 막국수인 데는 어린 시절의 영향이 크다. 춘천엔 막국숫집이 정말 많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수 없어서 인터넷으로도 많이 검색해봤다. 연애 시절,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 위해 검색을 하도 많이 해서 그런지 이젠 블로그 몇 개만 봐도 옥석의 윤곽이 좀 보이는 듯하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한적한 산길 옆에 있는 원소리막국수다. 첫인상이 좋았고, 무엇보다 막국수 맛이 튀는 구석 없이 깔끔하고 좋았다. 주인 내외가 우리 부부와 비슷한 나이이고, 그 집 딸도 우리 첫딸과 나이가 똑같다. 지난주에도 다녀왔는데, 흐르는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음식점이 있다는 게 참 기분이 좋다. 박지윤(아나운서)
이전의 을밀대
우연히 염리동에 갈 일이 있어 을밀대를 찾은 게 90년대 말쯤이었던 것 같다. 친구는 양지국밥을 먹고 나는 냉면을 먹었는데, 그땐 맛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신문사에서 단체로 포장해가는 모습, 주인 할아버지가 카운터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 그대로의 고기 향이 느껴지는 묵직한 육수에 반해 계속 찾게 됐다. 그러다 사람이 몰리기 시작한 2001년의 어느 날, 냉면이 다 떨어져 팔지 못하게 되자 주인 할아버지가 명함에 인감도장을 찍어 나에게 건넸다. 다음에 냉면을 서비스 하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난 아직도 그걸 간직하고 있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 을밀대는 맛이 많이 변해버렸다. 그 아쉬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봉수(‘비트볼 뮤직’ 대표)
고성 동루골막국수, 백촌막국수
냉면을 좋아하지만 요즘은 막국수 쪽으로 입맛이 조금 움직였다. 백담사 아래, 문인들의 공간인 만해마을에서 지낼 때 알게 된 두 곳을 자주 간다. 이 지역이 고향인 분의 추천이었는데, 두 곳 다 면에 양념을 올리고 동치미 국물을 적당히 부어서 먹는 영동형 막국숫집이다. 비빔막국수와 물막국수가 확실히 구별된 쪽이 영서형이다. 두 곳 모두 외지 사람들이 아직 들이닥치지 않아서, 그 가게만의 특색과 고유함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사람이 많아져, 요즘은 30분씩 줄 서는 모습도 꽤 본다. 발효된 동치미 국물의 맛이 물씬 느껴지는 육수도 좋고, 메밀면도 맛있다. 백촌 막국수보다 지리적으로 더 깊은 곳에 위치한 동루골 막국수는 육수에 자신이 있는지 육개장도 낸다. 백촌막국수는 접시에 담겨 나오는 타래 모양을 한 막국수가 유난히 예쁘다. 성석제(소설가)
을지면옥, 부산 소문난주문진막국수
가게 준비를 하면서 을지로에 갈 때마다 발길은 을지면옥으로 향했는데, 냉면도 냉면이지만 돼지수육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다. 을지면옥 스타일로 준비한 수육 간장을 더 맛있게 먹는 법을 주인한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냉면에 넣어 먹으라고 준비해둔 노란 겨자를 간장에 조금 넣고 섞은 뒤 수육을 찍어 먹는다. 알싸한 간장 맛이 돼지고기 맛을 더 살린다. 막국수라면 부산 사직야구장 근처의 소문난주문진막국수를 찾는다. 고향이 부산이라 온 가족이 야구 경기를 보기 전 시원하게 한 그릇씩 자주 들이켰다. 이주연(한국고전술집 ‘드슈’ 이사)
산골면옥, 옛날집
요즘은 일주일에 서너 번은 냉면집을 찾는다. 뜸할 때도 한두 번은 꼭 간다. 인스타그램에 냉면 사진을 두 장씩 올리는데(냉면이 그득한 그릇, 깨끗하게 다 먹은 빈 그릇) 너무 많이 올리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일부러 몇 개 빼놓고 올릴 정도다. 거래처가 있는 을지로 근방 냉면집을 다니는데, 최근엔 산골면옥 막국수를 먹으러 가는 일이 잦다. 고명이 올라 있는 막국수는 처음에는 비빔으로 먹다 육수를 부어 물막국수로 말아 먹는다. 특은 닭고기 추가, 곱빼기는 면 추가, 특곱은 둘 다 추가다. 그래도 냉면만 먹으면 늘 배가 덜 차서 만두를 시킬 수 있는 곳을 더 선호한다. 산골면옥은 만두 한 판에 6개 정도가 나오고 6천원을 받는다. 예지동 근처를 지난 땐 옛날집에서 회냉면과 만두를 먹는다. 박가공(가구 디자이너)
고대앞 멸치국수
여름마다 좋은 콩국숫집을 그렇게 찾았건만 얼추 포기한 상태다. “진국이네” 하는 웬만한 집의 콩국수를 보면 걸쭉하기가 꼭 빈대떡 반죽 같았다. 입 속에선 껄끄럽거나 텁텁하게, 심지어 씹혔다. 그런가 하면 이건 숫제 두유에 국수를 말았나 싶도록 다디단 것들이 수두룩. 거기에 방울토마토라도 올린 걸 보면 한숨이 절로 났다. 콩국수는 매우 단순한 음식이다. 온갖 비법이 들어간 육수를 낼 것도 없이, 콩을 갈아 국물을 내고 소금으로 간하는 게 전부다. 사실 오이채도 성가시다. 문제는 콩국의 양. 콩을 갈아 체에 거르면 그 양이 결코 많지 않다. 웬만한 식당에선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울 게 뻔하다. 그런 이치를 따져보건대, 안타깝게도 여느 식당에서 맘에 드는 콩국수를 만날 확률은 아예 없다고 본다. 직접 해 먹는 수밖에. 한편 오밤중에 시원한 국수가 먹고 싶을 때는 고대앞 멸치국수에 간다. 살얼음진 육수를 그대로 내는 터라 좀 거슬리지만(그래서 을밀대 냉면도 꺼린다) 오밤중이라면 다른 대안이 없다. 어쨌거나 한 대접 해치우면 솜털까지 시원하다. 장우철(‘GQ’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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