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정재가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
GQ 성기훈이 돌아온다고요?
JJ 저도 황동혁 감독님의 기자 인터뷰에서 들었어요. <오징어 게임> 시즌 2가 나온대도 성기훈이 돌아오리란 확신은 없었으니까요. 인터뷰 답변하실 때 옆에서 제가 그랬죠. “(동그란 눈으로) 감독님, 저 시즌 2에 나오는 거예요?”
GQ 미국에서의 반응은 듣던 대로였어요?
JJ 훨씬 더 뜨거웠어요. <라라랜드> 프로듀서부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배우, 아티스트 마크 브래드포드까지 그야말로 유명인들이 제게 와서 칭찬 일색이었어요. 얼떨떨하더라고요. 특히 마크 브래드포드는 평소에 좋아하는 아티스트라 ‘우와, 키 크다!’ 감탄하고 있는데 제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제 한국 사람의 시대가 온 것 같다.” 한국 사람에겐 독특한 에너지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아시아인과 다르게 흑인 얼굴, 백인 얼굴이 모두 공존한다나?
GQ 황동혁 감독이 AP 통신 인터뷰에서 시즌 2 계획을 말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성기훈이 돌아와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이다.” 성기훈이 히어로라도 되는 걸까요?
JJ 글쎄요. 성기훈은 일상에서 흔히 볼 법한 평범한 아저씨인데, 그런 보통 사람이 약간의 정의와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거대한 악과 싸워 이겨낸다, 이런 전개라면 히어로물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 지 저도 몹시 궁금해요.
GQ 성기훈을 연기하는 이정재는 관객에게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졌죠. 바로 전작만 해도 아주 화려한 룩을 한 잔혹한 킬러 역할이었잖아요. 그런데 주변 지인들의 반응은 달랐다면서요?
JJ 성기훈이 제 평소 모습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어요. 이왕이면 밝게 살려고 하는 모습이 조금 닮은 것 같아요.
GQ 성기훈은 구석진 삶, 어려운 사람들을 잘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심장을 지녔죠. 이정재 씨에게도 비슷한 면모가 있나요?
JJ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얘기 본인이 하려니까 참 쑥스럽네요.
GQ 극 중 새벽과 부딪치는 장면에서 원래 설정에는 없던 행동이 불쑥 튀어나왔죠. 엎어진 커피에 빨대를 꽂아서 건네는데 그 행동이 낯설게 보이지 않더라고요. 감각적으로 튀어나온 건가요?
JJ 작고 사소한 애드리브는 배우도 모르게 나오는 경우가 잦죠. 굳이 빨대를 꽂아서 건넨 장면처럼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과 뉘앙스가 캐릭터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때, 그런 연기가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연기예요. 저는 평소에 한 컷 찍을 때마다 바로 모니터링을 해요. 그런데 <오징어 게임>을 찍을 때는 달랐어요. 모니터가 현장과 멀리 있기도 했고, 영화와 달리 여러 개 에피소드를 스피디하게 진행해야 해서 모니터링을 꼼꼼하게 할 시간이 없었죠. 감독님께 제 연기를 온전히 맡겼어요. 저는 열심히 할 테니 감독님이 오케이 하세요, 하고요. 나중에 완성본을 보고서야 제가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알게 됐죠. 신선하더라고요.
GQ 인터넷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어요. “감독에게 잘 속는 배우 이정재.” 없던 액션 신이 생기거나(<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우정 출연을 약속했던 영화에서 갑자기 역할의 비중이 커지는 일(<신과 함께>)들이 자주 일어나죠. 그건 어쩌면 유연한 배우라는 방증이 아닐까도 생각했어요.
JJ 이정재 하면 떠오르는 어떤 고정적인 이미지를 새로운 캐릭터로 계속 갱신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유연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어요. 관객분들은 늘 새로움에 목마르죠. 저도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경험해보고 싶은 욕구가 강했어요. 그렇게 쌓은 여러 경험이 정리되고 정제되어 점점 표현하는 데 도움이 돼요. 그렇다고 제가 대단히 유연한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GQ 왜요?
JJ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허. 관객분들이 좋아할 만한 수준에서 너무 앞서가서도, 뻔해서도 안 되니까, 조금씩 새롭게 나아가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정도예요. 예전에는 하나의 유행이 있으면 모두가 그것을 좇았죠. 요즘은 관객들이 좋아하는 폭이 굉장히 넓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면 고민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보아야 거기에 맞춰 연기를 할 수 있어요. 계속 보고, 계속 귀 기울여야죠.
GQ 촬영을 마친 <헌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 연출하는 작품이에요. 연출자로의 확장이 배우 이정재를 변화시키고 있나요?
JJ 연출자는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 시각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기는 해요.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중점에 둔 건 ‘이 이야기가 과연 지금 필요한가’에 관한 거였어요. 그리고 두 시간 안에 관객분들께 이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통해 우리 함께 이야기를 해봅시다. 관객분들께 화두를 던지고 싶었어요.
GQ 정우성 씨와 함께 연기한다는 것도 의미가 있죠. <태양은 없다> 이후 몇 년 만의 만남이죠?
JJ 자꾸 계산하지 마세요 하하하하! 겨우 나이를 잊고 살고 있는데 말이에요. 안 그래도 아까 정호연 씨가 본인 인스타그램에 <태양은 없다> 사진 올리겠다고 불쑥 문자가 와서 당황했어요.(웃음) 그래도 올리라고 했죠.
GQ <태양은 없다>는 이정재와 정우성의 만남이 가장 뜨겁고 반짝인 시기였잖아요.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어때요?
JJ 지나온 추억이자 마음껏 경험한 젊음이고, 여러 시도를 했던 캐릭터라서 다양한 감정이 들죠.
GQ <헌트>에 정우성 배우가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는 뭐였어요?
JJ <태양은 없다>를 1998년에 찍고 1999년 1월에 개봉했어요. 그 이후로 작품에서 다시 만납시다 계속 이야기했는데 성사가 안 됐어요. 그러면 내가 직접 정우성과 이정재에 맞춰서 한번 써봐야겠다 마음먹고 쓴 시나리오가 바로 <헌트>예요. 그러니까 우성 씨가 반드시 필요했죠.
GQ 그런데도 정우성 씨가 몇 번이나 출연을 고사했다고 하던데요.
JJ 시대 배경이 1983년이고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당시 뉴스와 자료를 계속 보다 보니 가슴에 뜨거움 같은 게 응축되더라고요. 처음에는 시나리오 톤이나 표현도 굉장히 묵직했어요. 상업 영화답지 않게요. 우성 씨는 그런 부분을 조금 부담스러워했어요.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해서 주제 의식은 가져가면서도 더 가볍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면서 수정을 거듭했죠. 그렇게 4년이란 세월을 보냈어요.
GQ 이정재 그리고 정우성, 둘이 함께라서 가능했던 일이 있나요?
JJ 저희 둘에게 비슷한 면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표현하는 스타일이나 방법에선 다른 부분도 많아요. 이건 이정재와 정우성이라는 배우의 차이이기도 하고, 작품 속에서 상반된 인물로 존재하는 까닭도 있어요. 다른 배우들은 어떻게 연기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희는 캐릭터에 저희를 철저히 맞추는 스타일이에요. <헌트>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상반된 캐릭터인 정우성, 이정재의 앙상블이 좋았던 것 같아요.
GQ 한번은 인터뷰에서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나은 것 같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JJ 실패를 좌절로만 여기면 인생이 얼마나 암울할까요? 실패도 어떤 면으로 바라보면 긍정적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한 얘기예요. 그리고 이게 제 성격이자 성기훈의 성격에도 묻어 있는 면모고요. 작은 실패든 큰 실패든, 열심히 했을 때 남겨진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고 봐요.
GQ 그런 삶의 태도는 타고난 건가요?
JJ 책임감으로부터 온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집에서 가장 역할을 하면서 가족을 지켜야만 했어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일도 더 열심히 해야 했고, 일하는 현장에서는 저를 믿고 캐스팅한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죠. 한 분야를 오래 하다 보니 소중함을 더 많이 느껴요. 팬들, 관객분들에 대한 책임감요.
GQ 관객 이정재가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에게 건네고 싶은 응원의 말이 있을까요?
JJ 세상 살기 너무 힘들다, 각박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할 거다. 그렇게 말하는 어른이 흔하잖아요. 그런데 인생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한창 성공하고 있을 때는 잘 몰라요.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에야 지금 내가 겪는 게 실패구나, 슬럼프라는 거구나 느끼죠. 저도 그런 때가 있었어요. 의욕 없이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산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 있잖아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삶은 계속돼야죠. 그러니까 긍정적인 면을 자꾸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내가 꼭 배우를 해야만 밥 먹고살 수 있겠어? 꼭 성공해야만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건가? 생각의 전환을 하다 보면,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작은 역할부터 작은 일부터 시작하다 보면, 거기서 나름의 재미를 느끼게 돼요.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긍정의 에너지가 좋은 쪽으로 제 몸을 이끌어가는 것 같아요. 나의 성공이 어디 있을까를 찾기보다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인생이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GQ 그런 믿음이 이정재를 일으켜주었나요?
JJ (성기훈의 미소로) 일으켜주지 않았어도 저는 만족하고 살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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