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통 속에서 인고의 60년. 글렌 그란트 60년을 마신다는 건, 거대한 세월을 감히 삼키는 일이다.
향을 가둘 수 있는 금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시공간, 오로지 그 찰나의 공기 속에서만 뿜을 수 있는 어떤 향기. 그것이 가둬진다면 신이 인간의 후각을 가장 우월한 기억 장치로 두진 않았겠지. 다만 기억 금고에 가장 가까운 물질의 형태가 있다면, 바로 위스키가 아닐까 한다. 글렌 그란트 역사상 가장 고숙성 위스키, 글렌 그란트 60년이 공개된다는 소식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크통 속에서 60년. 한때는 풋내기였던 원액이 그 오랜 시간을 견디며 얼마나 중후한 멋을 휘두른 중년으로 성장했을까. 천사의 몫으로 해마다 증발하는 ‘엔젤스 셰어’를 고려한다면, 위스키는 오크통 안에서 단지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몸을 웅크려 더 단단하고 멋진 어른으로 완성된다. 아티스트가 수십 년 동안 덧대어 칠한 캔버스에서 마침내 붓을 놓는 기분으로, 글렌 그란트의 마스터 디스틸러 데니스 말콤은 예순 살 된 여러 오크통 중 단 하나, 5040 캐스크를 선택했다. 이거다. 이거라면 나의 60년 위스키 인생을 걸어도 충분하다. 마침내 선택된 금빛 바다는 글렌 그란트 증류기 모양을 압축한 보틀에 근사하게 담겼다. 스페이 사이드 지역에 위치한 글렌 그란트 증류소는 주로 버번 캐스크에서 숙성하지만, 글렌 그란트 60년은 퍼스트필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했다. 탐스럽게 익은 오렌지 향과 다양한 과일, 고소한 견과류, 어렴풋한 시가 향으로부터 탄탄한 다크 초콜릿과 토피넛 맛으로의 릴레이. 다채로운 맛과 향이 저마다 고개를 번쩍 드는데, 그 화합이 요란하지 않고 잔잔하고 힘차며, 절묘히 탁월하다. 입 안을 단지 적신다는 기분으로 아주 적은 양의 원액을 쓱쓱 칠함에도 길게 이어지는 장작 뉘앙스와 대추, 구운 무화과를 연상시키는 피니시. 여기에선 오래된 한옥에서 느껴지는 고목의 포근함마저 느껴진다. 360병 중 단 29병만이 한국에 당도했다. 증류소로 초대된 듯 생생한 미디어 아트가 펼쳐지는 ‘비언유주얼’에서 요리 페어링과 진행한 저녁은 60년의 향과 함께 기억 속에 영원히 갇힐 것이다.
- 피처 에디터
- 전희란
- 포토그래퍼
- 홍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