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내가 이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12

2022.03.23신기호

당신의 섬광과도 같은 시작을 열어준 건 무엇이었나요?

최승자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ㅣ육호수 시인, 문학평론가
꿈과 만났을 때 2014년 어느 날로 기억하고 있다. 친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책장에서 이 시집을 보게 되었다. 친구는 최승자 시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당시 여러 가지로 불안정한 시기였기 때문에 시간이나 계절의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반년 정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2014년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때 나이가 스물 넷이었는데, 나는 그전까지 시집이라고는 읽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생의 기억 같다. 스물넷까지 최승자도 읽지 않고 살고 있었다니(웃음).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이 시집의 표4, 꼬리말의 첫 문장이다. 그다음 문장은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이다. 지금도 머릿속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문장. 매혹되듯 빨려 들어갔다. 그동안 시를 읽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문장으로, 글로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시집 속 언어 하나하나가 내게 글로, 이야기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체적인 실물로 느껴졌으니까.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일이 마치 하나의 인생을 사는 경험 같았다. 같은 주파수의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듯, 영혼 깊은 곳이 울리는 느낌이랄까. 이 시집을 읽는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껴 읽었다.
만남 그 후 시집을 무작정 읽어댔던 것 같다. 읽다 보니 ‘어쩌면 나도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학교 문학회에 들어갔고, 외부 시 창작 수업들을 듣게 되었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라 학사 경고도 여러 번 받았고, 한 번 더 학사 경고를 받으면 제적이 되는 상황까지 몰려서 휴학을 하고 잡지사에서 일하며 시를 읽고 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휴일에는 매일 세 권씩 읽고, 십 년 치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필사하기도 했고. 가방에 시집이 없으면 불안해서 밖에 잘 나가지도 못했다. 또 항상 어떤 시의 어떤 문장을 머릿속에 넣고 지냈다. 이를테면 “절벽이란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안희연 시, ‘백색 공간’ 중)와 같은 문장을 머릿속에 넣고 출근을 하고 밥을 먹는 거지. 시의 문장에는 세계에 작용하는 어떤 인력이 있어서, 그 문장을 생각하고 있을 때만 보이게 되는 모습들이 있고, 들리게 되는 말이 있다. 시를 찾겠다고 네팔에 가기도 했고, 어디서든 시가 될 만한 것들을 메모하며 지내기도 했다. 악몽을 꾸면 꿈에서도 생각했다. ‘아 지금 이 악몽의 이미지를 적어둬야 하는데’라고. 악몽에서 깨자마자 바로 메모하고, 다시 악몽으로 들어가려고 잠을 청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눈뜨자마자부터 잘 때까지, 그리고 자면서 도 시를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시를 쓰고 일 년 반이 채 되지 않아 등단을 했고, 등단을 하고 또 이 년이 되지 않아 첫 시집이 나왔다. 문학을 전공하기 위해 학원 일로 학비를 벌어 원하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했고, 올해는 문학평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했다. 시 그 자체가 아닌, 시와 ‘관련’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들 중에 이루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하지만 그래서 ‘시’와 얼마나 가까워졌는가? 내가 시에게 사랑받은 만큼 나는 시를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부끄럽다. 위의 것들은 당장 해결해야 했던 과제 같은 것들이었다 내 꿈은 ‘시’였지, ‘등단’이나 ‘출간’이 아니었거든. 내가 원하는 시를 쓰려면 착상이 된 후에도 최소 일주일 정도는 끊기지 않고 다른 일 없이 초고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작년엔 프리랜서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도 했다. 인터뷰, 교정교열, 매거진 에디터, 번역, 영어 과외, 자소서 컨설팅, 창작 강사, 행사 진행, 연구보조원 등등. 시를 쓰려고 이렇게 사는데, 이렇게 사느라 시를 못 쓰게 되는 순간들이 어렵고, 무섭다.
그로부터 받은 선물 시는 한 권의 시집 이상의 것이고, 내가 쓴 한 편의 시는 내 삶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은 언제든 친구들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시집은 다시 사면 되니까. 이 시집 표지가 꼬질꼬질한데, 나는 시집을 냄비 받침대로도 쓰거든. 이 물건 자체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그 안의 시를 만났던 경험이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겠지. 시와의 만남으로 내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까. 내 첫 시집의 1대 주주라고 할 수 있을까. 반면, 함께 고른 최승자의 첫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초판본은 친한 동료인 유이우 시인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다. 최근 재발간되긴 했지만, 그전에는 정말 구하기도 어려운 책이었다. 내가 최승자의 시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기억해주고 또 이 책을 구하려 애썼을 모습을 생각하면, 이 책은 정말 소중하다. 내가 유이우가 되지 않고는 이 책을 내게 선물할 수 없지 않은가.

 

스크랩북ㅣ임현주 MBC 아나운서
꿈과 만났을 때 꼭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결심한 날부터 스크랩북을 만들었다. 논술과 작문 시험에 대비하려고 신문 구독을 하며 스크랩을 시작했다. 용어나 알아두어야 할 기사, 시각을 넓혀주는 칼럼 등을 매일 수집했다. 한 주제에 대해 신문마다 다른 시각으로 보도하고 논평하는 것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고, 좌우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위한 비판적인 시각도 기를 수 있었다.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한동안 스크랩을 이어나갔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아나운서가 갖는 사회적 의미나 영향력 등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결국 나의 타고난 기질 중에 가장 몰입할 수 있고, 즐거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부터 말을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고, 실전에 강했다. 이게 조금은 특별한 능력일 수 있다는 걸 대학 졸업 즈음에 깨달았다. 그동안은 강렬하게 되고 싶은 무언가가 없었는데, 아나운서를 생각한 순간부턴 맨땅에 헤딩이라도 배워나가는 과정이 즐겁고 시험에서 떨어져도 더 잘하고 싶은 동기 부여가 절로 됐다.
만남 그 후 시험에서 면접관이 어떤 이슈에 대해 묻더라도 나의 생각을 잘 전할 수 있겠단 자신감이 생겼다. 그건 꾸준한 수집과 발견에서 온 자신감이었다. 실제로도 필기시험이나 면접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고. 요즘은 ‘기록’의 시대지 않나. 여러 가지 어플이나 온라인으로 기록이 가능해졌으니, 스크랩북을 만드는 건 그에 비해 시간도 수고로움도 더 많이 들지만, 글쎄. 내가 옛날 사람이라 그럴까. 눈으로 스쳐 읽으면 쉽게 증발되는 것들을 밑줄 그으며 꼭꼭 되새겼을 때 비로소 진짜 내 것으로 흡수하게 되는 기분이 있거든.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이제는 열 손가락으로 아나운서 연차를 셀 수가 없다. 처음 아나운서를 꿈꿀 때만 해도 아나운서의 정의를 막연히 ‘언론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현장에서 부딪히고 경험하면서 생각은 점점 바뀌었다. 물론 언론인으로서의 공정함, 정확성, 신뢰성 등은 아나운서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기본값. 이제는 거기에 기획력과 용기, 자연스러움을 더하고 싶다. 판을 새롭게 비틀어볼 줄 알아야 하고, 도전하는 용기를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나의 꿈은 더 이상 고정값이 아니라 계속되는 성장형이다.
그로부터 받은 선물 신문 스크랩은 무엇보다 작문에 많은 도움을 줬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지만 이과에, 공대 산업공학을 전공하면서 글을 쓸 기회는 많지 않았다. 처음 작문을 할 땐 내 표현력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 막막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과 글로 적어내는 건 많이 달랐으니까. 그런데 신문 칼럼을 보면, 한정된 지면 안에서 주제에 관한 생각을 전하고, 때론 설득도 시키지 않나. 독자의 시선을 끄는 적절한 비유를 써서. 그때마다 잘 쓴 칼럼을 많이 읽으면서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는 걸 배웠다. 처음엔 모방에서 시작해 발전하듯, 좋은 글을 읽는 건 좋은 글을 쓰는 데 분명 커다란 도움이 됐다.

 

김기찬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ㅣ승효상 건축가
꿈과 만났을 때 1990년은 오랫동안 몸담았던 ‘공간’을 나와 내 이름으로 건축을 시작할 때였다. 김수근 건축만을 하던 내가 내 건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를 때 만난 이 책은, 내가 잊고 있었던 오랜 기억을 되찾게 하여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명쾌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빈자의 미학’이라는 내 평생의 건축 화두를 끄집어내게 했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이 책이 계기가 된 ‘빈자의 미학’이란 선언은 내 건축의 원칙이며 진리가 되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혹은 내가 가는 길이 그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늘 떠올릴 수밖에 없는 원점이다.
만남 그 후 가난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건축을 지향하게 되면 모여 사는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나아가 건축의 공공성에 대해 보다 깊은 사유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그런 건축의 공공성 실현을 위한 사회적 부름에 나설 수밖에 없어 사회적 활동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어차피 건축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의 삶을 조직하는 일을 직능으로 삼는다. 이러한 일은 그래서 성직이라고까지 여긴다. 혹시 잘못 판단해서 남의 삶을 그르치지 않을까 늘 불안하다. 그럴 때, 이 책은 다시 나를 확신으로 일깨운다.
그로부터 받은 선물 이 책과 만나지 않았다면 글쎄, 나는 그냥 지나가는 하나의 전문가로 늙어 있지 않을까? … 그게 더 나았을까?

국어 선생님ㅣ조은혜 출판사 모로 대표·편집자
꿈과 만났을 때 지금의 나로 발현시킨 대상이 있다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봤더니, 책을 편집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책을 좋아하긴 했다. 역시 그럼 왜 책을 좋아했을까 생각해봤더니, 그 끝에는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이셨던 국어 선생님은, 아주 짧지는 않은 곱슬머리에 주로 화사한 색 수트를 입고 경상도 억양이 살짝 묻어나는 말투로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어린 시절의 나를 묘사하자면 공부에 관심도 없고 말도 잘 듣지 않는 애였다. 그런데 어느 날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고, 칭찬 비슷한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공부 못하고 말 안 듣는 애’는 학교에서 칭찬받을 일이 별로 없지 않나. 처음 들어본 칭찬이어서 그랬는지, 공부 못하는 내게 발표를 시켜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한테 또 칭찬을 받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선생님이 독서 동아리 비슷한 활동을 담당하고 계셨기에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 보니(정말 닥치는 대로 게걸스럽게 읽었다. 기준도 취향도 없이 아무거나. 그래서 거의 매달 최다 대출자로 꼽혔다) 칭찬을 넘어 그냥 그 세계에 빠져버렸던 것 같다.
만남 그 후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이었던 것 같다. 공부 못하고 말 안 듣는 아이를 혼내거나 무시하는 대신 관심을 가지며 칭찬해줬고, 다른 길을 갈 수 있게끔 기다려주기도 했다. 사회에 나와 보니 평균보다 부족해 보이는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 좀 서툰 사람이 잘할 수 있게끔 기다려준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선생님 덕분에 책을 읽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이자 받은 영향이다. 어릴 때 내게 책은 엄청나게 크고 넓은 도피처였다. 이 책 저 책을 오가며 다양한 사람들과 상황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됐고, 모두가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게 지금 조금이라도 착한 구석이 있다면 모두 책 덕분일 거다.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공부도 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대학도 갔고 결국 이 일까지 하고 있다. 그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이게 꿈이 맞는진 모르겠지만 그냥 평생 책 읽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갈수록 눈은 더 나빠지고, 편집할 때는 책을 덜 읽게 된다. 그래서 매번 ‘이렇게나 좋은 책이 많은데, 정말 죽기 전에 다 읽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 책 앞에서 발을 동동거린다. 이게 꿈에 가까워진 걸까?

 

라이카 카메라ㅣ신웅재 다큐멘터리 사진가
꿈과 만났을 때 2010년 무작정 사진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저 사진을 찍고 싶었을 뿐, 사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반년 정도는 아버지께서 쓰시던 카메라로 노출이나 초점이 맞든 안 맞든 사진을 찍고 다녔을 정도. 시간이 지나 사진에 대한 열정과 포토 저널 리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믿고, 충무로에서 중고 라이카 M6를 구입했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2001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매그넘 포토스 Magnum Photos의 한국 전시 <Our Turning World>가 열렸다. 전시는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을 뒤집어놓는 계기가 됐다. 내가 얼마나 세상에 대해 무지했는지, 지구 반대편에서는 어떤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에 빠져 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그 이후로 나의 꿈은 제리 맥과이어 같은 스포츠 에이전트가 아닌, 유진 스미스, 요세프 쿠델카 같은 포토 저널리스트로 바뀌게 됐다.
만남 그 후 포토 저널리즘을 만난 지 10년 후, 라이카는 여전히 나를 사진가로 성장시켜주고 있다. 카메라는 순간을 포착하는 사냥 도구가 아닌, 사유하고 기록하는 만년필이라는 생각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보면 M6는 흑백 필름 사진의 기초를, M9 모노크롬은 사진에 대한 태도와 작업 방식의 근본을 다져줬다. M11은 지난 10년간의 작업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카메라를 쥘 때마다 라이카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포토 저널리스트(다큐멘터리 사진가)라는 꿈은 이루게 됐다. 이제는 사진의 힘을 믿고 동시에 경계하며,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진가로서 행동하려 한다. 어떤 사진을, 왜 찍고자 하는가는 여전히 고민이다.
그로부터 받은 선물 라이카는 눈과 머리, 가슴을 잇는 도구다. 이제 나와 라이카는 내 신체와 정신의 일부이자, 때로는 확장되어 드러나는 사고다.

 

예술 서적ㅣ권아람 미술가
꿈과 만났을 때 주변의 사물들을 관찰하고 조립하던 일상의 관심들이 지금의 일로 이어진 것 같다. 현재 하는 일은 개인적인 생각들을 작품이라는 시각적인 대상으로 도출하는 것인데, 주로 당시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키워드를 리서칭하고 작품에 단서가 되는 대상들을 발견해나가는 편이다. 수집한 도서들은 모두 설레는 마음과 함께 구매한 것으로 그중 꼽은 이 책들,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JUDD>, <Haroon Mirza/hrm 199 Ltd.>, <David Claerbout: The Time That Remains>는 영국 유학 시절 해외 갤러리에서 마주한 전시 도록과 리서치를 통해 발견한 이론서들이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유년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만들고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와 표현하고 싶은 대상들을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풀어낼 수 있는 일이 지금의 직업이다. 규격화된 방법을 벗어난 창작 언어를 구축하고 싶었다. 시각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질서를 벗어난 새로운 생각(해석)에 잘 매료된다. 조각의 형태를 갖지만 입체화된 회화로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거나, 사운드를 공간화하는 작가 등 새로운 언어를 구축한 대상들에 매료된다. 수집하는 도서들은 조각, 사운드, 영상, 미학 등 주제와 형식 면에서 주된 영감을 주며 나와 공통의 언어를 느끼게 한다.
만남 그 후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관습화된 생각을 버리고 다차원적으로 보려는 노력들이 선행된다. 생각은 정교화되고 형식은 간결해진다. 긴 이야기는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고 작품은 직관적으로 풀내려는 편인데, 그런 연유에서인지 글을 본 후 작품을 더 잘 공감해주시는 것 같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그때의 꿈에 가까워지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중인 것 같다. 이 일은 완결점이 없는 것 같다. 꽤 오랜 기간 작업을 해왔는데,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정체성을 바꾸기도, 갖춰 가기도 하는 것 같다. 다음 작업과 2024년 송은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통해 다음의 꿈에 더 가까워져보려 한다.

 

헌 책들ㅣ박준 시인
꿈과 만났을 때 시를 쓰는 사람이 되기 전에 시를 읽는 사람이었다. ‘시집’들을 읽으면서 나도 시를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다. 서점에서 새 시집을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헌책방에서 시집을 구했다. 예나 지금이나 시집은 헌책방에서 가장 저렴한 편에 속한다. 한 번에 몇 권을 사더라도 부담이 없었다. 지갑은 가벼워도 가방은 무거웠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어떤 사유나 잡히지 않는 마음을 온갖 애를 써가며 언어로 잡아두고자 한 기록이 시집에는 있다. 아울러 헌책방에서 구한 시집에는 종종 먼저 읽었던 사람의 흔적까지 함께 기록되었다. 다른 혼자들을 만나는 일 같았다.
만남 그 후 아름다운 시를 읽으면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쓰고 싶다는 자극을 받았다. 아울러 마음에 닿지 않는 시를 읽으면 나는 이렇게 쓰지 말아야지 하는 자극을 받았다. 영향이란 어쩌면 순방향과 역방향 모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삶과 시의 거리가 가까울 때도 있었고 한없이 멀어졌던 때도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그렇겠지. 다만 이미 시와 나는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더 멀어지는 순간이 찾아와도 그리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의 성경책ㅣ권준호 ‘일상의실천’ 그래픽 디자이너
꿈과 만났을 때 할머니의 침대맡에는 항상 낡은 스프링 노트가 있었다. 동이 트기 전 새벽 시간, 저녁 식사 후 어스름한 시간에 할머니는 낮은 접이식 식탁 위에 웅크린 자세로 노트를 안고 연필을 꾹꾹 눌어가며 글자를 썼다. 스무 살의 설익은 혈기로 가득했던 그 시절의 나에게 그 허름한 노트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기억 속에서 글을 쓰던 할머니의 모습이 흐릿해질 때쯤, 할머니는 나를 불러 장롱에서 스무 권이 넘는 노트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때 인기 있던 만화 캐릭터가 빛바랜 채 웃고 있는 표지의 노트 안에는 할머니가 십여 년간 써 내려간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글자가 너무 삐뚤삐뚤하고 못나 보인다며 할머니는 수줍게 웃었다. 여성에게 글을 가르쳐주지 않던 시대에 태어난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글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국어를 말하면 일본인 선생에게 모진 매를 맞았고, 해방 후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오면서 어른이 될 때까지 글을 배우지 못했다. 할머니는 마흔이 될 때까지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여성의 의무라고 교육받은 살림과 육아를 하며 살았지만, 어느 날 배가 너무 아파 실신한 후 병원에서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생존이 힘들 것이라 통보받고 죽음을 기다리던 할머니를, 어느 시골 교회의 전도사가 매일같이 찾아왔다. 종교가 없던 할머니는 그 전도사에게 모진 말을 내뱉으며 쫓아냈지만, 사경을 헤매던 할머니의 손을 잡고 울며 매달린 그의 기도 때문일까, 할머니는 수술 후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그래도 날 위해 울어준 그 전도사에게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속는 셈 치고 찾아간 교회가 어느 순간 할머니에게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할머니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글자 하나하나를 필사하며 한글을 배웠다. 할머니는 수십 년간 들었던 성경의 이야기를 그림을 그리듯 따라 적으며, 글자의 구조와 획의 순서를 익혀나갔다. 할머니가 건네준 노트에 적힌 글자에는 배우려는 사람의 간절함과 실수를 두려워하는 떨림이, 시간이 지나며 능숙해지는 획의 자신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당신이 작성한 원고의 제책을 의뢰했고, 그 의뢰는 나에게 ‘사물로서의 책’이 아닌 ‘서사가 담긴 물성’으로서의 책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한 디자이너로서의 첫 경험이었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그러나 나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시간을 헤쳐온 할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그 글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원고가 담고 있는 가치 그대로를 훼손하지 않고 온전히 지켜내는 노력이었고, 그 위에 어떤 장식이나 꾸밈을 더할 수는 없었다. 할머니의 노트들은 가장 성경책다운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3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3권의 성경책을 종종 꺼내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경험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디자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해야 한다고 믿던 그때의 나에게 작업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어떤 콘텐츠는 디자인이 개입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발언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더 적확한 소통을 위한 디자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만남 그 후 어떤 사물과 이야기를 보기 좋게 꾸미고 단장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나쳐서 그 안에 존재하는 진짜 이야기의 실체가 희미해질 때, 그 포장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것은 아마 실패한 디자인일 것이다. 반면 내용이 갖는 무게감에 압도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내용을 덩그러니 방치하는 것 역시 성공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좋은 디자인이란 콘텐츠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과하게 왜곡하지 않고, 지나치게 방관하지도 않으면서, 적합한 표현 방식으로 그것을 온전히 전달하는 행위일 것이고, 그것은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나에게 오랜 시간 동안 풀어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다만 나에게는 디자인이 때론 한 발짝 물러서야 할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할머니의 성경책이, 그 과제의 난해함을 조금은 덜어줄 참고서가 되어줄 것이다.

파도ㅣ임수현 국가대표 서퍼
꿈과 만났을 때 첫 파도는 내가 열한 살이었던 해, 2009년 부산 송정해변에서 만났다. 파도 위에 오른 순간, 모든 시간이 슬로 모션처럼 길고 느리게 흘렀다. 내게 있어 가장 선명한 파도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파도를 타는 순간 모든 감각은 선명해진다. 마치 다른 차원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 감각이 너무도 생생해서 내가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데, 비로소 그때 파도와 하나가 된다.
만남 그 후 어쩌면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파도(자연)로부터 왔다. 꿈은 물론 가족과 친구들, 파도 위에서 만난 모든 인연이 그렇다. 서핑은 삶과 비슷한데, 좋은 파도를 타려면 먼저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준비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나는 서퍼가 된 후 눈앞의 소중한 순간들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 현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소통하며, 사랑하기 위해.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서핑 국가대표가 됐다. 서퍼로서 많은 꿈 중 하나를 이룬 셈이다. 서퍼로서 도전하며 맞이하는 시간들을 기꺼이 즐기고, 그 과정들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 가장 마지막 꿈이라면 파도처럼 움직이는 것, 바다처럼 사는 것.
그로부터 받은 선물 파도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더는 선한 태도와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꼭 바다처럼,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파도는 내게 꿈을 꾸게 해 주었고, 행복을 알게 해주었으며, 이제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늘 곁에서 안내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빈티지 달항아리ㅣ권대섭 도예가
꿈과 만났을 때 학생 시절, 저녁 무렵 인사동 어느 가게에 전시된 한 달항아리를 보았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목이 메이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가슴이 답답해져서 그 달항아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그 순간은 일종의 충격이었는데, 충격의 출처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때가 계기가 되어 평면에서 입체로, 물감에서 훍으로 재료를 바꾸었다. 그리고 당시 앞선 도예 기술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만남 그 후 그때부터 독학으로 지금까지 45년간 항아리만 만들고 있다. 한때는 처음 나의 마음을 움직인 그 빈티지 달항아리와 똑같이 재현해보고 싶은 욕심을 가진 적도 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45년간 같은 항아리를 만드는 반복 작업이 가능했던 건 첫째는 지금도 재미있고 항상 새롭기 때문이고, 창작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연속성이 있음을 유물에서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작업하는 작가는 어깨에 힘주고 폼 잡아봤자 결국은 조상 덕에 먹고산다, 그렇게 생각한다.

마르탱 파주 <완벽한 하루>ㅣ윤고은 소설가
꿈과 만났을 때 세상의 모든 안전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의심하던 시절에 이 책을 만났다. 나에 비하면 <완벽한 하루> 속 주인공은 확실히 도발적이었다. 그는 멀쩡한 안전장치에 흠집을 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일상을 동원해 자살 시도를 하고, 그럼에도 안전장치들 때문에 좌절한다. 처음에는 뭐 이런 폭탄 같은 인간이 있나 했는데, 읽을수록 그가 폭파하고 싶은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이 책에는 토스터나 칫솔에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사람이 나온다. 내가 산 두 번째 토스터라면 2, 여덟 번째 칫솔이라면 8, 이런 식으로. 우리가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믿는 대량 생산품들이 <완벽한 하루> 안에서는 조금 더 특별해진다. 소설 쓰기는 그런 행위와 비슷하다. 내 삶 곳곳에 고유번호를 붙여주는 것, 환하게 빛날 수 있도록.
만남 그 후 조금 더 활기찬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무렵 생계를 위한 일을 하느라 바빴고, 약간 닳아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그런 내 모습을 소설 속 주인공처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첫 장편 소설의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책의 힘을 더 믿게 된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삶에 남길 수 있는 자국 같은 것. 이제는 책이 누군가의 삶을 구원하거나 도발하거나 위로했다는 말을 들으면 한 권의 책과 한 사람이 만난 어느 시점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책과의 만남도 시기를 타거든.
그로부터 받은 선물 마르탱 파주의 책 때문에 한동안 ‘마’로 시작하는 이름들을 더 찾아 읽기도 했다. 단지 ‘마’로 시작한다는 이유로, 마르셀 에메, 마르셀 프루스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마리 다르외세크, 마루야마 겐지 등을 더 열심히 읽었다. 그러니까 이 책이 없었다면 나의 ‘마 컬렉션’도 없었을 거다.

 

드라이작 칼신창호 셰프
꿈과 만났을 때 요리를 시작한 1998년, 한국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브랜드의 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칼이 일명 쌍둥이 칼 ‘헨켈’, 삼지창으로 불리는 드라이작이었다. 둘 다 훌륭한 칼이지만 난 후자에 더 끌렸다. 뭔가 더 셰프의 칼이란 느낌이랄까? 월급의 반을 투자해 큰맘 먹고 마련한 하얀색 드라이작 스지히키는 요리 인생의 동반자이자, 자랑스러운 나의 첫 칼이다.
나는 무엇에 매료되었나 당시만 해도 업장 칼을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개인 칼을 가지고 가면 핀잔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만큼 개인 칼을 사용한다는 건 요리사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그래서 더욱 애지중지 다루면서 칼을 자주 갈았는데, 항상 잘 드는 칼을 사용하다 보니 더 좋은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한다. 물론 지금은 더 좋은 강재와 날카로운 칼에 내 옆자리는 빼앗겼지만, 지금도 칼 가방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 칼을 둔다.
만남 그 후 당시 내 꿈은 미쉐린 별을 받는 것이었다. 방법을 몰랐으니 막연하게 프랑스에 가서 요리를 해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천천히 꿈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이 칼은 늘 내 곁에 있었다. 미쉐린 2스타를 받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된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이 칼이 나의 꿈을 이루어주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어려운 시절의 과감한 투자가 지금의 주옥과 나를 만들었다는 것. 지금 요리를 배우는 친구들에게도 나중의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투자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피처 에디터
    신기호, 전희란, 김은희
    포토그래퍼
    홍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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