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서울에서 내 나이로 산다는 것, 도시를 관찰하지만 발붙이지 않는 40대, 미로 속에 빠진 듯한 30대, 밥벌이를 고민하는 20대. 개인이 쌓고 제각각 흡수한 서울의 시간에 대하여.
서울의 어디에 사나? 북아현동의 임대아파트. 낮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은? 대부분 집. 그렇다면 밤 시간은? 일이 아니면 외출을 잘 안 한다. 가장 좋아하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이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인가? 한강. 사람이 많지 않은 계절의 일몰 때. 서울에서 가장 가치 있게 돈을 쓰는 방법은 뭘까? 영기획의 음반을 구입하고 공연에 가는 것. 우리 제품은 실제 가치보다 가격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 이곳과 가장 달라 보인 세계의 도시는 어디인가? 가보지 않았지만 콜롬비아의 보고타. 환대의 공간이란 환상이 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은? 영기획 아티스트들. 여기가 견딜 수 없이 지긋지긋해지는 순간이 있다면?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고 있을 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자전거로 차도를 다닐 때. 최근 서울에서 10년간 벌어진 일 중 가장 인상적인 건 뭔가? 하나를 꼽기 어렵다. 서울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무엇’을 꼽는다면? 로컬, 신 Scene, 스트리트 등 바운더리를 만드는 표현들. 그렇다면 가장 과소평가된 것은? 과대평가된 말 사이에 가려진 아티스트 개인과 그 결과물들. 이 도시에 살며 세운 계획이 있나? 지금 사는 곳에 살며 지금 하는 일을 할 것 같다.
내가 바라보는 서울에 대해 쓰기 전에 내가 누군지부터 먼저 적어야 할 것 같다. 내가 누군지 적는 것만으로 내가 바라보는 서울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1981년 4월 5일 식목일. 후암동에서 태어나 6년을 서울에서 보냈다. 당시 서울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쥐가 갉아먹은 비누로 세수하고 아이들과 뛰어다닌 골목, 정신병에 걸린 옆집 누나를 따라갔다 길을 잃은 시장, 아버지의 열쇠수리점이 있던 근처의 상가 정도가 내가 밟았던 서울의 전부다. 이후에는 부천으로 이사해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2학년 때 성남으로 이사한 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 살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고 선택하지 않더라도 별로 문제될 것 없는 인생이었다. 1992년, 국민학교 5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그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했다. 처음으로 어머니를 졸라 농구 저지 스타일의 옷과 형광색 모자를 샀다. 동급생과 춤을 추고 랩을 했다. 올림픽 경기도 보지 않은 내가 처음으로 동시대에 발을 올린 때다. 가끔 카세트테이프를 사던 레코드 가게에 랩이 들어간 음반을 추천해달라해 크리스 크로스의 ‘Totally Krossed Out’을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들었다.
학교에서 처음 XT 컴퓨터를 접한 시기도 이때다. 처음 받은 사교육은 컴퓨터 교육이었다. GW 베이식을 빠르게 숙달하고 이를 핑계로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랐다. 큰할머니가 돈을 보태 하얗고 투박한 컴퓨터가 생겼다. GW베이식을 하는 대신 게임을 했다. 새 게임을 구하기 위해 PC통신을 시작했다. 가입비가 들지 않는 사설 BBS를 전전하다 하이텔을 시작했다. 처음엔 구경만 하다 나도 뛰어들었다. < 퇴마록 >을 읽고 판타지 소설을 쓰고 LENNON이라는 아이디를 쓰던 사람의 칼럼을 읽고 서태지와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1994년, 남학생만 다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난생처음 들은 ‘눈 깔아’의 뜻을 몰라 귀 싸대기를 맞았다. 학교는 환대의 공간이 아니었고 동급생 중 내가 관심 있는 걸 나눌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잠시 올라탔던 동시대의 현실 세계는 다시 먼 공간이 됐다. 다행히 방과 후에는 내가 원하는 세계로 갈 수 있었다. 매일 새벽 늦게까지 PC통신을 했다. 그때부터 ‘사이버 세계’는 현실의 삶보다 중요한 존재가 됐다. 그와 함께 닥치는 대로 잡지를 읽었다. 국민학교 때 창간한 < 아이큐 점프 >, < 소년 챔프 >, < 윙크 >와 같은 만화 잡지부터 < 핫뮤직 >, < 락킷 >, < 월드팝스 >와 같은 음악 잡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은 < 키노 >, 최초의 대중문화 잡지라 불린 < 이매진 >까지.
누가 뭐래도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당시 대통령은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문화 대통령 서태지였다. 89년 해외여행이 자율화된 덕분에 파리와 뉴욕에 다녀온 H2O의 멤버들이 결성한 삐삐밴드는 95년 < 문화혁명 >이라는 이름의 음반을 발표했다. 강준만이 대중 문화 비평을 쓰고 문화평론가라는 이름을 단 이들이 티브이에 출연해 토론했다. 사람들은 문화로 세상이 바뀔 거라 얘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80년대 학생운동의 관성으로 이어진 이야기지만 “문화로 세상을 바꾸자”는 문구는 많은 이를 홀렸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많은 이가 1996년을 ‘인디’라는 단어가 처음 불린 해로 기억하지만, 내게는 모란에서 잠실까지 다니는 8호선이 개통된 게 더 큰 의미였다. 8호선을 타고 잠실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 후 신촌과 홍대에 내렸다. 10년 만에 찾은 서울은 가끔 최루탄 냄새가 나는 걸 제외하고는 마냥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주말마다 수입 CD를 사고 음악감상실을 다니고 음감회에 나가고 PC통신 모임에 참가하고 공연을 봤다. 단기간에 전에 없던 새롭고 낙관적인 에너지가 한 지역에 모인 유례 없는 순간이었다. 나 역시 그 순간을 지하철이 끊기는 시간 전까지 누렸다.
2000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한 걸 핑계로 홍대 앞에 방을 구했다. 학교는 거의 나가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아예 나가지 않았다. PC통신 모임에서 만난 이와 사업을 시작했고 벨엔세바스찬이라는 이름의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업은 망하고 벨엔세바스찬도 사라졌다. 대신 음악을 하는 친구를 사귀어 공연을 만들었으며 음악 잡지에 글을 썼다. 중국집에서 3천5백원짜리 만둣국을 시켜 먹고 친구의 바에서 공짜로 술을 마셨다. 그리 특별한 걸 하지 않았지만 늘 특별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군대에 갔다.
2006년, 전역 후 다시 찾은 홍대 앞의 풍경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늘 한산했던 벨엔세바스찬 앞은 옷가게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옆에는 커다란 노래방 건물이 생겼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처럼 성남을 탈출하기 위해 홍대 앞의 IT 회사에 취직했다. 세가 많이 올라 홍대 앞 대신 그나마 가까운 북아현동에 집을 구했다. 산 지 얼마 안돼 재개발 발표가 났다. 매일 홍대를 드나들었지만 전처럼 재밌지 않았다. 함께 놀던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회사를 그만두고는 프리랜서로 글을 쓰거나 기획, 마케팅 등의 일에 참여했다. 적은 돈을 벌어 월세를 내고 집에서 혼자 싸구려 술을 마셨다.
다시 이곳에서 재미를 찾은 건 당시 만나던 애인을 따라 두리반을 드나들면서부터다. 그곳엔 자립 음악가라 부르는 이들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린 건 아니지만 그 안에서 재미있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챌 수 있었다. 51팀이 참가한 51 플러스 페스티벌에 참여해 함께한 것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분위기를 타고 새로운 흐름의 등장을 바라는 욕구와 이를 전시하던 트위터가 보였다. 북아현동에서 재개발 때문에 쫓겨나 경리단으로 이사한 후 2012년, 알고 지내던 음악가 로보토미의 < LEMON >를 만들기 위해 레이블 영기획을 만들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기에 소셜 채널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일렉트로닉 음악 단체와 미디어 그리고 공간이 탄생했다. 90년대와는 다른 형태의 새롭고 낙관적인 에너지가 모였다. 내게 가장 의미가 있었던 건 내가 관찰자가 아니라 주체의 일부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2016년이 됐다. 두리반은 투쟁에 성공해 새 가게를 차렸지만 자립 음악가들은 느슨하게 흩어졌다. 당시 움직임을 함께하던 공간은 모두 사라졌다. 위에 언급한 단체와 미디어 중 일부는 사라졌고, 일부는 취미로 유지되고 있으며, 일부는 살아남으려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영기획은 마지막이다. 경리단에선 다시 쫓겨났다. 동네가 너무 ‘핫’해진 탓이다. 세 가구가 살던 2층짜리 주택은 지금 미국 남부 스타일의 펍이 됐다. 보광동으로 이사했다가 올해 다시 북아현동에 돌아왔다. 재개발 보상으로 임대아파트를 분양 받았다. 10년 전에 산 북아현동 지하 방은 폐허가 되고 그 위에 지은 아파트 17층에 살게 됐다.
지난주 일요일 망원동에 있는 바 섭스탠스에서 오디오, 비디오, 드링크-오(이하 AVD)라는 이벤트를 열었다. 이벤트 내용은 별거 없다. 일요일 오후 맥주를 마시며 각자 준비한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본다. 고작 4년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다. 유튜브 영상 앞에는 광고가 붙고 크래프트 맥주 붐을 타고 고를 수 있는 맥주의 종류가 크게 늘었다. 파티도 늘었다. 일요일 임에도 내가 아는 파티만 네 개가 열렸다. 2011년 AVD에서 함께 비디오를 보던 몇 친구는 다른 파티에서 음악을 틀었다.
몇 년 사이 등장한 단어를 떠올려본다. 젠트리피케이션, 룹탑 파티, EDM, 크래프트 맥주, 뉴미디어, 해시태그, 헬조선, VR, 독립출판 등. 내가 태어난 해 태어난 MTV가 서울에 영향을 미치는 데 약 10년이 걸렸다. 90년대의 열망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여전히 그 안에 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서울은 그 어느 곳보다 빨리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생산한다.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 고침되는 타임라인처럼 과거의 것은 지워진다. 계속 이런 풍경을 본다. 공간이 먼저 사라지고 이를 중심으로 모인 단체가 사라진다. 나중엔 그 안의 사람이 소문 없이 사라진다. 횡 스크롤 슈팅 게임의 풍경은 빠르게 변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듯 보이지만 비행기는 화면을 벗어나지 못한다. 화면 안에서 아등바등 싸우며 무기를 얻었다 죽으면 리셋된다. 내게는 이 슈팅 게임의 이름이 서울이다.
- 에디터
- 손기은, 유지성
- 포토그래퍼
- 이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