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개저씨와 젊은 꼰대

2017.03.13GQ

‘한남’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게 된 ‘개저씨’와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젊은 꼰대’의 세계.

2001년, 종로의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던 내 뒤통수를 어떤 노인이 후려쳤다. 노인의 왼손에는 절반쯤 피운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2004년, 압구정역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택시 안, 생전 처음 보는 기사가 내게 물었다. “결혼했어요?”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의 대꾸는 이랬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살 좀 빼야겠네. 요즘 아가씨들 워낙 말랐더라고.” 2006년, 첫 직장에 입사해 첫 출장을 떠났다. 해외 관광청에서 전 세계 기자들을 초대하는 행사였다. 한국 취재진 가운데 유력 일간지의 ‘부장님’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맥주를 마시던 밤, 그는 내 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며 내 손을 주물럭거렸다. 출장 내내 불쾌감을 표하자, 마지막날 술에 취한 그는 내게 화를 냈다. “내가 어떤 사람들이랑 친한지 알아? 나는 그런 태도를 당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두번째 문장 어딘가에는 ‘너같이 어린 여자애에게’라는 말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2012년, 유명 위스키 브랜드의 마스터 블렌더가 내한해 기자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위스키 장인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 “여러분은 위스키를 어떻게 즐기나요?” 기자들이 호응하길 망설이던 사이, 40대 후반의 어느 남자 에디터가 손을 번쩍 들더니 답했다. “룸살롱에서요.” 그는 의기양양하게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스터 블렌더는 미소를 지으며 적절하게 대꾸했다. “아, 맞아요. 한국에 그런 문화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끄러움은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일터에서, 술자리에서, 길에서 마주친 생면부지의 타인에게서, 나는 꾸준히 모욕 당해왔다. 이런 기억들 중 일부는 망각에 묻혀버리기도 한다. 과거사를 호출해 열병시켜야 하는 지금 같은 기회가 아니라면 말이다. 별것 아닌 일이라서 잊는 게 아니고, 시간이 모든 걸 덮어주는 것도 아니다. 일일이 기억하기엔 이런 상황들이 너무 자주, 무심코 일어나기 때문이다. 한국 여자들의 일상은 작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고난으로 빽빽하다. 그 고난들 중 상당수가 한국 남자, 한남으로부터 온다.

한남의 도래 이전에 개저씨라는 명명이 있었다. 2010년대 중반은 중년 한국 남자를 일컫는 ‘개저씨’가 대유행을 맞은 시기였다. 2014년 즈음 온라인에서 시작된 이 말은 네트워크의 바깥까지 파죽지세로 번졌고, 2년 후에는 유력 일간지들과 공중파 방송국에서도 개저씨를 조망하는 기획을 선보였다. 2015년 <경향신문>에 개재한 칼럼에서 김규항은 한국의 아저씨들을 규탄했다. 그는 개저씨를 두고 정치 성향이나 계층을 떠나 “개인이 뭉개진 집단, 권위와 아집, 애초에 있긴 했었나 싶은 윤리적 불감, 콤플렉스의 향연, 남보다 한 칸이라도 앞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발악” 등으로 표현하며 정확하게 규탄했다. 그런데 같은 글에서 김규항은 이렇게도 썼다. “누구든 조금씩은 아저씨다. 이를테면 박근혜라는 여성은 이명박이라는 아저씨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아저씨임을 매일 소름끼치도록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의 얘기처럼 개저씨의 어떤 속성들이 늘 남성에게만 발현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 앞뒤 맥락과 시차를 거칠게 잘라낸 인용이라 하더라도 – 저 문장들은 구체적 현실을 둔하게 표백하고 있다. 개저씨의 조어에 ‘아저씨’가 동원된 이유가있다. 위계에 대한 재빠르고 교활한 인식과 한국 사회의 습관적 상명하복으로부터 군사 문화의 남성성을 소거하긴 힘들다. 게다가 개저씨들은 상대적 약자 앞에서만 무례하다. 사회의 의식과 무의식 모두에 뿌리내린 여성 혐오로부터 힘입어, 대부분의 여성은 성적 대상화나 무례, 타자화의 만만한 제물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식으로도 옹호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성적 모욕으로 가득했던 자칭 ‘진보 아재’들의 타임라인은 추악했다. 물론 개저씨의 피해자들 가운데는 더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남자들 역시 포함되어왔다. 그렇다면 더 젊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남성들은 한남의 호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개저씨 이후에도 한국 남자들을 일컫는 신조어는 계속 등장했다. 많은 대중매체에서 ‘뇌섹남’과 ‘아재’는 긍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건 없었다. ‘지성을 갖춘 남자가 여성을 압도한다’는 식의 해석이 등장하며 뇌섹남은 그저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어리숙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중년 남자들이 ‘어리숙하지만 멋져서 젊은 세대에게 사랑받는 아재’에 스스로를 대입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자기 객관화가 도무지 불가능한 듯 보이는 그들에게도 미래는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지탱하던 남성적 권위가 사라지고, 육체는 노쇠해간다. 한남의 태도로부터 벗어나는 데 실패한 노인들은 도시 곳곳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목격된다. 그중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례들도 있다. 누군가는 지하철에서 노약자석을 양보하지 않는다며 임산부를 윽박지르고, 어떤 이들은 박사모 집회에 군복을 입고 참여한다. EBS에서 방영하는 시사 프로그램 <달라졌어요>에는 가난한 부인을 뻔뻔하게 등쳐먹는 가난하고 늙은 남편들이 수 없이 등장한다. 이들에게도 빈곤과 박탈감의 서글픈 맥락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해나 연민으로 감싸기도 어렵다.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이 어느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 떠오른다. “잘 늙을 생각하지 말고 젊을 때 잘 살아야지. 젊을 때 정신 안 차리면 저 모양으로 늙어요. 노망나서 저러는게 아니야. 난 늙어서 나빠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젊을 때는 나쁜 걸 잘 감추다가 늙었을 때는 감출 필요가 없으니 결국 드러나는 거지. 그러니까 젊을 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돼.”

채현국 이사장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런데 지금의 청춘들, 10대 후반부터 20대를 가로지르는 ‘어린 한남’들은 그 나쁜 걸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뻔뻔할 정도의 거만함, 자신의 좁은 세계 이외에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습성, ‘사이다’로 대변되는 솔직함에 대한 열광, 여성에 대한 무례함과 권위주의까지 한남의 온갖 못된 습관들을 일찍부터 답습하고 있는 이유는 대체 뭘까?

최근 유행하고 있는 말은 ‘젊꼰’이다. 젊은 꼰대의 줄임말인 이 표현의 출처는 최근 대학생들 사이의 군기 문화다. 신입생들에게 복장 단속을 하거나, 선배에게 깍듯한 존댓말을 사용하라고 강요한다. 젊꼰 선배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겠지만, 여기에서도 군기라는 말이 등장하는 건 의미심장하다. <중앙일보>의 관련 기사에는 젊은 남자 선배로부터 외모에 대한 훈계를 당한 대학원생의 일화도 실렸다. “부인이 뚱뚱하면 남자가 집에 들어가고 싶겠니? 여자는 결혼하고 나서도 관리를 해야 돼.” 어째서 이 얘기가 여성에게만 해당하나?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의 존재 가치가 남성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의 미적 취향과 어긋난 결혼관이 보편 타당하리라는 확신의 근거는 대체 뭔가? 남의 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며, 저렇게까지 상대의 존엄을 짓밟고 자신의 사회적 우위를 확인해야 하는걸까? 저 두 문장에 담긴 문제는 한두 줄로 지적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 친구는 한남의 여러 특성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군대에서의 경험을 말했다. 입대 전까지 쌓아온 개인의 다채로운 경험들을 모두 가치 없는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이등병 시절을 거쳐, 대부분의 남자들이 생애 단 한 번 무소불위의 권력을 경험하는 병장에 이른다. 자신의 상대적 강함을 확인해야 하는 한편 연령이나 직위에 무조건 순응하는 체계 속에서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다. 텔레비전 속 여자 연예인들에 대한 논평부터 서로 나누는 농담까지 다양한 대화에서 여성 혐오를 경험하고, 전체주의 문화에 ‘의리’나 ‘깨달음’ 등의 이름으로 반성 없이 빠져든다. 일제강점기 이후 불필요하게 고착된 군대 제도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다. 군인들의 생활은 지난하고 외로울 것이다. 폭력적이고 고립된 병영 문화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는 남성이지만, 이런 체험들은 군대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반성되지 못한 채 더 어린 세대들에게 번져나간다. 예능 방송의 위계 관계에서, 강자와 약자의 스테레오타입을 끌어들여 그것을 무너뜨리는 대신 강화시키기만 하는 한국의 실패한 코미디들에서, 젠더 감수성이 희박한 농담을 쏟아내는 스타 좌파 언론인들의 팟캐스트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진짜 꼰대들의 언행으로부터. 일그러진 롤모델은 도처에 있다.

아직 ‘한남’이 한남동을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로 안다.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고 부를 때 감지되는 특별히 우스운 뉘앙스는 불과 얼마 전에 생겨났다. 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남자들의 말과 행태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어째서 ‘한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제야 시작됐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2017년 3월, 당대의 한국 남자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남자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한국 남자도 답변해야 할 때다.

    에디터
    글 / 정미환(프리랜스 에디터)
    포토그래퍼
    이승연,이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