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남자 셋이 함께 사는 이유

2018.02.17GQ

고시원에 살던 나는 고향 친구들과 함께 살 집을 구했다. 단지 잠을 자는 곳이 아닌, 사람의 온기와 소음이 있는 곳. 난 그곳을 집이라 부르고 싶었다.

2010년 가을, 부푼 꿈을 안고 오랜 동경의 도시 서울로 떠나오던 날을 기억한다. 다가오는 겨울을 위한 외투와 옷 몇 가지, 그리고 좋아하는 책 두세 권을 가방에 꾸깃꾸깃 넣었다. 서울에 오면 제일 먼저 홍대를 가보려 했지만, 일단은 미리 연락해둔 고시원으로 가야 했다. 일하기로 한 회사 인근에 보증금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월 25만원짜리 방을 구했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독립의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빈손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 섞인 다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각역 인근의 번쩍번쩍한 유흥가 뒷골목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고시텔은 2층의 술집과 5층의 노래방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다닥다닥 정렬된 방문 사이 좁은 통로를 지날 때 들린 어느 직장인의 트로트가 구슬펐기 때문이다. 방문이 열리던 순간의 경악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1평이나 될까? 사람 한 명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방 안에 침대며 책상이며 심지어 TV까지 들어가 있는 고시텔 방 안을 꽤 오랫동안 서성였던 것 같다.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된 건 비슷한 시기에 서울로 올라와 고시원에 거주하고 있던 고향 친구의 제안 때문이었다. 비좁은 고시원에서는 오래 거주할 수 없었기에 구로디지털단지역 인근 원룸촌에 자리를 잡아 방 한 칸을 같이 썼다. 성격도 잘 맞고 청결에 대한 기준도 서로 비슷해서 큰 충돌은 없었지만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고시원과 원룸을 경험하면서, 집의 크기가 커질수록 평당 임대료가 줄어든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친구의 결혼으로 다시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시기에 계속해서 ‘함께 살기’를 택하면서 다음 집은 무조건 개인 방이 있어야 하고, 함께 밥을 만들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실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그리고 두 명의 고향 친구, 김산과 김초원과 함께 재건축이 예정되어 있던 허름한 동네에서 거실과 주방이 있는 방 세 개짜리 집을 보증금 5백만원, 월세 50만원에 임대했다. 계약기간은 3년. 단, 재건축이 시행되면 무조건 방을 빼야 한다는 특수조항과 함께.

성직자를 꿈꾸었던 김산은 당시 서울에서 전도사일을 얻었고, 연락이 닿아 함께 집을 구하기로 했다. 단돈 50만원을 챙겨 스물넷에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는 김초원은 3년을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그는 함께 살자는 내 전화를 받고는 좁은 방 안에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걸 느꼈다고 하는데, 과장이 심하지만 드디어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던 듯하다. 서울에 상경한 고향 친구들이 함께 살길 택한 첫 번째 이유는 단순했다. 고시원이나 원룸에 홀로 사는 것보다 집을 함께 셰어하면서 절약할 수 있는 주거비가 훨씬 적게 들기 때문이다. 2010년 인구주택 총조사와 주거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서울 청년 인구의 절반 가까이는 학교나 직장 때문에 지방에서 이주했고, 서울 청년의 22.8퍼센트는 정부가 정한 최저주거기준 (14m²/약 4평)에 미달되거나, 지하나 옥탑방, 고시원 등 주택이 아닌 공간에 살고 있다. 그리고 1인 가구 청년 중 무려 70퍼센트는 2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하고 있다. 이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 잠을 자는 곳 그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아현동 쓰리룸’에서의 일상은 만족스러웠다. 청결에 대한 기준이 달라 두 손 두 발을 다 들기도 했으나 좋은 기억도 많았다. 아침마다 서로의 알람 소리 덕에 잠이 깨고, 아침에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옆방 친구가 마지못해 깨워주며 출근하라 다독여주기도 했다. 저녁마다 함께 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고시원과 원룸에 살며 혼자 밥을 해 먹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밖에서 해결하거나 3분 요리 위주의 식생활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만들어보는 된장찌개며 김치찌개가 맛이 있을 턱이 없었지만 함께 재료를 다듬고 상을 차리고, 별맛은 없지만 그것조차 재미있다고 웃으며 함께 식사하는 자체로 완전히 새로운 일상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각자 만든 노래들을 들려주기도 하고, 함께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음악을 좋아하던 우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피터아저씨라는 인디밴드를 함께하는 동료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면서, 공연의 기회가 부족한 우리에게 함께 살고 있는 집은 훌륭한 공연장이 되어 주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우리는 사람들을 거실로 초대했다. 보통 20여 명이 모였는데, 그동안 연습한 실력으로 만든 음식으로 함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나면 피터아저씨의 하우스콘서트가 이어졌다. 초기에는 우리만 공연을 하다 점차 다른 뮤지션들을 섭외하면서 저녁 식사와 인디 뮤지션의 공연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홈메이드 콘서트’가 만들어졌다. 약 9개월 정도 지속된 모임에는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모였는데, 대부분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이주민이었다. 처음에는 서로가 낯설었지만, 지속적으로 모임에 참여하는 비율이 늘어나면서 어느새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함께 사는 것을 유일한 해법으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함께 사는 이 방식이 각박한 도시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 것만큼은 확실하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나에게 집은 그저 잠을 자기 위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집을 ‘집’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사적인 공간인 집이 새로운 사람들이 오가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공 공간의 역할까지 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며, 거주 지역을 하나의 공동체로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면 동네방네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함께 먹고 마시고 놀이패의 공연을 함께 즐겼던 마당 문화처럼, 집은 얼마든지 확장될 가능성을 가진 공간이 됐다.

경제적인 문제가 처음 셰어하우스를 시작하게 해준 계기라면, 함께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변화 혹은 회복은 지금까지도 부단히 함께하는 삶의 방식을 이어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단지 잠을 자는 곳이 아닌, 사람의 온기와 소음이 있는 곳. 일찍 일이 끝난 날이면 함께 사는 사람들과 커피 한잔, 밥 한 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충돌하고 시끄럽고 거칠더라도 그 과정에서 인간다울 수 있는 곳. 함께 사는 집을 통해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온기를 나누고, 나 홀로 풀어낼 수 없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는 청년들의 함께 사는 시도마저 위협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 어느 곳 하나 재개발과 재건축이 추진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오래된 동네를 파괴하고 값비싼 아파트를 짓는다. 아현동도 2016년 여름, 재건축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세입자가 오래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다행이 네 명이 함께 살 수 있는 적당한 집을 구해 명륜동으로 이주했지만, 아현동의 네 배가 넘는 보증금을 부담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했다. 2015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은 여전히 월 소득 2백50만원 이하를 번다. 반면 소득 대비 주거비 부담 비율은 지난 10년 사이 두 배가 넘게 증가했다. 작년 3월을 기준으로 서울시의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이 6억원을 돌파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마도 이곳은 서울에서의 마지막 집이 될 것 같다. 함께 사는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대도시의 구조적 문제 앞에서 나는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8년 간이나 지속해온 이 방식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거다. 김산은 자신의 노래들 대부분이 아현동에서 만들어졌다는 말과 함께, 2년이 채 안 되게 산 ‘아현동 쓰리룸’에서의 기억과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방향을 바꿔놓았고 어쩌면 김산이라는 사람을 다시 만든 것 같다고 말한다. 2010년 빠르게 움직이는 낯선 서울에 처음 도착했던 그때의 나와, 함께 사는 것을 택하고 그러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지금의 나 또한 다르다. 삶과 주거의 방식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기에, 함께 사는 것을 유일한 해법으로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함께 사는 이 방식이 각박한 도시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들은 오늘도 한 지붕 밑에서 티격태격 살며 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자라고 있다.

이성 간의 혼인으로 맺어져 혈연관계로 형성된 집단. 가족의 이 관습적 정의는 곧 바뀌거나 대체될지도 모른다. 비혼과 졸혼을 선언하는 사람들, 동거를 택한 연인들,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 법적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성소수자 연인들, 연인 관계가 아니지만 가족이 된 사람들, 서로 모르지만 함께 사는 하우스 메이트들, 완전히 새로운 가족 모델을 찾는 폴리아모리스트들. 2018년, <GQ>는 가족은 무엇인지, 함께 하지만 또 가족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에디터
    글 / 천피터(음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