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생이 꺼내놓은 말들을 한 곳에 모아 담고 본다. 전부 반듯하고 단단하다.
GQ 오늘 목표는 이무생 안에 들어 있는 ‘김진석’ 빼내기였어요. <서른, 아홉>이 종영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뭘 해도 ‘김진석’ 같을까 봐서.
MS 그래서 재밌었어요. 새로운 거, 도전하는 거 좋아해요.
GQ <서른, 아홉> 인기가 대단했어요. ‘김진석’을 두고 의견도 분분했고요.
MS 캐릭터를 공유하고, 묻고, 이야기했다면 아휴, 그걸로 됐어요. 영광입니다.
GQ <서른, 아홉>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MS 예뻤어요. 세 친구,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같이 예뻤어요. 캐릭터들이 가진 색이 전부 달랐는데, 마치 무지개 같다는 첫인상을 받았어요. 이 캐릭터들이 모였을 때 검은색이 되지 않겠구나, 각자 서로 빛나겠구나 싶었어요. 나도 거기에서 ‘진석’의 색도 찾아가 보자, 그렇게 시작했죠.
GQ 그래서 찾아간 ‘김진석’은 어떤 색이던가요?
MS 사실 ‘진석’은 분명하지 않았어요. 처음엔 당황했죠. ‘어느 정도 규정돼야 만들어갈 수 있는데 뭐지?’ 그런데 그 불분명함이 김진석의 색이었어요. 그래서 규정하기보다 작품과 같이 만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죠.
GQ ‘불분명함’을 이해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안 보이는 걸 봐야 하니까.
MS 저는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작품도 그랬고요. 그래서 거듭 읽고, 묻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오직 ‘진석’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연습을 했어요. 어떤 사념도 없이.
GQ 결국 어떻게 보이던가요?
MS 단어로 말하면 ‘버텨냄’이었어요. 복잡다단한 ‘진석’의 상황이 있잖아요. ‘진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들을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버텨내는 ‘진석’을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 연기를 뿌리내려야 하는지가 커다란 고민이었는데, 캐릭터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씩 답을 찾아갔던 것 같아요.
GQ 해석이 됐으니 다음은 표현인데, ‘버티는 진석’을 어떻게 보여줘야 했을까요?
MS 버텨낸다는 건 어쩌면 아무것도 안 하는 거, 못하는 거잖아요. 그거였어요. 감정도, 표현도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진석이의 감정을 걷어내고, 다시 찬영이가 전해주는 감정을 담아내고. 반복이었어요.
GQ 기대대로 조화로운 작품이 됐죠? 스토리도, 캐릭터 ‘진석’도요.
MS 그럼요. 그런데 결국 제가 한 건 없어요. 현장에서 스태프분들이 분위기 조성을 잘해주셨고, 그 안에서 작가님이 써주신 대사, 감독님의 주문, 전미도 배우의 에너지를 잘 받았을 뿐이에요. 정말로.
GQ 지금 대답이 조금 시상식 같았어요.
MS 하하하! 정말이에요. 다시 한번 인사 전하고 싶어요. 고맙다 찬영아!
GQ <서른, 아홉>을 시작하기 전과 후, 뭐가 달라졌을까요.
MS 먼저 건강검진을 받았죠.
GQ 하하! 아니, 정말 받았아요?
MS 그럼요. 찬영이가 마지막 회에서 이야기했으니까. 또 때가 되기도 했지만요.
GQ 거기에는 작품이 준 영향도 있었을 것 같아요.
MS 맞아요. 작품을 촬영하면서 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소중한 사람들과 순간순간 행복하고,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요.
GQ 그런데 그게 쉽지 않잖아요. 머리로는 아는데 실천이 참···.
MS 그래서 저도 작품 하면서 최대한 많이 실천했어요. 주위 사람들한테 더 표현하고, 가족들, 소중한 사람들과 더 자주 연락하고, 시간 갖고요.
GQ 그런데 이건 기준치가 다른 것 같아요. 무생 씨는 이미 잘하고 있었는데 더 잘하는 거고, 저는···.
MS 에이, 저도 똑같아요. 늘 부족하죠. 미안하고.
GQ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스스로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뭐예요?
MS 좋은 작품에, 좋은 캐릭터로 살아서 그렇게 봐주시는 거지, 인간 이무생은 정말 모자란 부분이 많은 사람이에요. 어느 하나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GQ 그래도 하나만 말해보면요.
MS 소지품을 소모품처럼 여긴다? 제가 뭐든 잘 잃어버려요. 지갑, 스마트폰, 카드 등등. 우산은 뭐, 제 시그니처고요. 빈틈 정도가 아니에요. 구멍! 하하하.
GQ 올해로 16년 차 배우예요. 꾸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뭐라고 생각해요?
MS 저는 이 직업, 그러니까 연기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좋았고, 좋고, 더 좋았으면 좋겠고요. 지금 감정들이 사라지거나 연기가 재미없어지면 바로 그만둘 것 같아요. 원동력은 아마 그때 비로소 알게 되지 않을까요. 지금은 ‘연기가 좋고, 재밌으니까’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분명 더 많은 이유가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벗어나서 보면 그제야 하나둘 보일 것 같아요.
GQ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16년이라는 시간은 결국 뭘 다듬었던 것 같아요?
MS 제 자신요. 연기는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좋은 연기를 하려면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100을 알고 싶지만 에이, 그건 욕심이죠.
GQ 연기처럼 꾸준히 하는 거 또 있어요?
MS 운동? 저 운동 좋아해요. 초등학교 육상부, 중고등학생 때는 농구, 축구, 지금은 테니스도 하고요. 요즘에는 30분 동안 쉬지 않고 달리기를 새로 하고 있어요. 몸 쓰는 거 좋아해요. 방금 “의외다” 하려고 했죠?
GQ 아니요···오? 저는 <고요의 바다> 보면서 무생 씨가 액션 연기하면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어요. 더 깊이 들어가면 누아르 쪽요.
MS 아휴, 고맙습니다. 누아르 너무 좋죠. 액션도 너무 좋아하고요. 기회가 되면 한번 시원하게, 또 뜨겁고 처절하게 풀어내보고 싶어요.
GQ 언젠가는 볼 수 있겠죠? 음, 무생 씨는 때가 있다는 말에 동의해요?
MS 동의합니다. 일도, 사람도 그런 것 같아요. 말대로 시간의 차이만 있다고 봐요.
GQ 그럼 그 ‘때’라는 걸 배우 이무생의 시간으로 가져가 보면 어때요?
MS 저는 빠르진 않죠. 그렇다고 늦지도 않은 것 같아요. 적절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웃긴 건 그 ‘때’라는 걸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래서 안타까운 것 같아요. 아쉽고. 지금 같은 경우에 <서른, 아홉>이라는 작품이 생각나는 거죠. 더. 지금이 즐거운 때인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GQ ‘때’를 기다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았잖아요. 그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거죠.
MS 저는 있었어요. 보통은 그 ‘때’를 위해 버티라고들 하잖아요. 온다고, 언젠간 온다고. 그런데 저는 ‘버텼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아요. 즐거웠거든요. 재미없었다면 애초에 그만뒀겠죠. 그래서 잘 이어왔고, 이렇게 감사한 하루를 만나고 있는 것 같아요.
GQ 그 과정 속에는 지난한 시간들도 있었겠죠? 그때마다 어떻게 이겨냈어요?
MS “인간에게는 망각이 있음을 잊지 말자”라는 말이 힘이 됐어요. 역설적이죠? 망각을 잊지 말라니. 그 순간이 너무 막막하고 고통스러우니까 보통은 싹 사라지길 바라는데, 그게 쉽나요. 어쩌면 그건 욕심이잖아요. 저도 그랬죠. 그때마다 ‘조금 떨어져 바라보자’ 했어요. 잠시 멈춤. 저는 그 힘을 믿어요. 그래서 지난한 시간들을 지나올 수 있었던 것 같고요. 더 이상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GQ 이런 단단하고 현명한 사람에게도 고민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막 들었는데, 그런데 있겠죠?
MS 그럼요. 제가 뭐라고요. 늘 고민이죠.
GQ 대체로 어떤?
MS 음,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로 시작해서 ‘내 연기가 맛있을까?’ 이런 뜬금없는 생각으로 연결되는 고민들. 결국 기승전 ’연기’인 거죠.
GQ 어떻게 하면 내 연기가 맛있을까. 계속 맛있을까.
MS 그렇죠. 꼬리에 꼬리를 물죠. 재밌어서 하는 연기인데, 계속 새롭고, 즐거우려면 또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GQ 답은 찾았어요? 얼른 정리해야 다음 고민도 받죠.
MS 늘 겸손해야겠다, 싶죠. 작품 하나하나의 즐거움에, 새로움에 안주하는 순간 안 될 것 같아요. 이 부분을 상당히 경계해야 하고요. 그래서 적절한 긴장감은 늘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그게 일이든 사람이든, 좋은 관계에서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어느 정도의 긴장감.
GQ 저는 무생 씨가 진지하고 딱딱한 사람일 거라고 무례한 착각을 했어요.
MS 그런데 아니죠?
GQ 네, 전혀요. 남자랑 둘이 수다처럼 이야기를 한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MS 잘 보셨어요. 저 평소에 농담도 좋아하고요, 나사도 하나 빠져 있고요, 호불호도 많지 않아요. 이래저래 얼마나 헐거운 사람인데요.
GQ 그런데 인터뷰는 대체로 묵직했어요.
MS 가치 있는 일에는 진심인 편이에요. 저를 봐주시는 상황 대부분이 ‘연기’일 테니까, 아마도 그렇게 오해하시는 게 아닐까요. 제게 연기만큼 가치 있는 일은 또 드무니까요. 사실 그 외에는 별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해요.
GQ 마흔아홉 이무생은 어떨 것 같아요?
MS 서른아홉이 요 바로 전이었어요. 마흔이 되면 불혹의 나이라고 해서 흔들림도 없고 그럴 줄 알았는데 똑같더라고요. 흔들렸어요. 지금도 흔들리고 있고요. 마흔아홉이 돼도 똑같지 않을까요?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진 말자.’ 이 역시 흔들려봤으니까 드는 생각이겠죠? 흔들렸던 서른아홉 이무생에게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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