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솥 뚜껑을 열 때의 황홀감은 가을에 가장 높다. 씹고 있어도 씹고 싶은, 가을 쌀밥을 맛있게 짓는 방법을 마침내 찾았다.
쌀밥의 힘 귀찮은데 즉석밥이나 돌려 먹을까, 라는 생각을 가을에 한 적이 있던가? 이맘때쯤 찾아오는 맛있는 밥에 대한 열망은, 초여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것만큼이나 본능적이다. 압력밥솥이나 작은 돌솥을 쓴다면 20분 만에 갓 지은 밥에 반찬을 얹을 수 있다. 일단 마트에서 햅쌀이 보이면 사둔다. 그리고 밥솥의 취사 버튼을 누르고 샤워를 하거나 요리를 시작하는 습관을 들인다. 물 맞추기? 계량 컵이 없어도 딱 세 번만 해보면 할 수 있다. 내 손등 두께, 내 손의 아침 부기, 쌀을 누르는 손의 압력, 내가 원하는 밥의 찰기에 딱 맞는 물의 양을 체득할 수 있다.
지금 막 햅쌀을 사왔다면 마트에서 이맘때 햅쌀을 사왔다면 평소 밥 지을 때와는 좀 다르게 짓는다. 묵은쌀에 비해 쌀의 수분이 충분하기 때문에 쌀을 미리 불려둘 필요도 없고 물량도 평소보다 좀 적게 잡아도 된다. 쌀을 씻을 때는 밀가루 반죽 치대듯이 빡빡 비벼대지 않아도 된다. 손가락의 힘을 빼고 먼지를 털어낸다는 느낌으로 휘휘 재빨리 씻는다. 쌀뜨물은 잘 챙겨둔다. 라면이나 김치찌개에 물 대신 넣어서 맛의 재미를 보고 나면 그 뒤론 절대 버릴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밥을 다 짓고 난 다음 주걱으로 휘저어주는 과정을 꼭 챙긴다. 물량을 잘못 맞춰 약간 질다 싶을 때는 주걱으로 몇 번 뒤집은 채 잠깐 밥솥 뚜껑을 열어두면 꽤 효과가 좋다.
보온 기능의 밀고 당기기 무슨 일을 시작하든, 장비부터 제대로 갖추고 보는 사람이라면 밥솥부터 챙길 테다. 미래형 오토바이 헬멧처럼 생긴 국내 브랜드 밥솥부터, 이게 보석함인지 밥솥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단정한 일본의 밥솥까지, 한번 파기 시작하면 다채로운 세계가 열린다. 디자인 때문에 몇몇 브랜드의 밥솥의 심연까지 파헤쳐본 이들은 한 가지 높은 벽에 부딪히고 만다. 놀랍게도 보온 기능이 밥솥의 보편적인 기능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다. 대표적인 브랜드가 발뮤다인데, 최대 용량이 3인분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보다도 보온 기능이 없다는 사실에 더 크게 아쉬움이 요동친다. 밥을 짓고 보온 기능으로 보관하지 못한다는 건 깊은 밤 라면을 먹을 때 급하게 말아 먹을 따뜻한 밥이 없다는 뜻이고, 저녁 식사를 차려두고 언제 올지 모르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도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밥솥 보온 기능을 이용해 수비드 요리도 하지 못하고…. 하지만 이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다. 늘 갓 지은 밥만 먹게 될 테니 밥 맛은 늘 최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점.
쌀밥의 완성 쌀밥이 고슬고슬 맛있다면, 보리차나 참기름만 있어도 한 그릇을 왕창 비울 수 있다. 누구나 마음속에 ‘내게 가장 강력한 밥도둑’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지만, 잘 지은 쌀밥엔 가장 일상적인 반찬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한다. 충분히 뜨거운 밥에 깍두기나 김을 올려 먹으면 그 자체로 황홀하다. 바삭하게 구운 달걀프라이에는 간장 한두 방울을 추가하면 맛이 확 풍성해지고, 오징어 젓갈에는 참기름을 양껏 두르면 밥이 한우구이 한 점마냥 고소해진다. 김치나 달걀처럼 냉장고에 늘 있는 반찬보다 좀 더 특별한 ‘밥도둑’을 찾는다면 명이나물 장아찌나 성게알은 어떤가? 이 반찬이 올라간 밥 한 그릇을 긴 유럽 여행 끝에 마주했다는 상상을 해본다. 생각만으로 달콤한 밥 향기가 코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다.
볶아서 밥 짓기 재스민 쌀이나 바스마티 쌀처럼 모양이 길쭉하고, 익히면 나풀나풀 날리는 형태의 장립종으로도 가을에 어울리는 쌀 요리를 할 수 있다. 리소토보단 간편하면서 은근히 활용도가 높은 요리가 필라프다. 고기 요리에 곁들여 내기도 좋다. 먼저 냄비에 다진 양파와 버터를 조금 넣고 볶은 다음 쌀을 넣고 한 번 더 볶아준다. 이때 쌀알이 반투명해지며 반짝이기 시작해서 프랑스에서는 이 과정을 ‘나크레(진줏빛이 나게 하다)’라고 한다. 쌀이 진주알처럼
충분히 반짝인다 싶으면 닭 육수를 쌀 양의 약 1.5배 넣고 뚜껑을 닫은 뒤 오븐에 20분간 익힌다. 소금, 후추를 살짝 더하고 조각낸 버터를 넣고 저어 스며들게 하면 완성이다.
누룽지 누르기 거하게 한 상 차려 먹고도 후식으로 누룽지가 생각난다면 가을 밥맛이 최고조에 오른 것이 맞다. 요즘 출시되는 전기밥솥에는 누룽지 기능이 있어 먹다 남은 밥을 얇게 편 뒤 버튼을 누르면 만들기도 쉽다. 좀 더 고소하고 노릇노릇한 누룽지를 원한다면 프라이팬에 전 부치듯 밥을 바삭하게 굽는 게 제일 좋다. 누룽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강한 맛으로 고소한 맛을 다 덮어버리는 반찬은 피해야 하는데, 요즘 같은 날씨엔 그저 잘 누른 누룽지만 한술 떠도 입 안이 개운해진다. 누룽지 통닭, 누룽지 백숙, 누룽지 북엇국 저리가라다.
- 에디터
- 손기은
- 포토그래퍼
- 이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