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된 J는 광화문에서 죄책감을 느꼈다.
J씨는 우리 나이로 마흔이다. 초등학교 3학년 딸, 일곱 살 아들과 함께 서울 근교의 신도시 아파트에 산다. 아차, 남편도 있었지. 건설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지금 지방 현장으로 내려가서 주말에만 집에 온다. 올해로 결혼 12년 차. 남편이 없어서 허전한가? 솔직히 남편이 있을 때와 주말부부인 요즘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
보육교사인 J씨는 아침이면 딸을 단지 안에 있는 학교에 데려다주고 아들과 함께 어린이집에 간다. 아이를 낳기 전 J씨는 한 유아교육 업체에서 일했다. 영유아 교재와 교구들을 판매하고 방문수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업체였는데 J씨는 방문교사 관리 일을 했다. 어린이를 고객으로 하는 업체지만 육아휴직 같은 것은 보장되지 않았다. 아이 맡길 곳이 없던 J씨는 출산과 동시에 퇴사했고 절대 그 회사의 책은 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며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서 작년부터 둘째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있다.
딸은 사춘기인 것 같다. 3학년이 되면서 J씨는 딸과 감정이 많이 어긋났는데, 방탄소년단 콘서트가 결정적이었다. 열 살은 아직 콘서트에 다닐 만한 나이가 아닌 것 같아 허락하지 않았는데, 단짝 친구는 엄마까지 티켓을 구입해 같이 다녀왔다고 한다. 그 일로 딸은 두고두고 서운해하는 중이다. 물론 연예인을 좋아하는 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J씨도 어렸을 때 한 가수의 열렬한 팬이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J씨가 중학교 2학년이던 92년 데뷔했다. 그러니까 J씨는 청소년기를 내내 서태지와 보낸 ‘서태지 세대’다. J씨도 서태지가 나오는 라디오 공개방송이나 TV 순위 프로그램을 보러 서울까지 열심히 다녔다. 팬들은 서태지의 노래와 춤만 좋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메시지에도 열광했다. ‘컴백홈’이라고 하면 가출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발해를 꿈꾸’면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서태지는 학벌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도 했다. 서태지는 문화였고 현상이었다.
서태지 이후, 대형 기획사가 연습생을 선발하고 트레이닝 과정을 거쳐 데뷔시키는 육성 방식이 한국에서도 성공해 자리를 잡았다. 연습생 출신 아이돌 그룹이 쏟아져 나왔고 청소년을 겨냥한 그들 역시 교육제도, 학교 폭력 등에 대한 노래를 불렀지만 왠지 J씨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하면 사장님에게 먼저 감사를 전하는 그들이 낯설었다. 기존의 규범과 질서에 반기를 들었던 젊은 예술가. 서태지는 감수성 예민하던 청소년기의 J씨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J씨는 97학번이다. 역대급 불수능으로 손에 꼽힌 해였다. 성적표를 받아든 수험생들은 이 점수로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어느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짐작도 못할 정도로 바짝 쫄아버렸다. J씨는 가, 나, 다, 라군 중에서 한 군데는 소신 지원, 나머지 세 군데는 안전 지원을 했고 그 중 한 대학에 추가 합격으로 겨우 들어갔다.
대학생활은 솔직히 밍숭밍숭했다. 젊고 생기 있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간인데도 뭐랄까, 누군가 찬물을 확 끼얹은 후의 풍경 같았다. 학부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95년의 5·31교육개혁안 이후 96학년도부터 신입생을 학부 단위로 선발하는 대학이 급증했다. J씨가 입학한 사회과학부는 신입생이 거의 300명이라서 앞뒤 번호 몇 명 빼고는 대부분 이름도 몰랐다. 1학년들은 사회과학부 소속이고, 2학년은 이제 막 같은 전공으로 모였고, 3학년 이상은 입학 때부터 같은 과였던 터라 선후배 관계가 복잡하고 어색하고 예전 같지 않았다.
96년의 한총련 사태도 영향이 있었다고 들었다. 당시 연세대를 점거한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하며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의경 한 명이 사망했다. 학생운동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고 많은 대학에서 소위 비(非)운동권 총학생회가 꾸려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기는 불황이고 취업은 어렵고 학생들은 스펙 쌓기에 바빴다. J씨는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사회의식, 연대감, 책임감 같은 단어보다 ‘개인주의’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4학년 초부터 닥치는 대로 원서를 냈는데 결국 졸업할 때까지 취직을 못했다. 더 이상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고, 아르바이트를 하자니 그 시간에 취업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돈은 없고 마음은 위축되고 그래서 사람들을 아예 안 만나게 되었고, 매일 혼자 취직 걱정만 하고 있으니 정말 우울증이 왔다. J씨는 졸업하고 거의 1년이 다 되어서야 취직을 했다. 그렇듯 어렵게 들어간 회사였지만 솔직히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게 얼마나 꿈같은 생각인지 알게 되었다.
박봉에 사원 복지 따위 관심도 없는 회사였다. 장점이라면 야근이 거의 없고 휴일을 칼같이 쉰다는 점이었다. 이 조건이 엄청난 장점일 만큼 대한민국 직장인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 J씨에게 회사는 돈을 버는 곳이었다. 물론 자신이 맡은 역할과 할 일들을 최대한 열심히 잘 해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J씨는 퇴근 후 책을 읽고 외국어를 배우고 운동을 하러 다녔고, 그 시간이 즐거웠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에는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평범하고 성실한 직장인이 훨씬 많고 J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회사가 작은 만큼 뒷말도 많아서 사람이 모인 그림자만 봐도 넌더리가 날 정도였는데, 같은 여자 선배 두 사람과는 마음이 잘 맞았다. 퇴근 후 같이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술잔도 자주 기울였다. 어렵게 날짜를 맞춰 휴가를 내고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언니들과는 추억이 많은데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 두 가지가 있다. 모두 광화문 광장에서의 일이다.
입사 다음 해, 그러니까 J씨가 아직 신입사원이던 2002년에 한일 월드컵이 열렸다. 그때 대한민국에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월드컵에 열광했고 길거리 응원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다. 사실 J씨는 축구 규칙도 잘 모르고 그동안 축구 경기를 챙겨 본 적도 없었지만 그 열기를 한번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부대낄 일도,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일도 걱정이었지만 한 번은 광화문 광장에 나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언니들과 의견을 모았다.
D-Day는 이탈리아전이었다. 경기는 저녁이었는데, 세 사람은 반차를 내고 일찌감치 광화문 광장으로 갔다. 그럼에도 별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안정환의 역전 골든골이 들어갔을 때는 모르는 사람과 부둥켜안고 울었다. J씨도 언니들도 광장을 가득 채운 낯선 이들도 모두 약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즐겁고도 기이한 경험이다.
이제 세 사람은 모두 다른 일을 하고, 다른 지역에 살고, 환경도 처지도 전혀 달라졌지만 일 년에 한두 번쯤 만나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곤 한다. 그리고 작년 겨울, 세 사람은 14년 만에 다시 광화문 광장에서 만났다. 이번에는 기쁨이 아니라 분노의 감정으로 모였고 손에는 응원 도구 대신 촛불을 들었다. 2002년의 그 날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 많은 사람이 동시에 숨죽이고 동시에 환호하고 한탄하고 노래를 부르는 풍경도 같았다.
누구에게나 열린 광장, 스스로 모인 사람들, 같은 생각과 목적, 같은 목소리. 광장에 서니 약간 벅찬 기분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굳이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죄책감일것이다. 살면서 잠시라도 치열했던 적이 있었나. 고민하고 의심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나. 그나마 평화로운 시절이었다고, 경기도 어렵고 먹고살기도 바빴다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보았지만 J씨는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묵직했다.
J씨는 나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이고, 오래전 연락이 끊긴 동창이고, 서로를 아이의 이름으로 부르는 동갑내기 옆집 엄마이기도 하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경기가 계속 상승 곡선이었다. 나와 우리 집은 가난했을지언정 세상은 가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유로웠고 자신감이 넘쳤고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웰빙’이 유행이었다. 국민의정부-참여정부를 거치는 동안 대학에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경기는 안 좋았지만 억압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가성비’와 ‘저렴이’가 트렌드가 되었다. 목소리는 권력에 가로막혔고 혐오와 비하가 보편 정서가 되었다. 잘 살 수 있다면, 하는 사이 도덕성의 기준은 끝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몇 년간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마흔 살이 되었다.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 태도와 가치관에 따라 얼굴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내가 주변 상황의 영향을 받기만 하지는 않는다. 내 삶과 태도와 가치관이 주변의 사람들을, 조직을, 더 넓게는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책임지는 어른이 되고 싶다.
세대론은 다만 함정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느니 결국 스스로 덫을 놓는 격일까? 의심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와 내 세대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해에 태어난 12인의 칼럼과 서울에 사는 젊은 사진가 7명이 ‘세대’라는 테마로 자유로이 작업한 사진을 나란히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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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글 / 조남주(1978년생, 소설가)
- 포토그래퍼
- 김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