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야 원래 많았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더하다. TV만 켜면 나오는 무례한 남자들에 대한 피로감 때문은 아닐까?
요즘 여기저기서 박보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햇살 아래 앉아 책을 읽다 스르륵 잠이 든 박보검의 영상 클립은 돌고 돌아 JTBC <효리네 민박 2> 본방송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전부 알고 있을 정도다. tvN <응답하라 1998>에 속 깊고 다정한 바둑기사 택으로 출연했을 때도 박보검은 주목 받았지만, 지금의 인기 역시 그때 못지 않게 유난하다.
방송 전체를 보면 그 이유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예의, 일을 처리하는 방식까지 전부 반듯하고 깔끔하다. “누나, 이거 신어요.” 세탁실에서 양말만 신은 채로 일을 하던 윤아에게는 화들짝 놀라며 욕실화를 밀어줬다. “물어보지 않을게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막 수능을 치고 스무 살의 첫 번째 여행을 즐기러 온 손님들에게 “(시험은) 잘 쳤냐”고 물어보려던 말을 급히 거두고 이렇게 수습하기도 했다. 손을 씻으며 비뚤게 걸려있던 수건을 바로 펴고 세면대 주변을 정리하거나, 식탁 위에 놓인 쓰레기를 자연스럽게 치우는 행동은 또 어떤가? 아픈 이효리를 대신해 알아서 고양이 화장실까지 꼼꼼하게 청소하고, 서울로 일하러 가는 이상순을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태도는? “착하고 성실하고, 아주 최적의 알바야.” 이상순의 칭찬에 부연하자면 박보검은 훌륭한 알바생일 뿐 아니라 좋은 남자, 즉 신사다. 같은 맥락에서 tvN <윤식당 2> 박서준에게 쏟아졌던 관심도 이해하게 된다. 현지 언어를 미리 배워가는 준비성, 빼지 않고 일하는 성실함,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식당 손님들을 배려하는 태도가 도드라졌다.
언젠가부터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신사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누구든 다른 출연자를 비꼬거나 약점과 빈틈을 파고들어 공격해야만 ‘예능감 좀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예능 초심자를 겁줄 때 흔히 쓰는 표현, ‘예능은 정글’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건 아닐까? 강호동과 김희철을 비롯한 JTBC <아는 형님>의 멤버들은 예의 없는 콘셉트로 인기를 얻었고, 멤버들 중 게스트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던 김영철은 재미없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따져보면 무례한 캐릭터를 고수하는 남성들은 한국 예능판에서 일군을 이루고 있다. 김구라는 MBC <라디오스타>에서 외모나 과거사를 이용해 툭하면 게스트를 인신공격한다. 해프닝에 가깝긴 했지만 지난해에는 ‘김구라를 <라디오스타>에서 하차시켜달라’라는 국민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경규는 어떤 예능에서든 호통을 치거나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며, MBC <무한도전>의 박명수 역시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게스트들에게 불쑥 반말을 하는 등 예의 없는 행동을 일삼았다.
이런 무례함이 예능의 재미를 위한 위악적 콘셉트로 이해되던 때도 있었다. 복귀 후 한창 여러 개의 예능에 출연하던 탁재훈의 무례한 멘트는 ‘악마의 입담’으로 포장되었다. 한때 <아는 형님> 속 김희철의 공격적인 멘트는 웃긴 영상으로 따로 편집되어 SNS 상에서 수천 개의 ‘좋아요’를 받기도 했다. 시대는 점차 변해가고, 말 한 마디 또는 행동 하나에 예전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늘어난다. 그러나 예능의 시계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모른다는 듯 멈춰있다. 언제나 트렌드를 이끈다는 평가를 들으며 13년을 이어온 <무한도전>조차 변화의 기미를 읽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외모 지적, 남 비난하기, 호통치기 등 서로가 서로에게 무례하게 굴어 웃음을 유발하려는 예능의 분위기는 더 이상 참고 보기 힘들 정도로 피로하게 느껴진다.
예능뿐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 눈을 돌려 봐도 괜찮은 남자, 본보기로 삼을만한 남자는 찾기 어렵다. <신세계>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아수라>,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웃는 남자>, <브이아이피>, <마스터>, <더 킹>, <내부자들>…. 최근 몇 년간 개봉한 영화 중 거칠고 폭력적이고 무례한 남자들이 우르르 주인공이었던 작품들을 떠오르는 대로만 나열해봐도 이 정도다. 깡패와 사기꾼, 사채업자와 사이코패스가 배우만 바꿔가며 사이 좋게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동안 좋은 남자의 자리는 거의 마련되지 않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남자 배우들 중 근래 매너 있고 올바르고 성실한 캐릭터를 연기한 경우는 떠올려보려 해도 다섯 손가락을 채 접기 힘들다. 픽션 속 남자들이 모두 예의 바르고 선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비슷한 얼굴의 악당들이 죄다 주인공인 상황에 지쳤다는 얘기다. 예의를 차릴 줄 알고, 고민다운 고민을 할 줄 아는 남자 주인공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나? 모두를 피곤하게 만드는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이제 그만 저물 때가 됐다. TV에서도, 스크린에서도 말이다.
- 에디터
- 글 / 황효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