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장은 13개의 식당, 1개의 빵집, 2개의 바, 그리고 요리 연구소 한 곳을 아우르는 모모후쿠를 경영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음식은 동일한 맛의 양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첫 식당인 ‘모모후쿠 누들 바’는 주방이 개방형이었다. 손님 앞에서 하는 요리는 내가 음식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초기였던 2004년 즈음 우리는 매일 새로운 요리법을 즉흥적으로 만들었고, 손님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 어떤 것이 효과가 있는지를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훌륭한 요리는 먹는 사람을 강렬하게 자극한다. 대화가 갑자기 흐트러지고 발가락을 채였을 때 내는 콧소리를 내뱉는 순간, 그 행복의 찰나가 보인다.
‘모모후쿠 포크번’은 계속해서 이런 반응을 얻은 첫 번째 성공작이다. 실은 급하게 대충 만든 요리인데…. 삼겹살 위에 해선장, 쪽파, 오이를 얹어 찐빵 속에 넣었다. 그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베이징 덕 번을 오리 대신 삼겹살로 써서 내 식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열광했다. 온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먹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성공을 거둔 음식이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시점과 장소에서 나왔다. 게다가 또 다른 성공작을 15분 만에 만들어냈다.
솔직히 난 아직도 요리 기술이 좀 어색하다. 재주, 속도, 기술의 부족을 메우려고 계속해서 재료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 우리가 만든 가장 성공적인 음식에서 그 성공이 완전히 우연은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어떤 양식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된다. 나는 이걸 ‘맛있음의 통합 이론’이라고 부른다. 좀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다.
이 이론은 대학에서 들은 고급 논리학 수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워드 들롱이라는 철학자가 맡은 강의였다. 첫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수업은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거예요.” 난 이런 기분이었다. “이 멍청이는 뭐지?” 하지만 그가 옳았다. 그 수업에서 얻은 발상과 개념은 나를 사로잡았다.
들롱과 호프슈타터는 호프슈타터가 명명한 ‘이상한 순환’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이는 수학적 체계나 예술작품, 또는 음악이 되돌이로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에셔의 그림은 이상한 순환의 위대하고 명시적인 사례다. 두 손이 서로를 그리는 유명한 작품을 보자.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를 구별할 수 없다. 이렇듯 이상한 순환과 마주치면 관점이 달라진다.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갑자기 생각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주 최근 일이다. 아마도 이 생각의 일부를 음식에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확히 그려내거나 꼼꼼한 수치로 변환시키긴 힘들어도 내가 맛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사실 지난 몇 년을 돌이켜보면, 이런 식의 개념이 우리 레스토랑의 유명한 메뉴를 탄생시킨 것 같다.
생각의 첫 번째 계기는 소금이었다. 소금은 가장 기본인 동시에 끔찍하게 복잡하다. 요리사는 음식에 얼마만큼의 소금을 넣어야 할지를 가늠하다 미쳐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정확한 소금의 분량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직관’에 기초하는 생각이다. 보통 사람들은 균형 잡힌 음식을 너무 짜지도 너무 싱겁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건 틀린 생각이다. 완벽하게 간이 된 음식은 너무 짜고 너무 싱거운 맛이 동시에 난다. 두 가지 맛이 완전히 동시에 존재한다.
직접 해보자. 소금의 양을 달리 넣은 물을 여러 잔 준비한다. 물을 맛보면 소금이 너무 많이 들었는지 너무 적게 들었는지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험을 계속하면 마침내 이상적인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너무 싱겁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든 순간, 갑자기 짠맛이 강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불안정한 상태인 것이다. 일단 그 느낌을 경험하면 평생 어느 순간에 무엇을 먹든지 그 감각은 머릿속에 남아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이는 들롱의 수업에서 배운 저 유명한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조금 비슷하다. “다음 문장은 참이다. 이전 문장은 거짓이다.” 처음 문장을 읽으면 다음 문장이 유효하다. 그런데 다음 문장은 처음 문장을 무효로 만든다. 그래서 다음 문장이 무효가 된다. 그렇다면 처음 문장은 유효가 된다. 그리고 반복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감각을 알아차리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그 음식의 맛이 좋다고 찬사를 보낼 뿐이다. 하지만 기저에는 염분의 역설이 아주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역설이 무엇을 먹는지와 그에 대한 반응을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을 자극하고, 그 순간을 유지시키고, 무엇을 먹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몇 년 전, 발효 실험에 몰두한 적이 있다. 된장은 대두를 발효시켜서 만든다. 하지만 견과류, 씨앗, 다른 콩류를 발효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결과는 성공. 특히 나는 발효시킨 병아리콩의 맛을 좋아한다. 그 결과물을 병아리콩 호존(한자어 보존의 일본어 발음)이라 부른다. 진짜 된장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고안한 표현이 호존이다.
‘모모후쿠 코’에서는 호존을 성게와 함께 낸다. ‘모모후쿠 쌈바’에서는 정어리 토스트에 호존을 얹는다. 호존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일수록 된장 같은 감칠맛이 나고 페코리노 로마노를 연상시키는 달콤함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존으로 고전적인 음식인 카초 에 페페의 새로운 변주를 만들면 어떨지 궁금했다. 카초 에 페페는 간단한 음식이다. 파스타에 후추, 올리브유, 페코리노 로마노 치즈 세 가지만 넣는다. 하지만 이 재료들로 짭짤함, 국수의 쫄깃함, 후추의 은근한 매콤함 그리고 지방의 부드러움이 벌이는 위대한 상호작용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페코리노 치즈에 든 글루탐산의 감칠맛 덕이다. 그래서 우리는 후추와 파스타는 그대로 두고 올리브유 대신 버터를, 페코리노 로마노 대신 병아리콩 호존을 써서 세시 에 페페(세시는 이탈리아어로 병아리콩)를 만들었다.
발상 자체는 그리 독특하지 않다. 하지만 정말로 흥미로운 지점은 전 세계의 다양한 음식이 이러한 기본 패턴을 공유한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런 식으로 음식 중 하나를 역설계해 다양한 음식을 실질적으로 동시에 접할 수 있다.
사례를 더 들어보자. 이탈리아 식당 ’루파’에서 조슈아 맥파든을 데려온 직후인 2006년에 우연히 또 메뉴 성공작을 개발했다. 조슈아는 내게 이탈리아식 고기 소스인 볼로네제의 변주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오직 한국식 재료만 사용해야 한다는 제한을 뒀다. 그는 양파, 셀러리, 당근, 토마토 페이스트, 백포도주 없이 볼로네제의 달콤함, 감칠맛, 얼얼함을 재창조해야 했다. 그는 쪽파, 붉은 고추, 돼지고기 간 것, 발효 콩 페이스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에게 우유 대신 휘저은 두부를 넣어 부드러운 식감을 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그는 파스타나 뇨키 대신 뇨키처럼 보이는 떡을 곁들였다. 우리는 이 음식에 ‘스파이시 포크 앤 라이스 케이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를 맛본 대부분의 사람들은(심지어 무의식의 단계에서) 강한 맛의 볼로네제를 떠올렸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이 음식을 맛보았을 때 나는 볼로네제의 맛을 느끼지 못했다. 내게는 연두부로 만든 톡 쏘고 맛이 강한 중국 음식인 마파두부의 맛이 났다. 내가 볼로네제보다는 마파 두부에 더 가까운 스타일이기 때문에 마파두부의 맛에 좀 더 강하게 반응한 것이다. 볼로네제와 마파두부 간의 어떠한 연결점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조슈아는 우연히 그 둘의 중첩점을 찾아냈다. 둘 다를 떠올리게 만드는 고유의 요소를 충분히 결합시킨 음식을 창조했다.
좋은 음식과 그저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는 음식은 다르다. 좋은 음식을 먹을 땐 인생의 다른 시점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한다. < 라따뚜이 >에서 작게 만든 라타투이를 먹은 평론가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장면과도 같다. 이런 효과를 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사람들이 백만 번은 먹어본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낯설어 보이는 음식을 만들면(맥락을 완전히 바꾸면서도 기본 패턴을 유지하는) 훨씬 더 강력하게 맛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바로 < 라따뚜이 >에서 일어난 일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음식은 사실 라타투이가 아니다. 터키 음식인 이맘 바이르디의 미셸 게라르식 변주인 콩피 바이르디를 다시 토마스 켈러가 같은 맛이 나도록 만든 것이다.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의 바 타르틴느에서 ‘어부의 스튜’를 먹었을 때 이런 경험을 했다. 나는 그 스튜를 초피노-토마토로 만든 베이 에어리어 지역의 전통 음식으로 예상했다.(개인적으로는 싫어하는 음식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음식이었다. 우선 이탈리아식이 아니라 동유럽식 맛을 기본으로 했다. 그리고 붉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었다. 약간의 묘미를 더해주는 해치 칠레 고추가 들어갔다. 감칠맛과 생선의 풍미가 가득했지만 아주 산뜻했다. 이 스튜를 먹을 때 내게 아주 강력한 반응이 일어났다. 그 이유를 깨닫기까지 단 몇 분이 걸렸다. 어머니의 김치찌개와 같은 맛이 났다. 어머니는 김치가 맛이 가기 직전에 약간의 돼지 비계와 채소, 멸치 국물을 넣고 끓였다. 그 결과물은 얼얼하고 시큼했다. 나의 유년 시절을 규정하는 맛이었다. 맛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불안정함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이렇듯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한참 생각해야 했다.
‘모모후쿠 니시’에서 ‘닭과 만두’라는 음식을 만들곤 했다. 세 명의 한국인이 그 음식을 보고 우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만든 ‘닭과 만두’는 기본적으로 수제비라는 한국식 스튜와 같은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두 음식은 모두 감칠맛이 가득한 육수를 사용한다. ‘닭과 만두’는 닭으로 만든 육수를, 수제비는 해초와 멸치로 만든 육수를 사용한다. 수제비는 만두 대신 넓게 뗀 반죽을 사용한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다. 그래서 완전히 압도되었던 것이다. ‘닭과 만두’를 주문했는데 수제비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수제비를 모르는 대부분은 그저 자신들이 전통적인 미국 음식에서 약간의 변주를 더한 요리를 먹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음식이라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너무 깐깐한 교수님 같나? 음식을 만드는 것은 정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먹는 것은 그럴 수 없다. 음식은 유려한 맛이 나야 한다. 수학의 방정식 같은 느낌이 나면 안 된다. 사실 어떤 음식이 개념적인 부분이 강하면, 그 음식의 힘은 더 줄어든다. 우리가 세시 에 페페에 관해서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다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버터로 조리한 국수와 병아리콩’ 같은 이름을 붙일 것이다. 세시 에 페페는 너무 딱 떨어진다.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 결론을 내게 하기 보다는 생각하게 만드는 이름이다. 놀라움이라는 요소는 마술의 일부분이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과 어린 시절에 가장 좋아한 음식 간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깊은 곳에는 (그들이 깨닫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 라따뚜이 >의 순간을 느끼고 있다. 기저의 근본 양식 중 하나를 맛보고 낯섦과 친숙함 사이의 조화를 느낀다.
결국 이 모든 이론은 다른 문화에서 온 맛있는 음식 앞에서 자신의 장벽을 깨는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유럽인들은 사우어크라우트를 좋아한다. 하지만 김치는 괴상하고 이국적인 물체라고 생각한다. 둘 다 짜고, 삭힌 배추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호프슈타터는 내가 ‘기본 양식’이라고 부른 것에 다른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를 ‘이종동형’이라고 부른다. 핵심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개념을 말한다. 서로 다른 문화는 이 기본 양식을 표현하기 위해 상이한 매체를 사용할 수 있다.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사용하는 재료를 달리하는 것이 그 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완전히 동일한 역할을 한다. 같은 노래를 서로 다른 악기로 연주해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 음악이 무엇인지 알아챘다면, 사람들은 역설의 쾌감을 맛볼 것이다. 맛있는 음식도 다르지 않다. 새로움과 친숙함이 하나의 이상한 순환 안에서 한데 엮이는 것이다.
먹는 것 vs 생각하는 것 음식은 기억에 관한 것이다. 가장 강력한 음식은 완전히 낯선 맥락 속에서 친숙한 맛을 떠올리게 하는 것.
1 세시 에 페페 이탈리아의 고전적인 카초 에 페페를 재현하기위해 이 음식은 감칠맛이 풍부한 재료를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세시는 병아리콩을 의미한다.)
2 스파이시 포크 소시지 앤 라이스 케이크 맛의 양식은 문화 간의 교차를 이룬다. 이 음식은 중국의 전통 음식과 이탈리아 음식 간의 잃어버린 연결고리를 드러낸다.
- 에디터
- 글 / 데이비드 장(David Chang)
- 포토그래퍼
- JOE PUGLI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