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의 청초호를 바라보는 두 개의 조선소가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60년간 운영해온 칠성조선소 옆에 아들은 와이크래프트보츠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곳에서 배는 바다만이 아니라 시간도 건넌다.
1998년 6월 15일, 故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과 함께 500마리의 소가 판문점을 지났다. 소를 실은 트럭이 끝도 안 보이게 이어지는 장관이 < CNN >을 통해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속초 해상에 잠수정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북한에서 내려온 70톤급 잠수정이었다. 9명의 공작원은 잠수정 안에서 자결했다. 거물 기업인과 소 500마리의 횡단이 무색해졌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해온 지금까지의 남북 관계 양상이었다. 와이크래프트보츠의 최윤성은 당시 속초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저녁 8시 이후 통행금지가 내려졌죠. 그건 좀 특별한 경우지만, 사실 바다 앞에 살았고 아버지가 조선소를 운영하셨는데도 바다에서 놀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바다에서 노는 건 도시 사람들처럼 여름에 해수욕장에서만 할 수 있는 거였죠. 제가 볼 수 있는 건 전부 어선이었고, 동해안은 경비도 심했거든요. 그러니까 배가 놀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죠.” 최윤성의 할아버지, 최칠봉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조선소를 다녔다. 6.25 전쟁 발발과 함께 피난을 내려온 부산에서도 배 목수로 일했다.
속초에 칠성조선소를 세운 건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1953년이다. 속초는 전후 함경도 실향민의 정착지였다. 함경도식 순대와 젓갈, 회냉면이 속초 향토 음식으로 전하는 배경이었다. 보잘것없었던 속초의 수산업은 이때를 기점으로 폭발했다. 최칠봉은 그의 형제, 친척과 합심해 청초호의 일부를 흙으로 메운 위에 조선소를 세웠다. 인간의 힘으로 개척한 땅, 무無의 땅에서 시작된 칠성조선소는 약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광과 쇠락의 날을 거쳤다. 청초호는 사주 등에 의해 바다와 분리된 연안의 얕은 호수인 석호로, 배를 정박해놓기 좋아 해양산업에 유리하다고 평가받는 입지다. 도루묵, 멸치, 꽁치, 명태 등이 속초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1990년대까지 오징어 앞에는 속초라는 수식어가 늘 붙어다녔다. 성공적인 어업은 성공적인 조선업으로 이어졌다. 최칠봉은 형제, 친척들과 수익을 나누고 그들을 독립시킬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칠성조선소는 아들인 최승호의 손으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자동차 회사에 다니던 최승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힘겹게 이끌고 있는 칠성조선소를 내버려둘 수 없어 다시 속초로 내려왔다. 그러나 양식업의 확산과 어업 규제 강화, 대형 어선의 득세로 속초의 수산업과 함께 조선업도 쇠퇴해갔다. 목선이 FRP선으로 대체되어가자 더 이상 배를 건조하는 것도 무리였다. 칠성조선소는 수리조선소로 명맥을 이어갔다.
스위스 카약 브랜드 Point 65의 Whiskey 16을 연구 중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조선업에 종사했지만, 최윤성은 자신이 배를 만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손재주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서 미술대학의 조소과에 진학했다. 창작은 “네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이었다. 인간의 기억을 다루는 작업을 했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친구들의 얼굴을 석고로 만들었다. 다만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기억나지 않는 대로, 어떠한 사진도 참고하지 않았다. 눈, 코, 입 어디 하나 뚜렷하지 않았지만 누군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다음 작업이 배 제작이었다. 배운 적은 없으나 옆에서 보고 자라면서 기억하는 공정만으로 시도했다. 마찬가지로 실제 배의 공정이 어떤지는 찾아보지 않았다. 몇 달 동안 주워 모은 나무를 목공의 기초도 모르는 상태에서 덕지덕지 덧붙였다. 최윤성은 말했다. “그 작업을 6개월 동안이나 했어요. 그걸 하면서 너무 재미있었고, 배의 곡선이 참 아름답다고 느꼈죠.” 배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학위나 명성이 아니라 아름다운 배를 만들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미국 메인 주에 위치한 랜딩 스쿨에서 목선 공정과 요트 디자인, 복합 소재에 관해 배우면서 최윤성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배가 뭔지 알았다. 이탈리아 ‘리바 요트’나 미국의 ‘호건 요트’에서 만드는 ‘텐더’ 같은 콤포지트(복합 소재의) 보트였다. 실제로 미국에 있으면서, 역시나 미술을 전공한 아내와 함께 ‘Nuh Wa Nah’라는 보트를 절반 이상 완성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콤포지트 보트 제작을 이어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칠성조선소 옆에 작업실을 차리고 간판을 달았지만, 술이 없는 술집이었다.
목공구들. 최윤성은 언젠가 요트를 제작할 날을 기대하고 있다.
“자재를 구할 수가 없었어요. 전부 수입해야 하니까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외국 제품을 사는 게 낫겠더라고요. 나무도 나무인데, 아주 기본적인 나사조차 비쌌어요. 실리콘 브론즈나 스테인리스 재질의 나사가 필요하거든요. 시장이 없으니까 선구업체 자체가 없었죠. 인력도 문제였어요. 한국에서는 기술직에 대한 평가가 너무 낮아요. 금속공예나 목조형을 전공한 재주 좋고 머리 좋은 친구들이 기술직이면서 ‘노가다’인 이런 일을 하려고 하지 않죠.” 최윤성이 설명했다. 어떻게 머리를 굴리고 발품을 팔아봐도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장사꾼이나 사업가가 아닌 이상” 시장이 없는 곳에서 뭔가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학에서 미국의 조선소와 협업해 만든 카누/카약이 떠오른 것도 그 즈음이었다.
와이크래프트보츠 작업실 전경.
목선 이외의 배는 종류에 관계없이 만드는 과정이 비슷하다. 카누/카약도 다르지 않다. 젤 코트로 도장을 한 다음 몰드에 유리 섬유를 적층해서 여러 가지 자재를 올리고 비닐 백을 덮은 상태에서 펌프로 빨아들이는, 진공성형의 방법이다. 선체의 모든 부분에 동일한 압력을 주어 균일한 제품을 완성할 수 있다. 자동차도 항공기도 진공성형을 한다. 경화를 거쳐 진공 자재를 뜯어내면 배의 선체가 나오는데,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하드웨어를 장착해서 완성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정교하게 접근해야 하고 손도 많이 간다. 지식보다는 사람의 예민한 손과 축적된 경험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누구든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카누/카약에 관한 자료는 차고 넘친다. 길이와 높이, 앞과 뒤, 중간의 면적, 배의 형태에 따른 장단점을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식과 창작 사이에는 무수한 디딤돌이 놓여 있다. 예컨대 축구선수 지단의 창의적인 가치는 그의 통산 득점과 어시스트 숫자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한 경기 동안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모과이가 음악을 입힌 다큐멘터리 <지단, 21세기의 초상>에서 더 잘 드러난다. 숫자는 유혹할 뿐 가치를 보여주진 못한다.
칠성조선소는 현재 수리조선소로 영업 중이다. 배 앞머리에 쓴 ‘왕성’은 최윤성의 아버지 최승호의 작품이다.
한국의 수상 레저 스포츠 중에서 그나마 고급 시장이 활발한 분야가 카누/카약이다. 대개 중국산이나 공기주입식이고, 아주 소수만이 콤포지트 카누/카약을 즐기는데도 수상 레저 스포츠의 저변이 워낙 없다 보니 상대적으로 크다. 하지만 콤포지트 카누/카약 중에서도 제대로 만든 제품은 흔치 않다. 여기에서 제대로 만든 제품은 수입 제품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카누/카약은 외국 제품을 사다 몰드를 뜬 제품이다. 나무 졸대로 만드는 스트립정이나 합판으로 만드는 합판정 등 DIY 카누도 활발하지만 제작 과정에 의의를 두거나 연습용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오래 타기에는 부적절하다. 수명까지 감안한다면 수입 제품을 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최윤성은 말했다. “어떻게 보면 와이크래프트보츠의 목표는 단순해요. 튼튼하고 아름다운 배를 만드는 거죠.” 와이크래프트보츠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어렵지만 마땅한 목표를 향한다.
2층을 칠성조선소의 사무실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식당으로 쓰고 있다.
지난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15 경기국제보트쇼’에서 자체 개발한 선형으로 만든 카누 ‘Anas 16’과 카약 ‘Larus 16’, 아티스트 트리오 구포 브라더스가 외장을 그린 특별판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한국 카누의 선구자인 캐나디안 카누 클럽의 이재관 대표로부터 “고생 참 많았겠다, 제품 잘 나왔더라”는 칭찬을 듣고 뿌듯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목적과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선형과 하드웨어를 만들어갈 것이다. 디자인 측면에서도 카누/카약에서 잘 쓰지 않는 어두운 색깔이나 파스텔 톤, 아티스트와 협업한 특별판으로 카누/카약의 외연을 넓혀갈 것이다. 경차에 싣고도 이동할 수 있도록 평균 5미터 정도 되는 카누/카약의 길이를 줄이고, 무게를 10킬로그램 안팎으로 줄여 일반인들의 진입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와이크래프츠보츠는 과거의 영광에 의존하는 가족 사업이 아니다. 그의 친동생 최윤복이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배를 끌어당기는 동력을 제공하는 윈치.
최윤복은 이주민인권단체에서 일하던 중 부모님과 최윤성의 권유로 합류했다. “처음에는 안 한다 그랬어요. 구체적으로 형이 뭘 할 건지 몰랐거든요. 하지만 시작하는 입장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그중 한 명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가업을 잇는 게 아닌데, 오히려 외부에서 ‘3대째 가업’이라고 해요.” 최윤성은 일을 벌릴 것 같은 쪽이라면, 최윤복은 지금 가진 것만으로 고요해질 것 같은 쪽이다. 최윤복은 이 일을 시작하면서 카누/카약을 처음 타봤다. 하지만 카누에 관한 감상은 거칠지 않았다. “물이 손에 닿을 듯이 가까운 상태로 움직이는 기분이 묘하죠. 섬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 소박한 느낌이 좋아요.” 최윤성이 말을 받았다. “해질녘에 가까이에서 보는 강 색깔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두 사람 다 아이가 있다. ‘4대째 가업’의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혹시 어떤 기대가 있을까? 최윤성이 답했다. “가업은 모르겠지만, 아이랑 놀면서 함께 만들어보고 싶어요. 우리 또래에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이 있나요. 다들 바쁘셨잖아요.” 부모 세대를 반영하고 굴절한 바람이었다.
얼마 전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은 다시 한 번 세대론에 불을 지폈다. “우리 아이가 이 고생을 안 했으니 다행”이라는 부모 세대의 전언은, 그 결과가 이 살벌한 경쟁사회냐는 자식 세대의 반문으로 돌아왔다. 부모 세대의 희생이 거룩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지금을 돌아보건대 희생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는 의심은 다만 자연스럽다. 칠성조선소의 개업 당시 이름은 원산조선소였고, 최칠봉은 꿈에서 그 이름을 봤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업체명을 바꿨다고 전한다. 어릴 때 “배가 놀이일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청년은, 지금 이름만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배가 오르내리는 길, 철선.
-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정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