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아름다운 도시는 많지만, 자꾸 돌아가고 싶은 도시는 드물다. 비엔나에서 살면 어떨까. 비엔나에 다녀온 뒤로 걸핏하면 그 말을 중얼거린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의 잔물결 영어로 도나우인지, 독어로 다뉴브인지 늘 헷갈리는 이름. 알프스에서 발원하는 도나우 강은 내내 지하로 흐르다가 비엔나에서 처음 햇빛과 만난다. 당도한 도나우 강에 백조가 노닐고 있었다. 왈츠 두 곡의 멜로디를 뒤섞듯이 흥얼거렸다.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
요한 슈트라우스 슈타트파크 요한 슈트라우스의 황금빛 동상 앞에서 춤추는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왈츠 아니면 폴카. 미소가 절로 번지는 풍경이다. 그런데 짧은 소나기가 지나던 오후에 ‘천둥과 번개’ 폴카를 튼 어여쁜 이는 누구였을까. 따뜻하고 기쁜 마음으로 공원을 나서는 발걸음에는 ‘라데츠키 행진곡’이 힘차게 울려 퍼지는 듯했다.
모르는 이름 슈트라우스, 실레, 모차르트, 클림트, 호프만, 카라얀, 제시와 셀린…. 비엔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기에 자연스런 도시다. 그들이 여기서 보낸 시간이 여전히 차분하게도 고여 있으니, 걸으면 걷는 대로 그들을 대할 수 있다. 클림트와 실레의 그림이 걸린 레오폴드 뮤지엄에서 모르는 이름을 만났다. 화가의 이름은 콜로만 모저 Koloman Moser, 그림 제목은 ‘산맥 Bergketten’, 뜻밖에도 그 그림 앞에 오래 머물렀다. 도시는 갑자기 이렇게도 새로워진다. www.leofoldmuseum.com
클림트의 사인 취향으로만 말하자면 나는 클림트의 그림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으니, ‘Kiss’를 봐야만 하는 의지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문득 오른쪽 귀퉁이에 대문자 열두 개로 쓰인 그 소극적인 글씨가 전혀 다른 클림트를 소개하는 듯했다. 평면이 입체가 되는 순간의 떨림.
컨템포러리 제아무리 고풍스런 도시라 해도, 결국 그곳을 숨 쉬게 하는 것은 ‘젊음’이다. 그렇게 동시대다. 파크라는 멀티숍에서 원디렉션 출신 제인 Zayn이 표지를 장식한 < DAZED AND CONFUSED >를 보았을 때, 비엔나는 누구의 어떤 시대도 아닌 지금 바로 여기의 도시가 되었다. www.park.co.at
언젠가 프라터에서 생길 일 프라터 Prater는 아주 오래된 유원지다. 영화 < 비포 선라이즈 >의 제시와 셀린이 함께 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관람차가 아니더라도, 매우 다양한 놀이기구가 있다. 하지만 사방팔방 북치고 장구치듯 번잡스럽진 않다. 어떤 쓸쓸함이야말로 프라터의 매력이다. 놀이동산을 조용히 산책하다 보면 여기에 언젠가 누군가와 다시 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고 만다.
클림트와 베토벤 20세기를 ‘단절’과 ‘분리’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빈 분리파의 전당, 제체시온 Secession 지하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 듣기. 비엔나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다. 빈 분리파는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베토벤을 기리고자 했고, 마침내 구스타프 클림트는 ‘환희의 송가’에 바치는 벽화를 남겼다. www.secession.at
길가의 클래식 국립 오페라 극장 회랑을 끼고 아르카디아 Arcadia라는 가게가 있다. 거기서 카라얀이 비엔나 필과 함께한 R. 슈트라우스의 < Salome > LP를 샀다. 겨우 7유로에.
호텔 자허에서의 아침 식사 “조식은 어디서….” 체크인을 하며 공연히 말끝이 구부러지려는데, 단정한 벨보이가 이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언제 지나도 아름다운 로비를 건너 그가 당도한 곳은 엄격한 장식이 있는 흰색 문 앞. 이윽고 문을 여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위의 사진과 같았다. 그 후로 사흘 동안, 치성을 드리는듯한 정성스런 그루밍이 아침마다 이어졌다. 깨끗한 셔츠를 입고, 머리를 잘 빗고 난 후에야 그곳으로 갔다.
호텔 자허 과연 아름다운 호텔이다. 기나긴 역사, 그만큼 엄청난 투숙객 명단, 스스로 조용히 옷차림을 점검하게 되는 무드, 아주 개인적으로만 들리는 그 안의 소리들, 언제까지나 이 모습 그대로일 거라는 믿음, 겹겹이 놓인 욕실의 흰 수건들, 방금 구입한 슈트라우스의 앨범을 방에서 들을 수 있는 낭만적인 편의, 복도와 엘리베이터가 이어지는 각도 같은 것, 비엔나 한가운데라는 충만한 공간감, 명물 케이크 ‘자허 토르테’의 진짜 맛,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묘사가 황홀할 수밖에 없을 로비, ‘Ligne ST Barth’ 제품을 쓰는 스파, 어제와 다른 꽃들, 오늘의 새로운 인사. www.sacher.com
슈퍼센스라는 곳 < MONOCLE > 은 이곳을 표현하기를, ‘올드-스쿨 크리에이티브 스페이스’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에 어울리는 곳이다. 자신만의 포스터를 인쇄할 수도, 자신만의 음악을 LP로 만들 수도 있다. 좋은 시간을 정해 주인이 엄선한 음식을 즐겨도 그만. www.supersense.com
글라디올러스 박물관 MAK에 딸린 ‘젊은’ 레스토랑 ‘살롱 플라폰트’에서, 드물도록 멋진 빈티지 숍 ‘펭!’에서, 투박한 듯 관점이 뚜렷한 요리를 내는 레스토랑 ‘랍스텔’에서 같은 꽃을 보았다. 글라디올러스였다. 한 도시에서 가장 많이 마주친 꽃을 기억하기로, 비엔나는 선명하고 뚜렷하고 아름다웠다.
쇤부른이라는 발음 합스부르크 왕가의 번영과 파멸. 지금 쇤부른 궁전에서 열리는 전시 < Man & Monarch >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개인사를 일대기 형식으로 다룬다. 19세기와 20세기. 찬란하게 농축된 유럽의 이야기. 전시는 올해 11월 27일까지 계속된다. www.schoenbrunn.at
슈테판 성당을 지나는 구름 첨탑의 높이는 1백37미터. 성곽 도시 비엔나는 둥글고, 슈테판 성당은 도시 어디서든 기꺼이 이정표가 되어준다. 그런데 막상 첨탑 아래로 가서는 구름이나 본다. 사방이 트였으니 어디서 어떻게 구름이 오는지, 어디로 어떻게 구름이 가는지 다 보인다. 처음 짓기 시작한 연도는 1147년. 구름을 보며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프라터 옆, 합프트알레 Hauptalle는 실로 장대한 산책로다. 5킬로미터에 이르는 대로에는 수많은 좁은 길이 나뭇가지처럼 나 있다. 가장 많은 나무는 마로니에였다.
골목길 슈테판 성당 주위에는 오래된 골목길이 많다. 길 잃을 걱정도 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골목길을 걷다가 네모난 거울 하나를 발견했다. 아무 뜻도, 목적도 없이, 그냥 거기 걸려 있는 거울. 그것을 비엔나의 허파꽈리라고 명명해 보았다.
겨울 비엔나 아름다운 도시의 조건. 지금과 다른 계절을 떠올리게 될 것. 테오도르 폰 회르만의 그림 ‘The Neuer Markt in Vienna’를 보면서, 비엔나의 겨울을 떠올렸다. 1백 년 전 풍경이지만, 달라진 건 사람들의 이름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마티아스 카이저의 꽃병 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지만, 그의 도자기는 동양적인 무드에 담겨 있다. 고요한 것을 더 고요하게 만드는 물성과 양감, 아직 꽂지 않은 가지의 선들. 간츠 노이 갤러리에서 빈 꽃병을 들어 보았는데, 아기를 안을 때처럼 그 무게가 매우 특별한 감각을 주었다.matthiaskaiser.com
카페와 사회 물론 비엔나의 저 유명한 카페들은 모두 여행객에게 점령당했다. 카페 첸트랄 Cafe Central에 들어가려면 얼마쯤 줄을 서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치가 있다. 점령당한 건 자리일 뿐, 분위기가 아니다.
빈잔 롭마이어 J&L Lobmeyr에 들러 물욕을 시험하다니, 그저 어리석은 일이다. 거기는 수도원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게인 것을. 샹들리에와 거울, 꽃병과 와인 잔, 쓸데없이 아름다운, 알 수 없이 투명한, 어쩌자고 빛나는 것들. 지갑이 열리고 파티가 시작된다. www.lobmeyr.at
모차르트와 아이들 요한 슈트라우스의 동상 앞에서는 춤을 추는 이가 그리 많더니, 모차르트 동상 앞에는 옹기종기 아이들이 자주 왔다.
파와 마늘 비엔나에서 사흘을 보냈는데 음식에 은근히 ‘파’가 많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호텔 자허의 오믈렛에도 송송 썬 파가 나왔다. 호기심은 식료품 시장인 나슈 마르크트에서 가장 뜨거워졌다. 호객하는 말은 독일어인데, 공기는 분명 중동의 시장이었다. 호텔 자허 테라스에 마늘 한 뿌리를 올려놓고 새삼 생각했다. 여기, 비엔나는 어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