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새로운 한국영화라면 어떤 이름을 떠올릴 수 있습니까? 아니, 지금 새로운 한국영화라는 말이 가당키는 한 걸까요?” 영화평론가 정성일에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한국영화라고 했나요? 그게 어디에 있나요?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모두가 예언자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눈앞에 나타나는 새로운 영화들, 새로운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매번 뭔가를 약속하는 것만 같은 제스처로 영화를 이러저리 뒤흔들며 재주를 부렸다. 안타깝지만 그들은 모두 서툴렀다. 게다가 별다른 아이디어도 없었다. 그건 이미 어디선가 본 것이었으며 그마저도 잘하지 못했다. 새해를 앞두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나도 괴롭다.
물론 새로운 한국영화가 시작됐던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걸 셈하기 위해서는 2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분명히 1996년은 한국영화의 0년, 말 그대로 ‘제로 이어 Zero Year’였다. 물론 새로운 한국영화들이 네오리얼리즘 같은 하나의 유파이거나 누벨바그처럼 동인들의 결사체처럼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해 구정 설날 강제규의 <은행나무 침대>가 개봉하였다.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개념이 시장에 도입되었다. 그 해 늦은 봄날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하였다. 하릴없이 거리를 산책하는 서로 다른 네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동선에 따라 뒤엉킨 실타래처럼 이리저리 이어질 때 이 영화는 우리들의 <이탈리아 여행>이 되었다. 그해 겨울이 막 시작되던 날 이제는 없어진 을지로 3가 명보극장에서 김기덕의 <악어>를 채 열 명도 안 되는 관객과 함께 보았다. 한강에서 서식하는 밑바닥 인간들의 세계 속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초현실주의의 비몽사몽으로 휘말려들기 시작할 때 거기엔 본 적이 없는 에너지가 있었다. 이 세 편의 영화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듬해 <초록 물고기>의 이창동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를 보았다. 다시 한 번 그 이듬해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상수와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을 보았다. 거의 막무가내로 진행되는 류승완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이 새로운 영화들이 어떤 미학적 이념도 없고 함께 공유하는 정서 따위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감각으로 진동판이 된 다음 그걸 두들기는 세상의 폭력적인 힘에 대해서 자기의 힘으로 버티겠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이듬해, 그러니까 막 21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아주 소수의 동료들만이 시선을 돌리고 있었던 ‘망작의 시네필’ 박찬욱이 < 공동경비구역 JSA >로 천둥처럼 돌아왔다. 그 해 2월 19일, 누구라도 보고 나면 어처구니없다는 낭패감에도 불구하고 그저 ‘괴작怪作’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플란다스의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봉준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리고? 안타깝지만 여기가 끝이다.
그러고 난 다음 마치 같은 음반을 무한 반복하는 것처럼 같은 이름들이 같은 레퍼토리를 보여주고 다시 보여주었다. 물론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영화 세계를 밀고 나아갔다. 물론이다. <강원도의 힘>과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얼마나 다른가. <복수는 나의 것>과 <아가씨>는 얼마나 멀리 있는가. 나는 지금 연대기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서대로 제목을 열거할 겨를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약간 대담하게 그 두 개의 시간 사이를 원근법적 방법으로 오가면서 그 둘을 대립적 관계로 놓고 도식적인 도표를 만드는 대신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서 만들어내는 잠재적 감응과 그것을 통해서 끌어낼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첫 번째 질문. 왜 포스트 봉준호는 나타나지 않는가? 당신은 맞받아치고 싶을 것이다. 바보야, 그걸 질문이라고 해? 그건 재능의 문제라고! 물론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에게 세상은 매우 간단한 이치로만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봉준호 자신이 약간 푸념하듯이 내게 말했다. <살인의 추억>은 2003년에는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 한 영화입니다. 왜 그런 것일까. 문제는 다시 돈이다. 자본은 예술과 불장난을 할 생각이 없다. 혹은 점점 더 상상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수많은 시나리오가 자본의 협상 테이블을 넘지 못하고 대부분 그 과정에서 모욕당하면서 환골탈태 당하거나 아니면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그들은 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한 보증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미 성공한 영화의 사례를 자신의 이야기 안에 포함시키도록 강요받는다. 혹은 자발적으로 그런 짓을 한다. 성공의 재생산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발상. 그때 그 영화는 카피도 아니고 더더구나 오마주도 아니다. 당신이 영화를 보면서 무심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라고 중얼거리는 것은 그저 기분이 아니다. 이런 젠장! 나는 21세기 초에 서방세계의 비평가들이 ‘새로운’ 한국영화를 본 다음 긍정적인 의미에서 “조금도 길들여지지 않은 야만적인 영화들”이라는 감탄사를 자아내며 쓴 글을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한동안 ‘새로운’ 한국영화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표현은 ‘극한의 영화들 Extreme Films’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반문한다. “그 많던 호랑이는 어디로 가고 고양이들만이 뛰어노는가?”
두 번째 질문. 그렇다면 오직 돈의 문제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약간 까다로운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한 나라의 영화가 창조적인 에너지의 용광로가 되기 위해서는 마치 자석처럼 새로운 재능들을 끌어당겨야 한다. 그래서 카오스의 경기장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새로운 이름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그려 내는 별자리. 이때 우리는 모두 무명의 신인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가? 어디에도, 그리고 아무 데나. 그런데 지금 한국 영화는 상업영화라고 불리는 제도권과 독립영화라고 불리는 그 바깥이 거의 완전하게 차단 되어 있다. 그들은 각자의 동네, 각자의 리그, 각자의 세계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다만 그들 사이에서 무명의 배우들이 유명해지기 위해서 이따금 그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갈 뿐이다. 이를테면 한예리와 김고은, 박소담. 아마 더 많은 이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만 떠오른다. 게다가 그들이 앞으로 다시 다리를 예전처럼 오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독립영화는 자유로운 창작의 해방구인가?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대답은 부정적이다. 물론 자유는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해 보인다. 그들은 만성적인 빈곤 속에서 허덕거리고 있다. 빈곤의 미학은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그들의 영화 일부를 부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어떤 영화들이 거의 텅 빈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을 때 대부분의 독립영화들은 그래도 그 영화는 개봉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럽게 쳐다본다. 여기는 차라리 게토처럼 보인다. 이따금 ‘간택’받듯이 몇몇 독립영화 감독이 자본의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거의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두 영토는 점점 더 서로 다른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을 정도다. 두 영화는 다른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이때 그 둘은 각자의 방법 안에서 각자 무한 반복을 거듭하는 중이다. (누군가) 한 것을 (다른 누군가) 다시 하고, 나는 본 것을 다시 보아야 한다.
현재의 상황을 말할 차례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지난 2016년 6월호에서 한국 독립영화에 관한 특집을 다루며 “2007년 체제의 변화 이래 슬픔에 잠긴 것처럼 쇠약해져버린 행진”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머리말을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우리를 멈춰 세우는 말. 2007년 체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해. 어쩌면 거기 어떤 대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정치와 영화 사이의 함수를 도식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이 특집의 제목은 ‘보헤미안의 삶’이었다. 떠도는 삶들. 물론 남한에는 보헤미안이 없다. 단지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이 때 누가 남한의 보헤미안(들)인가? 그건 뿌리 뽑힌 청춘들이다. 영화는 그들과 함께 때로는 거리에서 살아가고(<똥파리>, <무산일기>, <스틸 플라워>) 때로는 감옥과 다름없는 교실에서 살아가고 (<파수꾼들>) 지옥처럼 보이는 집에서 살아간다. (<도희야>)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폭력과 착취가 재생산된다. (<한공주>) 탈출을 해보지만 갈 데가 없다. (<열여덟>) 그들은 어른이 된 다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현실 앞에 서야 한다. (<마돈나>) 산다는 문제는 그들에게 너무 힘겹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이 오면 그저 자살하는 것밖에 남은 선택이 거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최선이라고 해봐야 강물 앞에 서서 중얼거리면서 잠시 결정의 시간을 지연시킨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새로운 영화는 새로운 삶에서 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영화는 생명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닌 생에의 의지가 예술로 도약할 때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영화들이 반복해서 대면하는 것은 전멸의 미학이다. 나는 우연히 누군가 트위터에 써놓은 자기소개 글을 읽었다. “이번 생은 좇됐다. 다음 생에 잘해보자.” 이 문장에서 영화까지의 거리는 고작 한 뼘에 불과할 것이다.
이번에는 반대편을 바라보자. 올해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한 편은 나홍진의 <곡성>이고 다른 한 편은 연상호의 <부산행>이다. 이 두 편은 새로운 영화인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경향인가? 그럴지 모른다. <곡성>은 미학적으로 거의 말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굉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몇몇 장면의 편집은 기술적으로 사기에 가깝다. 나는 이 영화를 경멸한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한 가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미끼인 줄 알면서도 그걸 무는 대중의 자발성이다. 그들은 끝내 확인되지 않는 의미를 덥썩 문 다음 자기 자신을 위한 알리바이를 무한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어떤 주장은 너무 기발해서 나홍진도 감탄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들도 물론 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알라바이가 영화와 아무 상관도 없는 거짓말이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핵심은 거짓된 충성을 공유하면서 효과적으로 자신들을 단단하게 결속시켜나가는 과정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일 거기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면 이 신비로운 결속은 깨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이한 알라바이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집단적으로 수행한 것일까. 대답은 단순하지만 설명하기는 까다롭다. 그들은 스스로 잘못된 목적지에 이르기를 원한다. 왜 그런 목표 설정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것이 혹시 그들이 권위와 싸우는 방식은 아니었을까. 그 어딘가에 있(다고 가정 되었)지만 아무 데도 없는 장소를 공유하는 방식, 텅 빈 장소에서 놀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담론의 경기장에서 얻어낸 인정 투쟁의 과정.
방향을 비틀어서 <부산행>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곡성>과 달리 이야기가 너무 선명해서 달리 설명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본편이라고 해야 할 <서울역>보다 먼저 개봉한 <부산행>은 반대로 원인에 선행하는 결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왜 좀비가 나타난 것인지, 어떻게 좀비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는지 어떤 설명도 없다. 신기한 것은 이 영화를 보면서 아무도 그것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좀비가 열차에 나타났고 사람들은 좀비가 되어가고 열차는 부산에 가야 한다. <부산행>은 이야기라고 할 것이 없다. 이상한 정식화. 무언가 작동하고 있는데 그 원인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알고 싶지도 않다. 그때 11,565,464명이(영진위 집계) 즐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언가 의미에 구멍이 생겼고 그 안에서 좀비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오고 있다. 이 때 의미의 인과성은 완전히 무너졌고 사후적으로 일관성을 획득하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좀비들뿐이다. 여기서 좀비들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어보는 것은 가장 바보 같은 질문이다. 그건 끊임없이 분화되어 나가는 내 편의 일부분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나는 점점 더 많은 적을 얻게 된다. 약간 이상한 표현이지만 나는 우리들의 목표가 되며 내게 우리들은 적이 된다. 점점 줄어드는 우리. 점점 늘어나는 우리 안의 적. 이 괴상한 셈이 진행될 때 살아남기 위하여 점점 줄어드는 우리들은 인정사정없이 우리였던 우리의 적을 난도질해야만 한다. 이보다 더 우리들의 삶을 잘 성명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어디 있겠는가.
새로운 영화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새로운 관객이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시네필들과 아무 상관도 없다. 아니, 차라리 시네필들은 모두 게토에 간 것만 같다. 그들은 제한된 장소에서 동일한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는 새장 안의 새처럼 우아하고 지루한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대중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원인을 가정하고 발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공동체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만인을 앞에 두고 만인의 투쟁을 하는 중이다. 원인의 무신론자들. 여기 원인의 자리에 희망과 생명을 가져다 놓을 수 있을까.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해에는 기적처럼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2016년 12월 9일은 우리들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아니, 되어야 한다. 그때 새로운 영화가 도착할 것이다.
- 에디터
- GQ 피처팀
- 글
- 정성일(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