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은 제법 알아도, 띄어쓰기를 정확히 하는 건 포기했어도, 한국어 쓰기 문법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한국어 쓰기 문법은 정규교육 이상의 지식과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이제 국어 선생님 없이 해나가야 하는 교양인의 한국어 쓰기 문법에 대해, 국립국어원 김문오 연구관에게 문의했다.
한국어 쓰기 문법을 말할 때 누구나 강조하고 언제나 등장하는 대목이다. 한국어는 피동으로 쓰면 어색하다는 것. 그런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나는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같은 지나친 피동문은 어색하다. “나는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처럼 능동문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➊ ─ 가 ~ ➊ ─ 다의 예문 중 ➊ ─ 다가 가장 자연스러운 문장이다. ➊ 가. 바위에 구멍이 철수에게(철수한테) 뚫리었다. / 나. 바위에 구멍이 철수에 의해 뚫리었다. / 다. 철수가 바위에 구멍을 뚫었다. 한국어에서도 분명히 피동으로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피동을 써야 자연스럽다. ➋ 가. 죄의식이 항상 그를 쫓는다. / 나. 그가 항상 죄의식에 쫓긴다. ➌ 가. 바람이 문을 닫았다. / 나. 문이 바람에 닫기었다. ➋ ─ 가, ➌ ─ 가는 능동적 의지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물 주어를 능동문의 주어 자리에 두었으므로, 비정상적인 문장이다. 마찬가지로 “열매가 열리다”, “날씨가 풀리다” 등은 어떤 능동문과도 관계를 지을 수 없으므로 피동문으로만 써야 한다.
이중 피동은 어떤가? 잊히다와 잊혀지다는 다른 의미이며, 잊혀지다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입장이 있다. ‘잊혀지다’는 이중 피동 표현으로서 부적절하며, ‘잊히다’나 ‘잊어지다’를 쓰는 것이 문법적으로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잊혀진 역사는 잊힌 역사 혹은 잊어진 역사가 맞다. 형용사 ‘밝다’ 에서 파생된 ‘밝히다’라는 사동사에 다시 ‘어지다’가 결합돼 ‘밝혀지다’ 라는 피동사가 파생되기도 하는데, ‘잊혀지다’는 이와 같은 사동사에 ‘- 어지다’가 결합된 형태로 유추해 언중들이 쓰는 것으로 보인다. ‘잊히다’ 와 ‘잊혀지다’가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다음과 같이 ‘- 히-’ 피동사형과 ‘-어지다(-아지다)’ 형 간에 의미 차가 있는 경우는 있다. ➊ 가. 유리 조각이 몸에 박히었다(박혔다). / 나. 유리 조각이 몸에 박아 졌다(부단히 애쓴 결과로). ➋ 가. 연이 전깃줄에 걸리었다(걸렸다). 나. 연이 전깃줄에 걸어졌다(부단히 애쓴 결과로). ➊, ➋의 예에서 가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고, 나는 그런 결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어떤 의도적인 힘이 가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했었다’와 ‘했었었다’는 다른 표현인가? ‘했었었다’는 완료된 과거를 나타내는 것처럼 들리지만, 틀린 문법으로 여겨진다. ‘-었었-’은 현재와 비교하여 다르거나 단절된 과거의 사건을 나타내는 어미다. 예컨대, 작년만 해도 이 저수지에는 물고기가 적었었다(지금은 많지만), 이번에 농구 선수로 활약한 저 선수는 왕년에 배구 선수이었었다(지금은 배구 선수가 아니지만). 그러나 ‘했었었다’는 ‘–었-’이 세 번 겹친 형태로, 비문법적인 표현이다. ‘-었-’은 다음과 같은 의미와 기능이 있는 어미다. 첫째,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볼 때 사건이나 행위가 이미 일어났음을 나타낼 때. “예전에는 명절에 선물로 설탕을 주었다.”, “철수는 이미 밥을 먹었다.” 둘째,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볼 때 완료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거나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구나.”, “간밤의 비로 강물이 많이 불었다.” 셋째,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볼 때 미래의 사건이나 일을 이미 정해진 사실인 양 말하는 경우. “야, 이대로만 공부하면 틀림없이 대학에 붙었다.”, “날씨가 이렇게 가무니 올해 농사는 다 지었다.”
인용절을 쓸 때 ‘-고’, ‘-라고’를 생략해서 쓸 수 있을까? 주인이 “많이 드세요”라고 권한다. / 그중 하나가 나서서 “내가 바로 홍길동이다”라고 소리 쳤다. / 조카가 나에게 “삼촌은 비 내리는 소리가 좋으세요?”라고 물었다. 이 인용문에서 인용 조사를 생략하더라도 뜻이야 통하겠지만 자연스럽고 문법에 맞는 국어 문장이 성립되지는 않는다. 아래 ➊처럼 직접 인 용일 때는 인용 조사 ‘라고’나 ‘하고’를 넣는 것이 자연스럽고, ➋처럼 간접 인용일 때는 간접 인용의 조사 ‘-고’를 안 쓰면 비문법적 문장이 된다. ➊ 가. 주인이 “많이 드세요” 권한다. / 나. 그중 하나가 나서서 “내가 바로 홍길동이다” 소리쳤다. / 다. 조카가 나에게 “삼촌은 비 내리는 소리가 좋으세요?” 물었다. ➋ 가. 주인이 나한테 많이 들라 권한다.(들라고~) / 나. 그중 하나가 나서서 자기가 바로 홍길동이라 소리쳤다.(홍길동이라고 ~) / 다. 조카가 (삼촌인) 나에게 비 내리는 소리가 좋으냐 물었다.(좋으냐고~) / 라. 여우는 접시에 고기를 담아주면서 황새에게 많이 먹으라 했다.(먹으라고~) / 마. 친구는 선선히 그 책을 빌려 주마 했다.(주마고~)
“아버지가 담을 높게 한다” 혹은 “아버지가 담을 높인다”라고 쓴다. 장형 사동문이 좀 더 간접적으로 느껴지고, 단형 사동문이 좀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은 줄일수록 좋다는 입장에 따라 단형 사동문을 우월하게 보는 시선도 있다. ➊ 가. 아이 어머니가 아이에게 새 옷을 입혔다(입히었다). / 나. 아이 어머니가 아이에게 새 옷을 입게 했다. ➋ 가. 철수가 동생을 자기 방에서 울렸다(울리었다). / 나. 철수가 동생을 자기 방에서 울게 했다. ➊ ─ 가에서는 아이 어머니가 직접 아이에게 새 옷을 입혔다는 해석과 아이 어머니가 아이로 하여금 스스 로 새 옷을 입도록 했다는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➊ ─ 나는 아이 어머니가 아이로 하여금 스스로 새 옷을 입도록 했다는 해석만 가능하다. ➋ ─ 가에서는 철수가 자기 방에서 동생을 괴롭히거나 때리거나 해서 직접 울렸다는 것이고, ➋ ─ 나에서는 동생이 울게 된 원인이야 모르지만 (밖에서 울지 말고) 자기 방에 가서 울게 조처했다는 뜻이다. 이처럼 단형 사동문(사동사에 의한 사동문)은 주어의 간접 행동은 물론 직접 행동도 나타내는데, 장형 사동문(게 하다 사동문)은 주어의 간접 행위만 나타낸다. 그런 면에서 장형 사동문이 좀 더 간접적으로 느껴지고, 단형 사동문이 좀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는 표현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글은 간결 할수록 좋다는 입장에 따라 단형 사동문을 우월하게 보는 시선은 문제가 있다. 단형 사동문과 장형 사동문은 통사적(문법적)으로 다른 면이 있으므로 각각을 다 인정해야지, 어느 하나가 더 바람직하고 다른 것은 곤란하다는 인식은 잘못됐다. 단형 사동문과 장형 사동문은 다음과 같이 통사적으로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부사의 수식 범위가 다르다. ➌ 가. 나는 철수에게 그 책을 못 읽혔다. / 나. 나는 철수에게 그 책을 못 읽게 했다. ➌ ─ 가에서 부사 ‘못’은 철수에게 책을 읽히는 나의 행위가 불가능했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➌ ─ 나에서는 철수가 그 책을 읽을 수 없도록 했다는 뜻으로 쓰인다. 둘째, 보조 동사의 쓰이는 자리가 장형 사동문에서는 더 자유롭다. ➍ 가. 나는 철수에게 책을 읽혀보았다. / 나. 나는 철수에게 그 책을 읽어보게 하였다. / 다. 나는 철수에게 그 책을 읽게 해보았다. 단형 사동문에서는 보조 동사 ‘보다’가 사동사 다음에만 쓰일 수 있으나, 장형 사동문인 나, 다에서는 보조 동사가 쓰일 수 있는 자리 가 두 군데 있으며, 따라서 그 뜻도 변화 있게 쓸 수 있다. 셋째, 주체 높임의 ‘-시-’가 쓰일 수 있는 자리가 단형 사동문에서는 한 군데밖에 없으나, 장형 사동문에서는 두 군데가 있다. ➎ 가. 선생님께서 철수에게 책을 읽 히시었다. / 나. 선생님께서 철수에게 책을 읽게 하시었다. / 다. 우리들이 선생님께 책을 읽으시게 하였다. / 라. 박선생님께서 우리 선생님께 책을 읽으시게 하시었다. 단형 사동문인 ➎ ─ 가에서는 사동문의 주어만 높여서 말할 수 있지만, 장형 사동문인 ➎ ─ 나 ~ ➎ ─ 라는 사동문의 주어만 높일 수도 있고, 시킴을 받는 사람을 높일 수도 있으며, 둘을 동시에 높일 수도 있다. 넷째, 장형 사동문에서는 사동사를 다시 사동화할 수 있다. ➏ 내가 철수에게 토끼한테 풀을 먹이게 하였다.(철수가 토끼한테 풀을 먹인다 + 내가 철수한테 그리하게 하였다) ➏은 ‘먹이다’가 이미 사동사인데 장형 사동(‘먹이게 하다’)은 그것을 재차 사동화한 것이다.
‘는 것’, ‘는 것이’, ‘는 것은’, ‘는 것을’ / ‘는 거’, ‘는 게’, ‘는 건’, ‘는 걸’. 각각 이렇게 줄여서 쓰면서도 미심쩍다. 줄여서 써도 괜찮은가? 둘 사이의 차이는 없나? ‘는 것’, ‘는 것이’, ‘는 것은’, ‘는 것을’ / ‘는 거’, ‘는 게’, ‘는 건’, ‘는 걸’로 줄여 쓸 수 있다. 다만 ‘는 거’, ‘는 게’, ‘는 건’, ‘는 걸’은 구어체(입말체)의 준말이기 때문에 공문서나 문어체를 써야 하는 점잖은 상황에서는 준말을 삼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붙여 쓴 ‘-는걸’은 “(구어체로) 해할 자리나 혼잣말에 쓰여, 현재의 사실이 이미 알고 있는 바나 기대와는 다른 것임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로서, 가벼운 반박이나 감탄의 뜻을 나타 낸다. 그때는 아직 서로 얼굴도 모르고 있었는걸? / “그럼 손가락을 빼면 되잖아.”, “손가락을 빼면 물이 새는걸?” / 야, 눈이 많이 쌓였는걸! / 아기가 춥겠는걸. 이 같은 예에서는 어미 ‘는걸’을 ‘는 것을’로 바꾸면 어미 ‘-는걸’의 의미와 기능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대로 ‘는걸’로 써야 한다.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어색해서 잘 안 쓰는 표현 중 하나가 그랬기를, 몰랐기를, 하나가 있었음을, 무죄임을, 건강하심을 등의 명사절이다. 괜한 결벽일까? 예로 든 명사절을 굳이 피할 이유는 없다. ➊ 가. 그가 돈이 (많음/많은 것)이 분명하다. / 나. 금년에도 너의 일이 잘 (되기를/ 되는 것을) 바란다. / 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했음)을 알고 있었다. / 라. 우리는 그들이 친절히 대해 (줄 것을/주기를) 기대했다. 다만 ‘-음/ㅁ’ 명사절이나 ‘것’ 명사절은 ‘드러나다, 밝혀지다, 알려지다, 탄로나다, 알다, 모르다, 기억하다, 부인하다, 짐작하다, 발표하다, 보고하다, 통지하다, 부당하다, 타당하다, 이상하다, 묘하다, 현명하다, 적합하다, 어리석다…’ 등의 용언을 서술어로 하는 문장의 성분으로 쓰인다. 그리고 ‘-기’ 명사절은 ‘바라다, 희망하다, 빌다, 갈망하다, 기다리다, 기대하다; 좋다, 나쁘다, 알맞다, 적당하다…’ 등의 용언을 서술어로 하는 문장의 성분으로 쓰인다. ‘음’ 명사절과 ‘것’ 명사절은 대부분 서로 엇바뀌어 쓰일 수 있는데, 구어체에서는 ‘음’ 명사절보다 ‘것’ 명사절이 많이 쓰이는 경향이 있다. 어떤 때 어떤 명사절이 쓰이는 것은 그것을 안고 있는 문장의 서술어가 되는 용언의 종류에 따른 것이지만, ‘맹세하다, 약속하다, 서약하다; 쉽다, 어렵다, 가능하다, 편하다…’ 등은 ‘-음/ㅁ’ 명사절, ‘것’ 명사절, ‘-기’ 명사절 모두를, 또 ‘권하다, 부탁하다, 요청하다, 강조하다…’ 등 은 ‘것’ 명사절, ‘-기’ 명사절 모두를 문장 성분으로 취할 수 있다.
이것이 바른 예이다 / 이것이 바른 예다. ‘-이-’를 지워도 무방할까? “이것이 바른 예이다”는 모음 어근 아래에서 준대로 표기하지 않고 원말로 표기한 예이고, “이것이 바른 예다”는 모음 어근 아래에서 준 대로 표기한 예다. 둘 다 맞는 표기이지만, 문어체 문장에는 모음 어근 아래 ‘-이다’, 구어체 문장에는 모음 어근 아래 ‘-다’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친구 집엘 갔다 / 여기엔 없다. 조사를 줄여 쓰는 건 문법적으로 허용되나? 둘 다 맞는 표기이지만, 문어체 문장에서는 ‘집에(를)/여기에는’을, 구어체 문장에서는 ‘집엘/여기엔’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중 조사는 지우는 게 일반적인데, 문법적으로는 쓰인다고 알고 있다. 철수는 학교에를 간다 / 자유에의 의지. 과연 그런가? 조사 연결체는 의미 전달상 필요하고 국어에서 가능한 자연스러운 결합일 경우에는 허용된다. 그런데 ‘철수는 학교에를 간다’라는 표현에서 ‘를’은 목적격 조사가 아니고 초점, 강조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보조사다. 이 경우 문법적으로 가능한 표현이므로 ‘철수는 학교에 간다’만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한편 ‘자유에의 의지’는 흔히 일본어 번역 투로 지적되는 표현이다. ‘자유를 향한 의지’로 바꾸는 것이 국어로서 좀 더 자연스럽다. ‘남북통일에의 염원’은 ‘남북통일을 향한 염원’, ‘군인으로서의 임무’는 ‘군인으로서 해야 할 임무’, ‘청소년과의 대화’는 ‘청소년과 하는 대화’로 바꿀 수 있다. 이처럼 ‘로의, 로서의, 에의, 에서의’ 등의 조사 연결체에서 맨 끝의 ‘의’ 대신 적절한 동사나 형용사의 관형형을 챙겨 쓰면 보다 더 자연스러운 국어 표현이 된다.
일부 답변의 설명 및 예문은 < 표준 국어 문법론(개정판) >, < 표준국어대사전 >에서 인용.
-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이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