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 박정민, 임시완, 류준열, 이제훈. 지금 가장 뜨거운 남자 배우들의 얼굴을 새롭게 들여다봤다. 네 번째는 류준열이다. 날이 선 눈매, 요철이 분명한 콧날과 광대, 큼직하게 다문 입이 부딪치는 인상은 종종 이야기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카메라 앞에 앉아서 졸기만 해도 스펙터클이 되는 배우들이 있다. 이를 테면 젊은 시절의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시드니 폴락의 영화 <추억>은 주인공 케이티(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대학 시절의 짝사랑과 우연히 재회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파티장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든 남자를, 여자는 홀린 듯 한참 동안 바라본다. 그쯤에서 감독이 그 유명한 주제곡을 배경에 깔면서 두 캐릭터의 대학 시절로 플래시백을 하지 않았다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두 시간 내내 로버트 레드포드의 얼굴만 구경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추억>이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선댄스 영화제의 설립자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을 펼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거실 벽에 걸어두고 싶을 만큼 완벽한 미소가 클로즈업 될 때마다 관객들은 여자 주인공의 일렁이는 감정을 이견 없이 이해하게 된다. 배우의 육체는 그 자체로 연기의 중요한 수단이고 이야기의 큰 일부다.
SNS나 네이버 지식인의 유저들은 종종 이렇게 묻는다. ‘류준열은 잘 생긴 건가요?’ 분명 류준열은 로버트 레드포드와는 다른 종류의 배우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이 ‘세대를 대표하는 미남’은 아닐 거라는 이야기다. 날이 선 눈매, 요철이 분명한 콧날과 광대, 큼직하게 다문 입이 부딪치는 인상은 보편적인 호감을 얻기에는 다소 덜컹거리는 편이다. 쇼비즈니스는 외모에 대한 편협한 기준이 표준어처럼 당연하게 통용되는 세계다. 그곳에서 류준열의 개성은 모두가 이해하기는 어려운 사투리에 가까울 수도 있다.
젊은 주식 브로커가 은밀하고 위험한 제안을 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루는 스릴러 <돈>은 이러한 배우의 특징을 극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증권사에 첫 출근을 한 날, 팀장은 조일현(류준열)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진담 같은 농담을 던진다. “얼굴 마담은 계속 내가 해야 되겠네.” 주인공은 학벌, 집안, 외모까지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주변을 둘러싼 남자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직장 내 라이벌인 우성(김재영)은 잘 생긴 데다 말주변까지 좋아서 어딜 가든 시선을 끈다.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악당은 유지태이고 일현의 동경을 한 몸에 받는 조력자는 무려 다니엘 헤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돈>은 ‘흙수저’의 역전극이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주인공의 용모는 그가 극복해야 할 무수한 허들 중 하나다. 류준열이 연기하는 인물의 열등감에 관객들은 별다른 무리 없이 몰입한다. 만약 다니엘 헤니가 조일현이었다면 객석은 좀 더 어리둥절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돈> 뿐만이 아니다. <독전>, <뺑반> 등의 작품에서도 류준열은 반전의 열쇠였다. 과소평가 되던 인물이 사건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감춰왔던 단면을 드러내는 순간 이야기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아이돌보다 개성파 조연에 가까워 보일 가능성이 높은 외모의 주연급 스타이고, 이러한 자신의 입지를 십분 활용해 캐릭터에 대한 예상을 흥미롭게 교란한다. 돌이켜보면 류준열을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은 <응답하라 1988>는 이후의 필모그래피에 대한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매 시즌마다 비슷한 전개가 공식처럼 반복되던 시리즈에서 이 낯선 얼굴은 뜻밖의 변화구였다. 명랑 만화처럼 등장했던 신인은 극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기대 이상으로 로맨틱해진다.
변곡점이 있는 캐릭터를 연달아 맡아왔지만 류준열의 표현 방식은 극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낙차가 큰 표정 변화나 과시적인 바디 랭귀지를 동원하는 대신 서글서글하게 가늘었다가 돌연 날카로워지는 눈매나 높게 들뜬 뒤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는 목소리를 섬세하게 조율하는 쪽을 택한다. 선이 강한 이목구비는 배우에게 꽤나 조심스러운 무기다. 감정을 담기 좋은 캔버스이긴 하나 표현이 조금만 넘치면 결과물이 요란한 캐리커처가 될 우려도 있다. 류준열은 자신의 신체를 잘 이해하고 경제적으로 사용한다. 캐릭터의 전환은 갑작스러운 점프가 아니라 한 겹씩 새로운 층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영리한 절제는 종종 우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잘생김을 연기한다’는 평가는 이런 모습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류준열은 현재 가장 든든한 티켓 파워를 발휘하는 젊은 스타 중 한 명이며 입체적인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폭 넓게 담아 내는 얼굴이다. <독전>의 락 같은 장르적 괴물이든 <돈>의 일현 같은 평균치의 소시민이든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설득력을 유지한다. 화사한 관상용에 머물지 않는 이 역동적인 배우는 이야기에 현실적인 질감을 더할 줄 안다. 로버트 레드포드와는 종류가 다르겠지만 류준열의 등장만으로 관객들이 많은 부분을 납득하게 되는 캐릭터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 에디터
- 글 / 정준화(디지털 기획자)
- 일러스트레이터
- 조성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