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 화이트의 버질 아블로는 지금 패션계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디자이너다. 그는 어떻게 이 시대의 떠오르는 아이콘이 됐을까? 그가 보여준 지금까지의 행보를 통해 그 이유를 파헤쳐봤다.
버질 아블로는 시카고에서 자랐고 건축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을 공부하던 그가 패션에 눈을 띄게 된 건, 건축가 렘 쿨하스와 프라다의 협업을 보고 나서다((1999년 프라다는 렘 쿨하스에게 매장 설계를 의뢰했다). 2002년 그는 카니예 웨스트의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가 되었고, 2009년 카니예 웨스트와 함께 펜디에서 인턴십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2011년 8월, 제이지와 카니예 웨스트의 < Watch the Throne > 앨범이 나온다. 이 음반은 버질 아블로에게 꽤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는 이 음반의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앨범 커버 등 아트워크를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에게 맡겼다. 그리고 2012년 12월, 그는 뉴욕에서 파이렉스 비전을 런칭하게 된다.
파이렉스 비전은 브랜드라기보다 일종의 스트리트 패션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파이렉스 비전은 챔피언의 티셔츠, 폴로의 빈티지 플래드 셔츠에 PYREX, 23 같은 문자를 커다랗게 프린트해 비싸게 판매했다. 패션에 대한 이런 새로운 접근은 큰 화제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잘 팔렸다. 그렇지만 중고 매장에서 40달러에 팔고 있는 셔츠를 몽땅 구입해 그 위에 프린트를 넣은 다음 550달러에 판다는 건 웬만해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사기꾼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패션은,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놓은 걸 사람들이 원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는 이런 퍼포먼스 자체를 패션으로 만들었고 버질 아블로 자신이 브랜드가 되었다. 이건 기존의 고급 패션에 대한 농담이다. ‘과연 유행이란 게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겨냥하고 있는 거다. 새로운 자극을 열망하던 사람들은 카니예 웨스트의 패션 컨설턴트라는 사람이 갑자기 내놓은, 자기가 입고 있는 패션조차 놀림거리로 만드는 과장된 농담을 보고 열광했고 거기에 동참했다. 이 냉소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팬이 되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현상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이 농담은, 펑크 패션과 같은 기존의 스트리트 문화와 달리 철저하게 계획되고 설계된 것이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정규 교육을 받은 훈련된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한 후 그 안에서 혁명적인 걸 내놓으려고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덕분에 컬트 팬들이 생겨났고 파리의 콜레트나 도쿄의 GR8 같은 편집숍에서 파이렉스 제품을 구비해놓게 되었다. 패션에 대한 자조 섞인 이 농담은 이후 본격적인 트렌드가 되었고 발렌시아가의 더러운 스니커즈, 구찌의 낙서가 갈겨진 티셔츠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트리트 패션이 하이 패션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그는 이렇게 떠들썩한 데뷔전을 치러냈다.
이후 버질 아블로는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사실 컬렉션 중심의 하이 패션 신은 패션 엘리트들의 세상이고 버질 아블로 같은 아웃사이더가 이 안에서 살아 남으려면 다른 브랜드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 그는 스트리트 패션에서 그 특별함을 찾았다. 마침 2010년 즈음부터 스트리트 패션이 하이 패션을 넘보기 시작했다. 스트리트 패션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지방시가 있었고 쉐인 올리버의 후드 바이 에어, 뎀나 즈바살리아의 베트멍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버질 아블로도 파이렉스 비전의 실험을 발판 삼아 하이 패션에 진입한다. 2013년 그는 오프 화이트를 런칭했다.
사실, 지금의 패션은 스트리트 패션이 하이 패션을 장악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상류층의 하이 패션과 일반인들의 워크웨어, 스트리트웨어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하지만 양극단에 있던 이 옷들을 경제 성장 속에서 섞이기 시작했다. 워크웨어나 스트리트 웨어를 입다가 고소득자가 되면 상류층의 하이 패션을 입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고소득자도 워크웨어와 스트리트웨어의 고급화 버전을 입는다. 이 두 개의 영역은 보다 적극적으로 상대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오프 화이트의 컬렉션에는 플래드 재킷과 싱글 코트, 펜슬 스커트가 청바지와 후디, 트랙 팬츠와 섞여 있다. 실크와 울 같은 고급 소재와 데님과 플리스 같은 캐주얼한 소재도 한데 섞여 있고 어떤 경우엔 한 몸으로 붙어 있기도 하다. 찢겨진 데님을 이어 붙여 고풍스러운 스커트를 만들기도 하고, 평범한 줄 알았던 코트의 뒷면은 반이 잘려있고 그 안에 윈드 브레이커가 드러나 있다.
온갖 요소들이 섞인 이 옷들은 섬세하게 배치된 색 조합, 조율된 핏과 실루엣 아래에서 난잡하게 흩어지지 않고 가능한 심플하게 보이도록 정리된다. 오프 화이트 특유의 오버사이즈 옷들은 몸통은 크고 팔 기장은 짧은 미국 스트리트웨어의 특징에서 나왔다. 하이 패션의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스트리트웨어의 실루엣과 간결함이 살아있는 새로운 룩을 만들어낸 거다.
이렇게 버질 아블로는 기존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가진 새로운 하이 패션을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매출이나 인지도가 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LVMH 프라이즈의 후보에도 오르는 등 패션계에서 본격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케아부터 리모와까지 꽤 많은 브랜드와 협업도 하고 있다. 그 중 나이키와 협업한 ‘The Ten’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키의 상징적인 스니커즈 10개를 버질 아블로가 다시 만들어내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스우쉬를 뜯어 다른 위치에 붙이는 등 리폼이 들어간 ‘리빌링 Revealing’과 반투명 소재로 만들어진 ‘고스팅 Ghosting’으로 나뉜다. 거기에 빨간 케이블 타이를 달고 “AIR”, “Shoe Races” 같은 글자를 적어놓았다. 구조를 분해해 재구성하거나 기존 틀에 새로운 소재를 씌우고 그 위에 프린트를 그려 넣는 등 오프 화이트의 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몸체, 끈, 밑창 등에 사용된 컬러의 조합 아래 정돈되어 있다. 버질 아블로 패션 특유의 정체성은 여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애초부터 버질 아블로는 단순한 티셔츠 장사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판을 훨씬 크게 보고 있고 목표도 훨씬 높은 곳에 있다. 유럽의 디자이너 하우스를 맡고 싶다는 야심을 숨기지도 않는다. 쉐인 올리버는 헬무트 랭의 수장이 되었고 뎀나 바잘리아는 발렌시아가를 이끌고 있다. 과연 그는 목표대로 유럽의 디자이너 하우스에 입성해 ‘패션 엘리트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이끄는 하이 패션’의 새로운 단계를 이뤄낼 수 있을까? 다음 행보가 무엇이 될지 두근거리며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다.
- 에디터
- 글 / 박세진( 저자)
-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virgilabloh.com, 인스타그램 @off____wh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