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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과일 트렌드

2021.04.08GQ

모름지기 작고 달며 씨가 없고 껍질이 얇아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망고를 닮은 구석이 있다면 한 입 베어 물기도 전에 일등이다.

21세기 들어 소비 패턴이 바뀌며 국내 과일 시장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1인 가구가 등장하는 등 가구원의 수가 대폭 감소하며 소포장은 물론, 과일 낱알의 크기 또한 한둘이 한자리에서 먹어 치울 수 있도록 아담해졌다. 또 껍질째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씨가 없어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으며 관능적으로 신맛 대비 단맛이 월등히 높은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한반도에서 사랑받아 온 많은 종류의 포도, 사과, 배, 감, 귤, 복숭아, 수박, 토마토 등이 탈락 위기에 놓였다.

이렇게 과일 소비 시장의 지형도가 대폭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 우리 정부가 여러 해외 국가와 FTA를 체결하고 시장을 열면서부터다. 여기에 해외여행의 대중화와 SNS의 발달로 개개인이 이국의 과일에 눈뜨며 소비 패턴의 변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누구보다 먼저 희귀 품종의 과일을 손에 넣어 맛보고 SNS에 자랑하고자 하는 작금의 경향 또한 한몫했다. 한때 유럽 여행자만의 특권이었던 납작복숭아가 SNS에서 돌풍과 같은 인기를 끌자 몇 년 후 거짓말처럼 국내산 납작복숭아가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국내 생산량이 적어 희소하며 코로나19로 인해 유럽 여행이 어려워져서일까. 지난여름 납작복숭아는 출시도 되기 전에 예약 마감됐다. 과일 박스 또한 10킬로그램에서 5킬로그램을 거쳐 이제는 2~3킬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총량은 물론 과일 낱알의 크기도 작은 것을 선호하니 1인용 수박이 등장하고, 탁구공만 한 미니 사과가 인기를 끈다.

특히 1인 가구의 경우 혼자서 일정 규격의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채우기 어려운 탓에 음식물 쓰레기는 골치 아픈 문제다. 그들이 껍질째 먹을 수 있으며 가능하면 씨가 없는 과일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일 시장이 개방되며 포도가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기존에 국내에서 주로 재배하던 캠벨 등의 포도 품종은 껍질이 질기고 두꺼워 껍질째 먹을 수 없을뿐더러 씨가 있다. 한편 수입 포도들은 껍질이 얇아 껍질째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씨가 거의 없다.

소비 패턴이 변하며 복숭아 시장도 크게 흔들렸다. 복숭아는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백도와 황도, 천도가 바로 그것. 과육이 흰색을 띠는 백도와 노란색을 띠는 황도는 껍질에 보송보송한 털이 있지만, 천도는 털이 없다. 과거에 천도복숭아는 신맛이 강하고 과육이 단단하며 과즙이 없어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편의상의 이유로 천도를 선호하자 농가들은 천도이면서 맛과 식감은 백도나 황도에 가까운 품종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 노력의 결실이 바로 신비복숭아다. 2018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신비복숭아는 현대인이 복숭아에 바라는 점을 모두 갖춘 이상형에 가깝다. 털이 없으며 크기가 작고 당도가 높으며 식감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동시에 과즙이 풍부하다. 여전히 희귀 품종에 속하는 이 신비로운 복숭아는 올해도 출시되자마자 품절될 확률이 높다. 사과도 마찬가지다. 통째로 먹을 수 있도록 껍질이 얇은 품종 위주로 개발하고 있다. 한편 무조건 과피를 깎아 먹어야 하는 감 또한 태추단감이라고 껍질째 먹는 품종을 출시하며 반등을 노린다.

편의성 외에 관능적 특성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2016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과일을 구입할 때 신선도, 가격 다음으로 당도를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상의 이유로 과도한 당 섭취를 꺼리는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과일만큼은 단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과일이 건강한 식재료여서 달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처럼 과일의 당도가 강조된 배경에는 수입 과일의 영향이 크다. 이미 당도가 상품성의 기준이던 해외 국가들이 새롭게 펼쳐진 시장에 경쟁력 있는 품목과 품종 위주로 수출하며 당도를 셀링 포인트로 내세운 것. 실제로 수입 과일이 패키지에 당도 표시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마치 수입 소고기 시장이 열릴 위기에 처하자 한우협회가 마블링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한우의 경쟁력을 키웠듯이, 국내 과일 업계는 고당도 프리미엄 제품을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도를 측정하는 단위인 ‘브릭스’가 소비자의 귀에 들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 공급자, 유통업자, 소비자의 관심이 당도에 치우친 나머지 당도가 비교적 낮거나 산미가 높은 품목과 품종이 비주류로 설 곳을 잃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시대의 요구에 따라 입맛이 바뀌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끔 편중된 관심이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지난여름 한 유명 스타일리스트가 다이어트의 비결로 단맛이 강한 토마토, 즉 ‘단마토’를 소개하면서 이 낯선 과일은 겨울까지 품귀 현상을 이어갔다. 단마토는 토마토에 설탕을 뿌린 것마냥 달다. 토마토의 당도를 이렇듯 극적으로 끌어올린 방법으로 농장과 유통사는 ‘스테비아 농법’을 꼽았다. 스테비아라는 천연감미료를 비료로 활용해 열매의 당도를 올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주장은 여러모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이 토마토가 과채류가 아닌 과채가공품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과채가공품이란 과일 원료를 이용해 가공한 제품으로 일반 토마토를 수확한 후 스테비아 희석액을 투입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물론 스테비아는 천연감미료로 건강에 나쁘지 않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신농업기술로 일군 고급 과채류인 줄 알고 비싼 가격에 구매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단 토마토가 좋으면 일반 토마토와 스테비아를 사서 스테비아 가루를 토마토에 뿌려 먹는 것이 경제나 건강 면에서 훨씬 더 이롭다.

또 다른 특이점은 과일 맛의 표준이 은근슬쩍 망고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가까우면서 경비가 저렴한 동남아시아에서 망고를 맛본 경험이 저마다 쌓이며 많은 사람이 이 새콤달콤하면서 녹진하고 어쩐지 장미의 향마저 느껴지는 신비한 과일을 국내에서도 찾기 시작했다. 그 덕에 망고의 수입이 크게 늘었으며 국내에서도 망고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비싼 가격에 거래되며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하여 망고는 생과일보다 음료나 디저트의 원료로 소비되는 경향이 크다. 이는 바나나가 선망의 대상이던 40년 전 바나나맛 우유와 바나나킥 등 바나나 향을 강조한 식음료가 등장해 큰 사랑을 받은 사례와 닮아 있다. 이렇듯 망고는 여전히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다 보니 유통사들은 이 점을 이용해 새로운 품종의 과일을 홍보할 때 “망고 맛이 난다”는 점을 부각한다. 앞서 언급한 스테비아 토마토에도 망고 맛이 나는 토마토라고 하여 ‘토망고’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토마토 외에도 거의 모든 품목에 망고 맛이 난다는 신품종이 등장했다. 프리미엄 과일의 대명사가 된 샤인머스캣이 처음 국내에 상륙했을 때도 ‘망고포도’라고 소개됐으며, 복숭아계에는 그린황도, 수박계에는 블랙망고수박 등이 있다. 사실 이들 중 그린황도를 제외하면 실제로 망고 맛이 난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당도가 높은 과일을 먹으며 망고를 떠올리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 토착 과일도 아닌 열대 과일이 맛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은 현실이 다소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단군 이래 가장 많은 품목과 품종의 과일을 식별하고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지금은 조류가 어디로 이끄는 줄 모르고 큰 파도에 휩쓸리더라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기호에 맞는 과일을 언젠가는 찾을 것이다.

    이주연(푸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