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피지, 살아서 가는 천국

2015.12.01이충걸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남태평양엔 우리가 공상하는 이상향이 그대로 펼쳐진 나라가 있다. 피지. 어디와도 닮지 않고,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섬. 사랑처럼 기묘한 시간의 마법. 천국은 피지로부터 시작되었다.

마마누다 군도의 산호군락에 있는 플로팅 아일랜드, 클라우드 나인. 여기 레스토랑에서 만드는 화덕 피자보다, 이름 있는 디제이들이 틀어주는 음악보다 몸서리치게 황홀한 건 눈을 믿을 수 없는 바다 색. 이런 빛깔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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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와 아일랜드 리조트의 스태프인, 파시라는 이름의 피지 청년. 파리 남자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우아한 태도와 기품 있는 미소에 바로 매료되었다. “마이 네임 이즈 파시…”라고 발음하던 음악 같은 목소리가 지금도 생각난다.

10월 19일. 남태평양을 향해 9시간 40분을 날아갔다. (놀랍게도 인천-피지 직항이 있었다!) 피지에 간다니까 내 주변 전체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나도 알고 싶었다. 피지가 지구에 숨은 천국인지, 천국은 그런 곳일 거라던 사람들의 상상이 맞는지, 실은 피지에서 아예 살 수 있을지, 결국 피지가 나의 마지막 정거장이 될 수 있을지….비티레부와 바누아레부, 본 섬 두 개로 나뉜 피지 지도엔 322개 섬이 포함돼 있다. 한편, 서쪽 초원이 호주를 향해 펼쳐지다 파푸아 뉴기니로 방향을 틀고, 뉴질랜드를 지나는 남쪽 바다 어디쯤에 사모아가, 타히티가, 쿡 아일랜드가, 보라보라가 있다….

난디 공항에 내리자 척척한 공기에 타는 듯 톡 쏘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게 사실은 바닐라인지 후추인지 재스민인지, 아니면 그 모두가 섞인 향인지. 머리에 빨간 꽃을 꽂은 채 그 자체로 꽃이 된 사람들의 환대로부터 피지는 시작되었다.

공상 속에서처럼 피지는 드라마틱하고 기이하며 목가적인 섬이었다. 구름이 내려앉은 사발 모양의 산꼭대기, 활화산의 재로 덮인 가장자리, 에메랄드빛 산호밭, 초호, 캘리포니아 남부풍의 초원, 존재감을 감당 못해 휘어진 코코넛 나무, 화산이 만든 열대 우림, 그 뒤로 숨은 녹색 계곡, 가시지 않는 홍시 빛 석양, 옥색과 녹색이 페이스트리처럼 정밀하게 겹친 1백만 개의 바다 색….

모든 길은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노면이 고르지 못한 2차선 길에 온화하면서도 무거운 바람이 불었다. 사탕수수 숲 사이로 떠오른 태양은 풀잎에 스민 습기를 말렸다. 구름 뒤로 보이는 빛은 식물들을 녹색으로, 노란색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앞은 무성한 녹색 숲, 옆은 멧돼지들이 관목을 벗기는 원시 삼림. 풀로 엮은 전통 집 대신 야트막한 콘크리트 집이 보이고 이따금 사탕수수 트럭이 지나갈 때, 시간은 나른하다기보다 천천히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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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6배, 18270제곱킬로미터에 걸쳐 흩어진 섬들의 나라에선 어느 것도 단순하지 않았다. 피지의 숙명은 형제처럼 서로 당기고 밀며 다름과 같음 사이에 놓여 있었다. 태평한 태양 빛과 따뜻한 빗줄기의 동시성, <블루 라군>과 <캐스트 어웨이>의 촬영지인 채 식인 풍습을 둘러싼 왁자한 속설, 인구 90만 명을 반씩 차지한 토착 원주민과 피지 정착 인도인의 비율, 아름다움과 위험의 균형, 개발과 생태학의 위협, 2차대전 참전과 부족 단위 생활 풍속의 대비, 감리교 교회와 럭비 운동장으로 짜인 생활의 요체, 세상에서 딱 네 곳에만 있다는 날짜변경선 표지…. 불확실성과 혼란 아래 더 깊은 정적이, 안식의 층 위에 갈등의 층이, 다시 그 위에 역사가, 그리고 맨 위에 요동치는 변화의 층이 쌓인 나라에선 곤충과 방목된 소조차 특별해 보였다.

하지만 피지의 가장 강렬한 매혹은 누구도 아닌 피지 사람이다. 건강하게 그을린 근육질 남자는 마가린보다 상냥하고, 체격이 달처럼 동그란 여자는 구슬보다 활달하다. 여자들이 피지 미래의 지표라는 생각은 내내 떠나지 않았다. 생기 있는 포근함, 복선이 없는 미소, 선선한 태도가 풍기는 사회적 책임감, 백사장처럼 크고 용맹스러운 심장…. 다정함을 숨기지 못하는 그들의 입술에선 늘 마법의 용어가 흘러나왔다. 만날 때도 헤어질 때도 잠깐 스칠 때도 “불라!(안녕!)”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 처음 본 사이의 애매한 얼음을 깨는 말.

질문은 호를 그리며 넓게 퍼져갔다. 이렇게 기묘한 친숙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영혼의 존재를 믿는 노인들과 아름다움의 강박 없이 충분히 예쁜 여자들의 뿌리는 어디로 연장될까? 순수란 누가 나를 진정 사랑할 때 얻는 완전한 가치 아닌가? 내 자신, 매 순간 이 땅의 평화를 깨는 때묻은 침입자처럼 느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바누아투의 영국과 프랑스, 프렌치 폴리네시아의 프랑스, 쿡 아일랜드의 뉴질랜드, 사모아의 독일과 뉴질랜드, 아메리칸 사모아의 미국처럼, 피지에도 영국과 인도의 자취가 드넓게 퍼져 있다. 하지만 100년간 영국 식민지였으되 3000년의 고유한 빌리지 문화를 고수하는 지구력에는 굳은 바위도 손을 들 수밖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리조트들은 피지 군도의 몇백 개 작은 섬들에 보석처럼 퍼져 있다. 모든 것이 전원적이지만 해안에 입립한 리조트들의 막강한 위력은 독점성에 있다. 누가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새벽에 산책하다 보면 갖고 싶던 호젓함과, 호화스럽단 말론 부족한 호사가 이율배반적으로 몸부림쳤다. 그 모두 로빈슨 크루소처럼 도피하고 싶은 사람에겐 질투심으로 기절할 요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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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통가는 어쩐지 타히티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투타키는 보라보라의 초호와 자주 비교된다. 그럼 피지는 어디와 닮았지? 뉴칼레도니아? 이비자? 울릉도? 답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피지 같은 데는 피지밖에 없다….

아침마다 쉬고 놀고 만지면서 천국의 모든 것을 미리 연습한다. 무엇을 하건, 또 하고 싶건 내 자신이 주인이 된다. 그 다음엔 바람을 맞고 석양을 맛본다. 그것이 천국에서 보내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선크림 SPF40을 수시로 펌프질하는 낮이면 한없이 하얀 구름이 하늘 높이 움직이거나 바다 위에서 나긋나긋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하늘이 비추는 바다, 바다가 되비추는 하늘을 보았다. 술 취한 바보처럼 계속 싱글거리며, 형언할 수 없는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활화산을 기어오르는 달팽이를 만났다. 절벽 쪽으로 나 있는 가파른 계단 위에서 바다로 이어진 검은 바위의 단단한 면을 만지며 물속으로 흘러가 지표면이 된 오렌지색 용암을 상상해보았다.

해가 지면 바다는 얼핏 푸른빛을 남긴 하늘과 합쳐졌다. 그 경계 사이로 브론즈 빛 황혼은 수증기 같은 분홍빛으로 변했다. 건너뛰듯 다시 검게 바뀌고 나면 구름에 가려져 있을 때도 은박지처럼 반짝거리는 별이 설탕처럼 쏟기듯 몰려나왔다. 정말이지 물결에 쓸려 표류하는 선원들의 공포를 달래준 건 콜로라도의 달이 아니라 피지의 별 무리가 아니었을까.

밤마다 와인을 마시며 파도가 모래를 치는 소리를 들었다. 잔디에는 이슬이 없었고, 흙은 부드럽게 건조했다. 야자수 잎사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지상의 것이 아니었다. 낮의 혹독함을 보상하는 선물 같은 바람이었다. 마타마노아 아일랜드 리조트에서 피지의 청결한 물로 만든 비터 맥주와 골드 맥주를 몇백 갤런 마실 땐, 성운 사이로 어제와 다른 바람이 불었다. 실크 재킷 같은 바람을 맞고 있으니 내가 피지에 있다고 결단코 맹세할 수 있었다.

“바람이 저미듯이 불고 있어. 꼭 이불홑청 같아.”

내 말이 독백인지 방백인지 나도 헷갈렸다. 총괄 매니저 패트릭 웡 씨가 시처럼 덧붙였다.

“그래. 씨브리즈가 불어오고 있어….”

황홀했다. 현실에 묶인 생활로 되돌아가야 하는 침울한 황홀이었다.

“나, 너무 행복해서 미친 것 같아.”

“넌 미칠 필요가 있어. 미치는 건 좋은 거야. 아주 흥미롭단 말이야.”

폴리네시아에서 춤은 예술 형태의 최고점이다. 그러니까, 쿡 제도 춤의 움직임은 타히티 사람들의 춤보다 육감적이다. 하지만 마음을 떠미는 열대의 어떤 예술도 피지 사람들의 노래만 못했다.

밤에 누군가 기타 코드를 짚기 시작했다. 코드가 화음이 되자 순전한 목청들은 브라스보다 장중한 노래를 만들었다. 바이브레이션은 징소리보다 깊게 울렸다.

여기 올 때 피지의 환영 노래 ‘불라 말레야’를 불러주던 사람들이, 떠날 때는 ‘이살레이Isa – lei’로 환송해주었다.

“넌 그렇게 외롭게 내곁을 떠나야 하나 / 시드는 장미 저무는 석양처럼 / 보랏빛 새벽 그림자가 스러져 가고 / 아침이 내 슬픔 위에 서럽게 밝아온다….”

돌아오기 전날, 맨발로 잔디를 걸었다. 산책로에서 티아레 꽃향기를 맡았다. 읽으려던 책을 도로 내려놓고 한숨을 쉬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결국 어디가 나의 진짜 고향이었을까? 인생을 바꾸고 싶은 곳은 어디였을까? 다른 곳은 왜 아니었을까?

나는 피지가 준 갑작스러운 안도감과 사랑에 빠졌다. 사랑처럼 짧은 시간의 마법은 늙어서까지도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공항 가는 길에, 미처 보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것들이 다시 보였다. 비행기에서 햇빛이 비추는, 고요하지만 이상하게 슬픈 나라를 내려다보았다. 천국에서 머물고 난 뒤 시간은 어떻게 변할까. 피지의 느린 동화 같은 이야기도 언젠가 시들어버릴까…. 몇 분이 지나자 나는 걷어차이듯 추방당하고 말았다. 다시는 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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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의 밤하늘은 다만 신묘할 따름이다. 그렇게 수많은 색채를 담고도 별들이 운행하는 광경이 보일 듯 투명하게 펼쳐져 있다. 손을 내밀면 손바닥에 쏟아질 것처럼.

    에디터
    이충걸
    포토그래퍼
    김진석
    취재 협조
    주한 FIJI 관광청(www.HappyFIJI.travel), 로지 홀리데이즈(www.RosieFIJ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