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는 애스턴마틴을 몰고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인다. 제정신인가 싶다. 목숨을 건 상황에서 저 차를 타다니, 맙소사!
“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영화 007 시리즈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단 한 잔의 술에도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취향과 인생 철학이 반영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대사다. 실제로 매 시리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을 보고 나면 보드카 마티니를 젓지 않고 흔들어서 먹어보겠다는 욕구가 생긴다. 그런데 보드카 45밀리미터에 베르뭇 20밀리미터를 넣고 얼음과 함께 잘 흔들어서 얇은 레몬을 올린 뒤 마시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깔끔하고 날카로운 맛의 정통 마티니와 달리 한결 순해진 보드카의 부드러운 풍미가 입 안에 맴돈다. 특유의 맛보다는 그저 개성이 강해서 기억에 남는 술이랄까.
007 시리즈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스물 다섯 편의 작품을 선보이며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스파이 장르 영화로 인정받았다. 극 중에서 코드 네임 007로 불리는 제임스 본드는 첩보 요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세련되고 멋진 신사처럼 묘사된다. 그가 타는 자동차, 애용하는 시계, 입고 마시는 모든 것이 절묘하고 우아하게 관객의 시선을 잡는다. 각각 당위성과 목적을 갖고 등장하지만 대부분은 PPL, 즉 간접광고를 통한 마케팅의 산물이다.
숀 코너리가 초대 007로 활약했던 1960년대에는 돔 페리뇽을 전면에 내세웠다. “돔 페리뇽 1953년산을 3도 이상의 온도로 마시는 건 귀마개를 하지 않고 비틀스 음악을 듣는 것과 같아”라는 매뉴얼적인 설명이 영화에 등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1990년대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 시리즈에선 볼랭저 RD 샴페인을 최고로 대우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후임 제임스 본드인 대니얼 크레이그는 맥켈란을 주로 마신다. 그는 보드카 마티니, 하이네켄 맥주도 멋지게 마신다. 주종을 가리지 않는 음주 취향을 보고 있자니 대니얼 크레이그 버전의 제임스 본드를 도무지 어떤 인물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자는 이전 시리즈에서 크게 벗어나 거칠고 남성적이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캐릭터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다르다. 이건 캐릭터가 가진 취향이나 연출의 문제가 아니다. 과도한 PPL로 점철된 걸어 다니는 광고판일 뿐이다.
지난 스물다섯 편의 007 시리즈를 통틀어보면 프랜차이즈가 가진 광고 영역이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우여곡절 끝에 최근 개봉한 <007 노 타임 투 다이>에서는 애스턴마틴, 랜드로버, 오메가, 톰 포드, 마시모 알바, 드랙스 등 다양한 브랜드를 직간접적으로 노출하며 PPL 수익금으로 1천억원 이상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업 영화에서 직간접 광고가 포함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고 관객의 몰입도를 저해하는 연출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본디 007 시리즈가 여러 스파이 영화 사이에서 빠르게 주가를 올릴 수 있었던 비결은 상상력으로부터 구현된 무기와 개성 있는 이동수단 덕분이었다. 숀 코너리가 몰았던 애스턴마틴 DB5는 회전하는 차량 번호판과 헤드라이트 안쪽에 달린 머신 건, 방탄 윈드 실드로 추격하는 자동차를 멋지게 따돌렸다. 1970년대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 배역을 이어받았을 당시 제작진은 본드 카도 싹 바꿨다. 크게는 로터스 에스프리 시리즈 1을 미래형 자동차로 만들었다. 적들에게 쫓기던 에스프리는 바다로 달려들어 날렵한 잠수정으로 변신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은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을 뿐 아니라 자동차를 제작하는 이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줬다.
CG 기술이 지금과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한 1990년대에는 원격 조정과 자율주행 기술을 탑재한 BMW 본드 카가 신스틸러로 등장했다. 특히 7시리즈는 후면부의 범퍼가 열림과 동시에 스파이크 볼을 쏟아냈고, Z8은 앞바퀴의 가니시 부분에서 로켓을 발사해 적의 헬기를 단번에 추락시켰다. 이후 제임스 본드가 BMW 대신 에스턴마틴 V12 뱅퀴시로 다시 회귀했을 무렵 영화 속 영국 첩보국의 기술력은 이 세상 수준이 아니었다. 차에 달린 카메라가 주변 모습을 복사해 투명한 상태로 위장하거나 보닛에서 자동 조준 소총이 튀어나왔다.
2006년 이후 본드 카는 다시 한번 변했다. 첨단 전자 제어 기술이 현실의 이동수단을 급속도로 발전시키면서 비현실적인 연출을 영화에 접목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탈것을 이용한 추격 신은 정교한 스턴트의 영역이 됐다. 제임스 본드는 기발한 무기와 신박한 기능 대신 운전 실력만으로 자신을 추격하는 악당들을 따돌려야 했다. 최신작 <007 노 타임 투 다이>에도 그의 처지가 잘 드러난 카 체이스 신이 있다. 제임스 본드가 출고된 지 20년도 더 된 도요타 랜드 크루저를 타고 최신형 랜드로버 무리에 쫓기는 장면이다. 노르웨이의 산기슭을 거침없이 튀어 오르면서 달려오는 랜드로버 디펜더 무리를 보고 있으면 적들의 존재가 강력하게 느껴진다. 일단 차를 선택하는 안목과 운전 실력이 수준급이다. 같은 차종을 실제로 오프로드에서 타보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다. 키가 높은 SUV이지만 최신형 설계와 각종 전자 제어 장치 덕분에 오프로드의 스포츠카로 불려도 될 만큼 발군의 주행 능력을 지녔다. 그런데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런 수준급의 차를 말 그대로 쉽게 제친다. 구닥다리가 된 도요타 랜드 크루저로 몸싸움을 벌이더니 디펜더를 모두 뒤집어버린다. 자동차 추격 신의 전체 시퀀스가 허무할 만큼이나 단순하다. 차라리 자동차에서 로켓이 튀어나오던 장면이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현실적인 분위기와 액션 장면을 내세운 요즘의 007 시리즈에선 본드 카가 존재하는 이유가 희미하다.
본드 카로 쓰인 애스턴마틴도 영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카라는 것을 제외하면 첩보 활동에 완벽하게 동화되지 않는다. 대니얼 크레이그가 연기한 제임스,본드는 애스턴마틴 V12 DBS를 시작으로 아주 현실적인 고성능 스포츠카의 면모를 강조했다. 반면 영화 속 이미지와 실제 성능은 사뭇 다르다. 애스턴마틴은 정교한 움직임과 빠른 응답성을 발휘하는 차가 아니다. 대배기량 엔진은 높은 출력을 발휘하지만, 변속기는 예상보다 느긋하고 움직임에 허점이 많다. 장거리를 편하게 달릴 목적으로 개발한 호화스러운 집무실에 가깝달까. 그래서 주행 한계 영역에서는 아슬아슬하게 꽁무니가 춤추며 운전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실제로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적들을 피해 도로를 위험천만하게 내달린다. 하지만 실제로 목숨을 걸고 달려야 하는 상황에 필요한 자동차라면 애스턴마틴은 분명 잘못된 선택일 수 있다. 만약 주행 성능이 월등히 뛰어난 포르쉐 GT3를 탔다면 어땠을까? 추격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룸미러에 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에는 이전 시리즈보다 훨씬 다양한 탈것이 등장한다. 애스턴마틴 DBS 슈퍼레제라, 클래식 V8 벤티지와 하이퍼카 발할라, 트라이엄프 스크램블러 1200, 랜드로버 시리즈 3 등 면면은 화려하다. 하지만 주인공 격인 DB5를 제외하면 일부는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비중이 적다. 그조차도 캐릭터나 이야기와 크게 상관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번 신작은 160분에 육박하는 광고처럼 느껴졌다. 고뇌에 빠진 제임스 본드의 인간적인 모습은 그럴듯했으나 과도한 PPL로 시선이 분산되는 순간을 여러 번 직면했다. 속사정이야 어쨌든 대니얼 크레이그 시대의 007 시리즈는 마무리됐다. 다행이라면 DB5의 화끈한 액션 신이 찬란했던 과거의 유산을 시리즈의 미래와 연결하는 구심점이 됐다. 간신히. 이조차도 아슬아슬했다. 글 / 김태영(자동차 저널리스트)
- 피처 에디터
- 김영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