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GQ 천우희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에게 몽타주를 그리게 한다고 상상해볼게요.
WH 오. 생각해본 적 없는데.
GQ 어떻게 설명할 것 같아요?
WH 일단, 큰 눈.
GQ 실제로 보니 상상한 것보다 동공이 훨씬 커요.
WH 제 이목구비가 아주 큰 건 아닌데 그렇다고 각각 존재감이 없지는 않아요. 코는 작지만 오똑하게 보이기도 하고, 입술은 작지도 크지도 않고.
GQ 최근 인터뷰에서 본인이 가진 재능을 ‘얼굴’로 꼽았더라고요.
WH 다변적으로, 가변적으로 변할 수 있는 얼굴인 것 같아서요. 오늘 촬영 결과물만 봐도 그렇고, 함께하는 스태프에 따라서도 저는 얼마든 달라질 수 있어요.
GQ 과연 ‘천’의 얼굴이네요.
WH 성(姓)을 잘 가졌다 싶어요. 헤헤.
GQ 영화 <앵커> 촬영 들어가면서 머리를 짧게 자르는 장면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죠. 그때 헤어 아티스트에게 “오른쪽 얼굴을 더 쓰고 싶다”고 말했어요. 작품마다 이번에는 어떤 얼굴을 써야지, 하고 전략을 세우는 편이에요?
WH 제 왼쪽, 오른쪽 얼굴이 굉장히 다르거든요. 쌍꺼풀이 달라서 눈도 짝짝이고요. 성숙하거나 카리스마, 각을 드러내고 싶을 땐 오른쪽 얼굴, 순하고 귀여운 느낌을 내고 싶을 땐 왼쪽을 부각해요. 양가적인 얼굴이라 선택해서 써요. 균형 잡힌 얼굴이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배우로서는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GQ <부스럭>을 연출한 조현철 배우이자 감독이 최근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더라고요. “천우희의 얼굴은 굳이 모든 것을 관객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를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요. 뭘까요, 보게 만드는 힘이란?
WH 자꾸 제 얼굴 얘기하니까 좀 쑥스러운데···.(미소) 얼굴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모습도 있지만 결국 설득력과 흡입력이 그 안에서 표현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동안 맡은 역할들을 보면, 시나리오에 서사가 완전하게 표현되지 않은 인물이 많았어요. 주로 연기로서 인물의 서사가 완성되길 바라는 캐릭터였죠. 그런 역할이 제게 자주 오는 걸 보면, 전달하는 데 제게 약간의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노력도 많이 하고요.
GQ 노력이라 한다면요?
WH 음···. ‘마음’인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때 항상 진심을 다하려고 해요. 배우들도, 대중들도 그런 얘기를 자주 하죠. “결국 연기는 가짜잖아, 허구잖아.” 물론 허구죠. 그런데 그 허구 안에 제가 속해 있을 때는, 그게 진짜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세계를 믿는 거죠. 그렇게 진심을 담아야만 보는 분들에게 전달된다고 저는 믿어요. 그래서 애를 쓰고 영혼을 갈아 넣어 한 신 한 신을 연기하죠.
GQ 문득 그 말이 떠오르네요. “앞으로도 의심하지 않고 연기하겠다.” <한공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던 그 유명한 수상 소감의 한 구절이죠.
WH 물론 저의 행보에 대해 의심하는 순간은 있죠. 지금 하는 게 맞나? 이 길이 맞나? 그런데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의심하지 않아요. 매 순간 진심을 다한다는 게 쉽지 않죠. 그래도 그만큼의 신뢰와 순수함이 있어야 진심이 전달된다고 믿어요. 최대한 순수하게, 그 상황을 믿고 몸을 던지는 거죠.
GQ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순수함을 지킨다는 것.
WH 전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무덤덤해질 때가 있거든요. 단단해진다는 점에서는 분명 좋은 부분도 있겠죠. 한편으로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함일 테고요. 그런데 저는 무덤덤하고 무감각해지는 제 자신이 싫더라고요. 차라리 상처받을 거 받고, 아플 거 아프고, 좋아하는 걸 좋아하기로 선택했어요.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 하잖아요. 출산을 하고 나서 또 아이를 갖는 건 고통을 망각해서라고. 저도 그렇게 망각하는 것 같아요. 연기로 겪은 고통이나 상처를 계속 감싸 안고 가면 이 일을 지속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이 일을 순수하게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인 거 같아요.
GQ 망각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아파하고, 섬세하게 감각한다.
WH 오롯이 다 느낀다는 건, 거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러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GQ 인터뷰집 <배우의 방>에는 기자와 천우희, 그리고 우희 씨의 오빠와의 삼자 대화도 담겨 있더군요. 그중에 마음에 남은 대목이 있어요. 오빠가 “우희는 관객을 눈물바다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배우”라고 했던 부분.
WH 저희 오빠뿐 아니라 친한 친구들도 자주 이야기해요, “우희 네가 한 번쯤은 눈물을 쏙 뺄 만큼 슬픈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고요. 제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같이 울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하면서요. 고등학교 때 연극을 했어요. 첫 번째 작품은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였고, 두 번째 작품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역시 아픔을 지닌 역할이었죠. 당시에 저는 연기라는 걸 몰랐어요. 그래서 더 단순하고 심플하게 연기를 했는지도 몰라요. 그게 오히려 보는 이들에게 더 강하게 전달되었던 것 같아요.
GQ 그 말, 뭔지 알 것 같아요. 얼마 전에 한 보이는 라디오에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을 들려주었을 때 우희 씨가 울었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함께 울었다니까요.
WH 그때는 제가 더 당황했어요. 수상 소감 영상은 너무나 자주 보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헤드셋을 끼고 소리만 듣는 건 처음이었어요. 그날의 제 숨소리, 격앙된 목소리, 호흡이 그 헤드셋을 통해 오롯이 느껴지는 거예요. 순간 그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더라고요. 왜, 왜 나 지금 눈물이 나지? 수상 소감 당시부터 지금까지 연기해온 순간이 그 짧은 찰나에 저를 스치고 간 것 같아요.
GQ 연기할 때도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고 느낄 정도로 몰입하곤 해요?
WH 하하하하. 가까운 선배님이랑 가끔 이야기 나누는 토픽이긴 한데, 저는 현실자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풍덩 빠지는 게 완벽한 몰입이고 진정한 메소드 연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자신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한 몰입이라고 생각하는 쪽이죠. 연기를 하고 나서 잠깐만, 내가 누구였지? 여긴 어디지? 망각할 만큼의 몰입은 글쎄···. 빙의에 가깝죠.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던져놓고 남을 연기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혼자 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연기는 결국 공동 작업이니까요. 전달해야 하는 바가 명확히 있고, 같이 하는 사람과의 호흡도 중요하죠. 그걸 인지한 상태에서 풍덩 빠질 때는 물론 있어요. 지나치게 인식해서 완벽하게 계획한 연기도, 그걸 다 벗어 던지고 감정적으로 하는 연기도 모두 지양해요. 두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GQ 가장 최근에 연출자와 배우로 다시 만난 조현철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어요?
WH 아주 좋았어요. 조현철 오빠와 처음 만난 건 <아르곤>에서 배우와 배우로서였죠. 그런데 그는 배우이기 이전에 연출자였고, 워낙 연출 잘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굉장히 궁금했어요. 연출자로서의 조현철은 어떨까? 겪어보니 그는 디렉션이 굉장히 명확하고 부드러운 연출자였어요. <부스럭>의 완성본도 몹시 만족스러웠죠. 제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느낌을 너무나 잘 담아주었더라고요. 나 천우희라는 배우를 잘 이해하고 있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GQ 연출자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건 어디서 느껴져요?
WH 연기할 때 느끼는 감정, 찰나가 테이크마다 다를 때가 있어요. 그걸 놓치지 않고 영화 속에 담아내주었을 때요. 연기하는 입장에서 저는 늘 ‘그 순간을 포착해내줄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모니터 앞에 있는 연출자를 신뢰하면서 연기를 해요. <부스럭> 완성본을 보니 하나하나의 호흡을 섬세하게 포착해 담아내주었더라고요. 조현철 오빠와 이태안 감독님이 저의 믿음에 화답해준 거죠.
GQ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우희 씨에게 ‘믿음’이란 아주 중요한 가치 같아요.
WH 굉장히요. 그래서 상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때는 상처도 많이 받고 연기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죠. 물론 신뢰를 넘어 책임감이라는 더 큰 무게가 있으니 그것이 절 지탱해주긴 하지만요. 가장 바탕에는 신뢰가 있어야 해요.
GQ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알고 있어요?
WH 일단 제 자신을 제일 믿어요. 그리고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 연출자, 스태프들,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상대도 저를 그만큼 신뢰해야 하고요. 서로의 믿음이 중요해요.
GQ 관상, 인상을 믿는다고 들었어요.
WH 관상은 과학이죠.(미소)
GQ 사람을 만나면 동물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나요?
WH 저 사람 잘 봐요. 평소에 관찰을 많이 하거든요. ‘이 사람은 어떤 성향일 거 같다’고 잘 파악하는 편이고, 대부분 맞아요. 그렇다고 해서 배척하거나 거리를 두지는 않고요. 남을 잘 안다는 건, 결국 자신을 잘 아는 일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과 지내다 보면 제 자신이 보이기도 하잖아요. “연애를 많이 해보라”는 말을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말이 나와 맞는 상대를 찾아가는 것보다는, 여러 상대를 통해 내 자신을 점차 알아가는 의미에 가까운 것 같더라고요.
GQ 그렇다면 천우희는 어떤 사람이에요?
WH 굉장히 상대적이고 상호적인 사람이에요. 상대에 따라 저는 달라져요. 달라진다는 게 변덕을 부리거나 이중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에 많이 동화되는 편이에요. 좋은 사람에겐 좋고, 못된 사람에겐 못돼요. 강강약약.
GQ 시나리오 볼 때도 날것의 첫 느낌이 중요하다면서요?
WH 맞아요. 물론 역할 분석하고 캐릭터를 만들면서 수없이 대본을 보기는 하지만, 시나리오를 보면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첫 느낌이 있어요. 그게 대부분 맞더라고요. 처음 느낀 뭉뚱그린 덩어리를 쳐내고 조각하면서 제가 그렇게 느낀 이유를 계속 찾아가요.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을 카메라 앞에 서서 제 몸, 얼굴, 느낌, 감정으로 표현하게 되죠. 무언가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치가 저에게는 연기예요. 제가 만약 글을 잘 쓰거나 음악을 잘했다면 글이나 음악으로 표현을 했을 거예요. 제가 연기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결국, 저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해요. 작품에 관해 인터뷰를 하고, 작품의 메시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결국 저는 연기로 표현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관객은 연기로 봐주시고, 저는 연기로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GQ 가끔은 침묵이, 가사가 없는 음악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첼로도 그렇죠. 우희 씨도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WH 제 영역 밖의 예술에 관심이 많아요. 언젠가는 반드시 악기를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한번은 한스 짐머 공연에 갔다가 첼리스트 연주를 보고 강렬하게 이끌렸어요. 순간 첼로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첼로 선율이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감상자로 첼로 공연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땐 막연하게 ‘좋다’고만 생각했는데, 배우다 보니 이제는 경외를 느끼는 단계에 이르렀죠. 저 한음을 내기 위해 얼마나 수많은 연습을 했을까? 그 완벽함 위에 즐길 수 있는 노련함을 지니기까지 얼마나 고투했을까? 한 가지 일에 열정과 인생을 바친 사람들을 깊이 존경해요. 장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이 있죠.
GQ 그렇다면, 장래희망은 연기 장인?
WH 장인 정신으로 임하고 싶죠. 물론 연기는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걸 알아요.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때도 있고, 반대로 한 만큼의 노력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고요. 정답이 없으니 어려워요. 연기에 있어서는 단 한순간도 허투루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여전해요. 계속 계속,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서 주변에서 수명을 당겨 쓴다는 얘기도 자주 하죠.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무언가를 위해 열정을 다할 수 있다는 것,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GQ 연기에 그토록 열정을 다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WH 연기는 모든 게 자유로워요. 무언가가 나를 막아서는 게 없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나 행위가 연기 안에서는 모두 허용되잖아요. 그래서 평소에는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하는 제가 연기에서만큼은 용기를 낼 수 있어요. 원래의 저는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제 스스로를 틀 안에 가둬요. 도덕성과 윤리가 저를 너무 옭아맬 때가 많죠. 그 안에서 굉장히 큰 저항감과 반항심이 있는데, 이것이 연기로 풀렸기에 아주 다행인 거 같아요.(웃음)
GQ 엉뚱한 이야긴데, 왠지 지름길 싫어할 것 같아요.
WH 그렇죠. 그래서 아직도 이러고 있는 게 아닐까.(웃음) 저는 성공보다는 성장이 중요한 사람이에요. 성공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성공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운과 여러 가지가 맞아떨어져야 하고요. 남들의 시선에서 제가 좀 답답할지언정 제 스스로는 진흙탕에 빠지든, 덤불 속을 헤집고 가든,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들이 뭐라든 제가 옳다고 생각하면 묵묵히 그 길을 가면 되는 거니까, 계속해서 뚜벅뚜벅 걸어가려고요.
GQ 천우희에게 성장의 기준이란 게 있을까요?
WH 저라는 사람이 좀 더 넓고, 깊었으면 좋겠어요. 시각도, 생각도, 여러 가지 면에서요.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편협해지기가 쉽죠. 너무 원하는 것도, 너무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너무 좋아하고 간절한 것도 없이,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웠으면 해요. 그게 제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GQ 캐릭터를 떠나보낼 때마다 공허한 마음이 든다면서요. 최근에는 두 작품을 떠나보냈죠. 기분이 어때요?
WH 개봉하는 날은 늘 마음이 공허해요. 이제 그 인물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까지 분신처럼 함께한 인물을 저로부터 찢어서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기분이에요. 한 챕터를 끝냈다는 생각에 후련함도 있지만 마음이 헛헛해요. 그럴 때는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요. 연기할 당시의 기억을 돌이켜보거나, 그때의 일기를 들춰보기도 하고요.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 하니까요. 그 하루면 충분해요.
GQ 그 공허한 하루가 천우희에게 굉장히 소중한 하루처럼 들리네요.
WH 소중하죠. 그 인물로서의 삶, 작품 안의 제 삶이 바로 거기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