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엄마가 물려주신 스파크 타고 다녀요. ‘초보 운전’ 붙이고요.” 박유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GQ 올 때 보니 유림 씨 몸만 한 배낭을 메고 있던데 뭘 그리 넣어 다녀요?
YR 저 도라에몽이에요. 뭔가 필요할 때 (물건이) 바로 나오는 게 좋아서 다 넣어 다녀요. 여행 갈 때도 ‘이거 필요할 것 같다’ 싶으면 일단 챙겨요.
GQ 오늘은 무엇을 넣어 왔어요?
YR 공책과 펜은 무조건 넣어 다니고, 보조 배터리, 마스크, 립밤, 헤드셋, 마시는 젤리···, 가방이 커서 두툼해 보인 걸까요? 오늘은 진짜 가볍게 들고 왔거든요.
GQ 가방에 달아둔 오스카 트로피 모양 배지도 눈에 띄던데요.
YR 샀어요. 헤헤. 오스카 가서 기념품 꽤 많이 샀어요. 오스카 캡, 스웨트 셔츠, 이런 거. 시상식 끝나고 아카데미 뮤지엄 가서 구경하고 사왔어요.
GQ 아카데미 시상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다행히 기절하지는 않았더라고요? 시상식에 참석하게 되면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엄청 설레어 했잖아요.
YR 으하하하하. 사실 지금도 내가 거길 갔다 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얼떨떨해요. 그런데 ‘나 거기서 기절하면 아무것도 못 보니까 단단히 마음 먹고 가야지. 맘껏 즐겨야지. 후회 안 되게 놀다 와야지’ 이렇게 다짐하고 갔거든요? 살면서 맛보지 못한 재미를 봐버렸어요.
GQ 무슨 재미를 봐버렸어요.
YR 저는 제가 되게 주눅 들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너무 재밌어서 막 인사하고 (함박웃음으로 양손 흔드는 흉내 내며) 레드 카펫이 끝나갈 때는 ‘뭐야, 벌써 끝났어?’ 계속 뒤돌아봤어요. 다시 돌아가는 걸 (행사 진행상) 좋아하지 않는대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재밌었어’ 하고 극장에 들어갔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잖아요. 저도 새로운 영화 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진짜 너무 재밌었어요.
GQ 이런 걸 무대 체질이라고 해야 하나요?
YR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엄청 떨었어요. 그런 자리도 처음이고, 그런 드레스도 처음이었으니까. 그때는 동료 배우들끼리 서로 우스갯소리로 “레드 카펫 걷다가 넘어지면 다 같이 넘어져줘요” 하면서 모두 팔짱 끼고 들어갔거든요. ‘오스카에서도 그런 무대가 펼쳐질 거야’ 상상한 덕분에 그나마 덜 긴장했어요.
GQ 말 그대로 처음인 경험이 이어지고 있어요. 칸, 골든 글로브에 이어 이번 오스카 무대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국제영화상 수상 소감으로 배우 이름 호명할 때, “박유림”이란 이름이 들리니 제가 다 오묘하더라고요.
YR 저도 ‘내 이름 맞아? 내 이름!’ 환호성 질렀어요. 감독님은 정말 다정하신 분이에요. 칸 영화제인가 어디에서도 저희 배우 이름 다 불러주셨거든요? 그런데도 또 놀랍고, 또 감동적이었어요. 감독님은 현장에서도 늘 그러셨어요. 항상 배우를 좋아해주시고 배려해주시고 독려해주시고.
GQ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두고 ‘이 사람이라면 내 알맹이를 봐줄지도 몰라’ 생각했다고 했죠. 그 마음은 어디에서 튀어나왔어요?
YR 오디션 때 첫 질문으로 정확히 이렇게 물어보셨어요. “이 오디션 전에 어떤 시간을 보내다 왔어요?” 지금까지 오디션 보면서 “뭐 하다 왔어요?”라는 질문은 처음 받아봤거든요. “특기가 뭐예요?”도 아니고 “지금까지 어떤 연기했어요?”도 아니고. 당황스러웠어요. ‘어···? 나 아까까지 뭐 했지? 왜 내가 뭐 했는지 궁금하시지?’ 그런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뭔가 ‘이 감독님은 나와 잘 맞을 것 같아’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내 진짜 모습이 궁금하신가 보다. ‘에잇, 안 어울리는 것 다 벗자’ 하고 그냥 저대로 얘기했어요.
GQ 그래서, 오디션 전에 어떤 시간을 보내다 갔나요? 뭐라고 답했어요?
YR 오디션이 제 생일 다음 날인가 다다음 날이었는데 부모님이 바쁘셔서 생일 지나고 미역국을 끓여주셨거든요. 그 미역국을 먹고 갔는데 물어보셔서 “저 오늘 이렇게 저렇게 미역국 먹고 왔고요, 연습도 했고요, 비비 크림도 발랐고요” 그랬더니 불행하지 않았냐고 하시더라고요. 생일인데 부모님이 바쁘시고, 미역국도 생일 지나서 먹고, 불행하지 않냐고. “아뇨? 저는 생일 별로 신경 안 쓰는데요?”라고 말씀드렸죠. 생일 뭐···.
GQ 그것도 그런데 시험날 미역국은 보통···.
YR 으하하하하. 제 미역국에는 항상 소고기가 가득하거든요. 먹어야 해요.
GQ 그런데 본래 오디션이란 자신을 보여줘야 하는 자리잖아요.
YR 생각해보면 저도 초반에는 그냥 제 모습대로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다가 자꾸 누구처럼 되고 싶어졌던 것 같아요. 나는 왜 안 되지? 저 사람처럼 돼야 나도 합격하는 건가? 그러니까, 제 눈에 저 사람들은 너무 잘 갖춰진 거예요. 저러니까 배우를 하지 싶은 거예요. 그에 비해 나는 평범하고, 내가 보이기는 할까 싶고. 그래서 평상시에는 입지 않는 옷을 입고 간 적도 있어요.
GQ 이번에는 그런 건 벗어두었군요.
YR 네. 살면서 이런 운명 같은 시기가 오는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바냐 아저씨> 대사 중에 제가 꽂힌 게 있어요. 아스트로프가 그래요. “만약 네가 어두운 숲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등불이 보이면 너는 무서운 것도, 가시덤불도, 어둠도 생각하지 못하게 될 거야.” <드라이브 마이 카>에 <바냐 아저씨> 연극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게 등불은 이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게 내 등불이 될 거야. 나 목숨을 바칠 거야. 엄마가 “목숨까지는 걸지 말고 그냥 재밌게 해” 그러셨지만.
GQ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본 알맹이는 무엇일지 몰라도, 제 눈에는 이렇게 보여요. 극중 유나는 삶에 비극이 찾아와도 그에 매몰되는 게 아니라 한 발짝 나아가려는 인물이잖아요. 유림 씨에게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감지한 게 아닐까.
YR 오···.
GQ 왜 그렇게 토끼 눈을 해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럼 스스로는 왜 합격했다고 생각했어요?
YR 처음 든 생각이에요. 저도 사실 저를 합격시킨 이유가 되게 궁금했는데 감독님께 물어보진 않았어요. 물어볼 기회는 분명히 있었어요. 캐스팅 이유에 대해 물어보는 배우분들도 실제로 계셨고. 그런데 저는 물어보지는 않았거든요. 이유는···, 내가 됐으니까.
GQ 하하하하. 된 건 나다.
YR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왜 됐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그냥 ‘하얘서’ 그랬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어서. 당시 저는 스스로 채워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뭔가 채우고 싶은 게 있는데 뭘 채워야 될지 모르는. 그걸 봐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GQ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드라이브 마이 카> 속 장면처럼 실제로도 끊임없이 대본 리딩 연습을 시키는 걸로 알아요. 감정을 빼고 무미건조하게, 말 그대로 그저 읽는. 그 연습 과정이나 현장에서의 경험은 어땠어요?
YR 그렇게 계속 연습하다 보면 믿음이 생겨요. 다른 배우에게도 믿음이 생기고, 현장에 대한 불안감도 사라지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도 생겼어요. 무엇보다 집중하게 돼요. 상대 배우도 아마 저한테 깊이 집중했을 거예요. 이 사람이 어떻게 표현할까? 그걸 잘 보고 들어야 자신이 느끼는 대로 받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늘 엄청 집중해서, 항상 배가 고팠어요.
GQ 그 연습 방식의 영향이 궁금했어요. 오히려 불안해질 수도 있는 방법 같아서요. 막상 현장에서는 어떤 연기로 할지 연습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YR 저는 반대로 완전히 믿음이 갔어요. 그렇게 많이 읽은 만큼 무언가 실수를 하더라도 그냥 자연스럽게 지나갈 것 같달까? 모두 다 같이 그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오히려 상대가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저는 재밌었어요. 오늘 상대는 어떻게 할까? 그럼 나는 어떻게 연기하지, 오늘? 이런 궁금함도 있었고.
GQ 시즌 1이 잘되면 시즌 2에 기대, 의심, 모든 관심이 높아지죠. 영화도, 사람도.
YR 저 다시 오디션이 재밌어졌어요. 너무 재밌어요. 처음에는 분명 부담도 있었어요. 다음의 날 보고 실망하시면 어떡하지? 그런데 제가 저를 기대해보기로 했어요. 다음에 어떤 작품을 만날까, 그걸 또 얼마나 재밌게 할 수 있을까. 이 한순간에만 머무를 수는 없잖아요. 앞으로 계속 ‘드라이브 마이 카’ 해야죠.
GQ 지난 연말에만 해도 곧 제주 1년살이를 꿈꾼다고 했는데 그 계획은 여전해요?
YR 좋은 일로 수정됐습니다.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적어뒀다가 내렸어요, 으하하하. ‘이건 언제든 할 수 있는 거야’ 하고. 제주에서 살아보는 게 꿈이기도, 도피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갈 수 없어요. 지금 이대로도 너무 재밌거든요.
GQ 운전면허 취득도 그럼 아직이겠네요? 제주살이 준비 중 하나였잖아요.
YR 땄어요.
GQ 고새?
YR 이거 해야겠다 하면 하는 성격이라서 운전면허는 그때 바로 땄어요. 운전하세요? 신세계예요. 요즘 엄마가 물려주신 스파크 타고 다니거든요. “초보 운전. 배려 감사합니다” 붙이고. 조만간 양평 할머니 댁에 다녀올 거예요.
GQ 다음 목적지는 또 어디로 잡을 거예요?
YR 아카데미요. 저는 또 가야 되겠습니다. 사실 저는 목표를 두고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때그때 나에게 최선의 것을 고민하고 선택해서 재밌게 하고 싶은데, 목표가 아카데미로 세워졌어요. 그날 우마 서먼도 또 만나면 좋겠어요. 이번에 우마 서먼이 시상하러 나왔을 때 저 기절할 뻔했거든요. 제가 <킬빌>을 진짜 좋아해요. 철권 게임의 카즈미라는 캐릭터 아세요? 제가 카즈미로 철권하는 것도 엄청 좋아하거든요. <킬 빌>에서의 우마 서먼처럼 싸워요. 필살기로 호랑이를 내보내는 친구예요.
- 피처 에디터
- 김은희
- 포토그래퍼
- 강혜원
- 스타일리스트
- 김경선
- 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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