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의 절반, 뒤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다.
다정하지 못한 나의 반성문
영화 <어바웃 타임>을 함께 본 연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한테 좀 다정해주라.” 그래서 우리는 헤어졌다. 그는 다정해달라는 요구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희생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줬고, 내가 그의 세상의 전부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너무 고마워서 나도 그를 사랑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바웃 타임>이 시공을 뛰어넘는 사랑이 아닌 <백 투 더 퓨쳐> 같은 타임 워프 영화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를 따라잡지 못했다. 헤어진 후, 마지막 순간들에 그에게 날카로운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나 같은 사람은 나조차 만나기 싫었으니까. 누군가의 평탄한 인생에 내가 민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연애하는 일을 중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일 틈 없이 한 연애의 헤어짐은 대부분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기에 어느 정도 나를 성찰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리하여 2022년의 목표는 아주 간지럽지만, 사랑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사랑하는 감정을 ‘소비’와 ‘낭비’라고 생각했다. 이건 ‘쿨’한 게 아니라 내 감정을 방관하려고 했던 것이고, 관계를 책임지고 싶지 않은 회피적인 성향이었다. 나의 내밀한 감정과 사정이 들어 있는 방문은 절대 열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주는 일에 정면 승부했던 상대방의 인생에는 피해를 주게 된다. 이런 이유로 ‘효율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야 나와 상대방 모두 행복할 수 있는지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20년 지기 친구는 너는 이미 글러먹었다며 사랑과 효율을 동일선상에 두는 생각부터가 문제라고 타박했지만, 친구의 예상과 달리 2022년 상반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나는 꽤 목표를 이루고 있다고 느낀다. 얼마 전 비행기에서 <어바웃 타임>을 다시 봤는데, 드디어 타임 워프의 미스테리보다 팀과 메리가 서로에게 변함없이 다정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행기라는 특별한 장소가 주는 착시였을 수도 있지만 장족의 발전 아닌가. 효율적인 사랑을 위해서 이제까지처럼 방관하는 자세는 지양하고,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과 관계를 쌓아야 할지 고민해보았다.
유형보단 무형의 가치에 우선순위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느 날 전 연인과 길을 걷는데 생뚱맞게 시멘트 바닥에 들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서 이 꽃을 좀 보라고 했다. 그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다음 날 갑자기 그는 꽃을 선물했다. 너무 고마웠지만 아주 미안하게도 나의 골대에는 그의 마음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경우 꽃 선물보다는 시멘트를 뚫고 핀 꽃을 함께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행복이란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서로가 가진 개인적 가치관이 다르면 이렇듯 가성비가 낮은 사랑을 하게 된다. 손에 쥐는 신상 물건보다는 계절이 바뀔 때 느껴지는 새로운 바람을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와 더 맞다. 여행 가서 고급 와인을 찾아다니기보다는, 구시가지 골목 오래되어 보이는 집을 보며 거기엔 어떤 가족이 살고 있을지 같이 상상을 펼쳐줄 사람이 나와 더 맞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그건 철없는 생각이라며 현실을 자각시키는 사람보다는, 함께 해맑을 수 있는 사람이 나와 가장 잘 맞다.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이제는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안부인사 정도는 꾸준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너무 바쁜 시기에 연인에게 연락을 못 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2박 3일이 지나 있었다. 당시에는 바쁘면 그럴 수 있지 않나 넘겼는데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일로 인해 어쩌면 나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할 수도 있는 것이고, 나와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 상대방은 자신의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힘든 일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제를 모두 해결한 후 상대에게 말한다. 그런데 얼마 전 아빠를 통해 한동안 엄마의 위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식이 걱정할까 봐 티 내지 않으신 것이다. 만약 엄마가 혼자였다면 홀로 끙끙 앓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는 딱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은 꽤 살 만하지 않을까. 나도 나의 희로애락을 파트너와 공유하고, 아주 힘든 순간에는 의지도 해봐야겠다. 나의 올해 다짐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내게는 엄청나게 노력해야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이제 효율적인 사랑을 추구해볼 것이다. 나의 행복을 넘어 나의 파트너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방식을 찾을 것이다. 팀과 메리만큼 나도 이젠 누군가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홍민지(SBS <문명특급> PD)
7월부터의 다짐ㅣ다정한 사람, 효율적 사람 사랑.
나는 고래가 아니다
어제의 경솔함을 후회한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원고의 청탁이 왔을 때 왜 나는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던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에디터의 목소리가 유달리 유쾌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핑계 대지 말자.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평소에는 칼같이 잘만 거절했는데 올해는 어찌된 영문인지 헛발질의 연속이다. 정초에 “절대로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를 호기롭게 외쳤던 내가 2022년이 지나기도 전에 후회로 이불킥이라니! 코로나 시기 동안, 정신 수양이라도 했는지 뭐든 “오케이!”를 외치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했던 기억이 나에게 있던가? 이유야 어떻든 나는 최대치의 상냥함을 단전에서 끌어올려(상냥함이 단전에서 기인하고 쉽사리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른다) 에디터에게 말을 건넸다. “아하하하, 제가 재밌게 쓸 수 있을지, 적당한 적임자인지 의문이네요.” 살짝 돌려 까기 거절쯤 되겠다. 그러나 우리의 에디터님은 뛰는 X 위에 나는 X를 증명하는 존재가 아닐까. 한마디로 청탁의 고수쯤 되려나. “하하하하, 작가님. 저는 에세이 <피땀눈물, 작가>에서 본 작가님의 글, 있는 그대로의 스타일이 좋아요.”
예나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나는 칭찬에 무른 인간이란 사실이었다. 에디터의 말을 스쳐 지나가는 인사 같은 것쯤으로 치부해야 했는데···. 아직 세상은 살 만하고 아름다운 품성의 정직한 사람이 많다고 믿는 내가 문제였다. 나는 사람인데, 고래도 아닌데! 갑자기 휴대 전화를 들고 어깨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야! 너 사람이야. 칭찬에 춤추지 마라. 심사숙고하라고!’ 그러나 늦었다. 내 입은 내 어깨만큼 가볍고 경솔했다. “네에, 에세이만큼 재밌게 잘 써보지요오.” 통화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뭐냐, 너?’ 내가 지금 붙잡고 써야 할 글의 주제는 ‘2022년 상반기 반성문’이 되겠다. 살면서 수많은 원고를 썼지만 쓸 말이 없는 경험을 지금에야 하고 있다. 내가 반성할 것이 없는 완벽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경주마 같은 인간이라 그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일의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GO’를 외치는 성격이 매년 반성하고 개선해야 할 사항일 수도 있겠다. 허리 디스크 따위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PT를 무슨 국대 상비군처럼 해댔다가 쇄골이 탈 나고, “어린이 독자들이 작가님을 꼭 만나고 싶어 해요”란 말에 “무조건 갑니다!”를 외쳤다가 일정이 꼬일 대로 꼬여 영혼이 나갈 정도로 애를 먹었던 사건, 평형 선수가 없다는 말에 모 시장 배 수영대회에서 50/100미터 평형 부문에 출전했다가 전신을 강타당한 몸살! 살살 옆구리를 긁어주는 간지러운 칭찬을 곁들인 부탁이면 늘 앞뒤 재지 않고 질주했던 나를 반성한다. 후반기에는 진짜, 정말로 여유있는 태도로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리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은 하는데···, 아뿔싸! 이미 장편소설 계약을 2권이나 덜컥 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어린이 강연에 가서 “십민준 3탄 나와요?”란 아홉 살 독자의 요청에 “당연하지! 우리 내년에 십민준 3탄이랑 꼭 만나자!”라고 장담까지 했다. 2023년 상반기가 되면 분명 내 똥줄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없으리라. 반성을 한들 이미 늦었다. 그래서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또다시 위로하련다. “관 뚜껑 덮고 나면 질려도 어쩔 수 없이 영겁의 시간을 누워서 쉴 것이니···,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여유니 뭣이니 신경 끄고 살던 대로 살자.”
나는 고래가 아니니 하반기에는 칭찬에 흔들려 후회할 일은 자제하련다. 하지만 인간이니까 살아 숨 쉬는 동안 있는 힘껏 달려도 괜찮지 않을까. 워커홀릭이란 멋진 말도 있지 않은가. 가만, 가만. 칭찬에 어깨춤을 이미 한바탕 췄으니···, 나는, 고래 인간쯤 되려나? 이송현(<지붕 뚫고 하이킥>, 어린이·청소년 문학 작가)
7월부터의 다짐ㅣ인생은 원래 실패와 후회의 연속··· 그 가운데 우리는, 조금씩 ‘찔끔’ 앞으로 나아간다!
여행기
“배 곯지 말고 다녀라.” 할머니는, 때가 어느 땐데 굶고 다녀. ‘곯다’라는 표현을 처음 들어 뜻을 되물으며, 푸흐흐 그럴 리 없다 의기양양 손사래 쳤던 손주는 잘도 배를 곯고 다녔다. 밥 꼭 챙겨 먹고 다니라고 말해주는 할머니가 이제는 없어서, 잘 챙겨 먹을 성실함도 바지런함도 묽어져서, 삼시세끼와 멀어진 지 얼마큼 지났다. 여기서 ‘잘 챙겨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피코이의 버터갈릭새우, 용봉대반점의 등심탕수육, 크라이치즈버거의 치즈버거 세트, 교촌치킨의 반반 윙 세트, 대도식당의 깍두기볶음밥, 독도쭈꾸미의 ‘쭈꾸+삼겹’···, 어쩐지 부끄러워져 이쯤 그만 적겠으나 줄줄이 더 이을 수 있는 나의 즐겨찾기 배달 먹거리 리스트다.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은 때에 따라, 저녁은 주문 폭주로 챙겨 먹긴 풍성하게 챙겨 먹었다. 그러나 이것이 잘 챙겨 먹은 것일까? 어느 주말에 일은 일어났다. 월요일은 월요일이니까, 화요일은 화요일이니까, (중략) 토요일은 토요일이니까 시켜 먹은 그날, 점심에는 간단히 햄버거, 저녁에는 해물간짜장, 야식으로 ‘반반 윙’을 먹은 밤에 배가 돌덩이처럼 굳기 시작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맥주병을 든 채 부풀어오른 배를 헐떡이던 토르처럼. 토르를 연기한 크리스 헴스워스 배는 특수 분장한 것이기나 했지, 내 것은 진짜였다.
미련해. 돌덩이 틈으로 세 글자가 비집고 나왔다. 잘 살자. 주먹을 치며 다짐한 그날의 목표다. 주먹 깨나 친 데가 명치라는 사실이 우스워서라도 이제야말로 곯기 전에 잘 살아야겠다 싶었다. 나는 언제 잘 산다고 느낄까. 머리를 젖히고 생각해본다. 알람 소리를 듣지 않고도 일찍 일어날 때. 아침 식사할 때. 산책할 때. 물에 귀까지 푹 담그고 떠 있을 때. 밤공기 마실 때···. 이거 완전 여행할 때잖아?
이 여행자는 평소 하지 않는 일을 여행 가서 하는 스타일이다. 동이 트면 단숨에 눈을 뜨고, “조식은 7시 30분부터 8시 30분 사이에 덜 붐빕니다”라는 호텔 안내에 착실히 따르며(그 시간에 가면 아주 정갈하게 갖춰 입고 식사 중인 노부부를 자주 본다), 아침 식사 후 산책과 수영을 하고, 아무 일도 없는 시간에는 발코니에 앉아 가능한 한 오랫동안 멀리 바라본다. 무감각한 웹 서핑 대신 날아오는 새를 구경하고, 주인 따라 걷는 강아지 뒷모습을 관찰하고, 즐겁게 사진 찍는 사람 무리를 귀여워한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몸도 마음도 활기가 돈다. 그럼 여행 온 것처럼 살면 되겠네?
여행할 때 충만하니 일상도 여행하듯 살아보자는 단순한 회로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어트랙션을 즐기고 야외 활동을 강행하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여행 안내서는 간결하다. –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난다. 간단하게라도 아침을 먹는다. 밤 산책을 즐기되 산책 전에는 배달 음식대신 가볍게라도 직접 해 먹는다. 하여 나는 지난 저녁 키친타올로 톡톡 물기를 제거한 두부 두 조각을 구워 먹었다. 지지난 저녁에는 산책하는 길에 애플 수박을 사와 반 덩이를 먹고 함께 사온 토마토는 적당한 두께로 썰어 설탕에 재워두었다. 오늘 아침에는 마트에서 산 누룽지를 끓였다. 뜨거운 숭늉을 식혀 먹으며 내친김에 눈앞에 아무 책이나 펼쳤다. 요 며칠 내내 드라마 <작별>(1994)에서 윤여정, 고현정, 유호정이 무엇을 입고 나오는지 구경하는 재미로 보냈는데, 생각해보니 호텔 조식 먹을 때 영상을 틀어놓지는 않잖아. 여행 놀이에 빠진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숭늉한 숟갈, 책장 하나 넘겼다.
그런데 이것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펼쳐둔 책이 닫히지 않게 왼손으로는 계속 책을 누르고 있어야 한다.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자니 책이 자꾸 엎어지기도 한다. 급한 대로 휴대 전화를 끌어다 책을 눌렀다. 이래서 문진이 필요하구나. 불현듯 수년 전 기억이 떠오른다. 문진을 사러 가야겠단 말에 그것이 뭐냐고 묻던 나를 조선 시대에 표류하던 네덜란드인과 마주한 듯 눈이 동그래지던 선배. 당시 선배는 벌어진 세대 차이라 여기고는 상심했고, 나는 문진이 무엇인지 알고 나서도 묵직한 덩어리가 대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야 그 쓰임새에 갈증이 난다. 그것은 세대 차이가 아니라 책을 읽는 하루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였다. ‘눌려 가려진 부분까지 볼 수 있으려면 투명한 문진이 좋겠네’, 아침 숭늉 앞에서 나는 작게 배웠다.
떠난 여행에는 돌아오는 날이 있듯 일상의 여행도 길게는 4박 5일, 짧게는 1박 2일 단위로 오락가락 오가는 중이다. 무공해 여행에 약을 좀 치고 싶을 때면 고깃집으로, 생맥주집으로 밤길을 나선다. 미묘한 변화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던 배부름이 덜해졌다는 것. 배 곯지 않고 다니는 하루가 조금씩 밝아온다. 김은희(<지큐> 피처 에디터)
7월부터의 다짐ㅣ여행하기.
슬리브리스와 여름 과일들
올해 1월, 나는 세 벌의 속옷을 샀다. 아름다운 곡선과 실크로 만들어진 그것들은 나의 씀씀이에 비해 비싼 것들이었고 입거나 벗는 아주 짧은 순간만 내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막상 그 위에 무겁거나 가벼운 옷을 걸쳐 입고 나가면 이렇게 좋은 속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게 되었고, 가끔 딴 생각에 빠질 때만 그래 오늘 그것들을 입고 나왔지 맥락없이 자각했을 뿐이었는데 어쩌면 그 한정적인 감각 때문에, 필수적이지는 않은 티셔츠 안쪽의 아름다움 때문에 가장 확실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내 피부에 깃든 것들이었다. 좋은 속옷을 입으며 속옷 생각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거나 주워 입고 나왔을 때 눈 밑으로 번져나가던 수치심과 열패감이 이제 없었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때는 사람들 앞에서 수시로 움츠러드는 생각과 마음이 다 저 늘어진 속옷들 때문인 것 같았다. 옷장의 오래된 속옷들이 나에게 영향을 주고 조금씩 나를 좌우하기 시작했다는 걸 처음에는 인정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 나 자신이 하다 하다 사적인 의복에까지 의존하는 사람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해, 스스로를 진심으로 위해주기 위해 택한 것이 다름 아닌 속옷이었고, 6개월이 지난 지금 속옷은 내 머릿속에서 조깅이나 여름 과일, 넷플릭스 같은 가벼운 주제가 되었다. 스웨터와 블라우스와 반팔 셔츠 아래서 그것의 비밀스러운 무게는 나에게 환하고 분명한 힘이 되어주었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속옷은 브라렛이다. 와이어와 패드가 없어 민소매와 함께 겹쳐 입기 좋은 속옷인데 아직 한 번도 입어본 적은 없다. 소매 없이 팔을 내놓는 것에 자신이 없어 민소매 자체를 입지 않았으니까. 뜨거운 햇살 속에 날렵하고 마른 사람들이 입은 민소매가 대리석 건물의 중추처럼 예뻐 보였고 나는 누가 봐도 마른 몸은 아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팔에 살집이 많았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어깨와 팔을 드러내고 활보하는 이들이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나도 한 번쯤 브라렛과 슬리브리스를 겹쳐 입어보고 싶었다. 브라렛을 입고 브라렛을 더는 생각하지 않은 채 걷고 싶었다. 질 좋은 속옷들과 함께 겨울을 다른 방식으로 지나왔듯, 나의 계절과 나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싶었다. 사랑하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가볍고 완벽하게.
오늘 빈티지 옷 가게에서 평소라면 고르지 않았을 슬리브리스 톱을 골랐다. 노란색과 빨간색 튤립이 사선으로 그려져 있는 실크 소재의 민소매였다. 옷걸이를 든 채 거울 앞에 서보았다. 슬리브리스를 조심스레 흔들었더니 형광등 아래서 여러 방향으로 광택이 났다. 입어보지 않은 옷, 입어보지 않은 속옷, 입어보지 않은 많은 마음과 디테일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예상 외로 너무나 거칠고 이상한 용기가 필요하다.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내고 정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는 조금 다른, 나의 사소함과 자질구레함과 생활에서 펼쳐지지 못했던 나의 초라한 욕망을 인정해주는 용기, 애써 피해왔던 외면의 생생함을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한 해의 반이 흐른 지금, 여름의 초입에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너, 입고 싶었구나. 아무 생각 없이 입고 싶었구나. 입었다는 사실을 잊을 때까지 네 피부에 깃들 때까지 입고 싶었구나. 나는 계산대에 튤립이 그려진 그 슬리브리스를 가져갔고 그것은 내가 갖고 싶은 여름만큼이나 가볍고 부드러웠다. 테두리를 감싼 그 부드러움은 여름 과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복숭아 천도복숭아 청포도 자두 산딸기 참외 살구 블루베리···.
이십 대 초반에 사람들에게 자주 하던 과일 선물을 이번 여름부터 다시 하고 있다. 더운 공기가 가득한 가판대에 늘어지듯 놓인, 그러나 각자의 색으로 반짝이며 놓인 그것들은 거의 내게 아름다운 속옷처럼 보인다. 옷장 속의 속옷처럼 일단 구매하면 냉장고에만 놓이게 되는, 그러니까 집 안의 아주 사적인 영역에 놓이게 되는 사물들. 검은 봉지에 넣고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면 이 안에 이것들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게 하는 사물들. 친구들에게 과일을 내밀면 그들은 낯선 것을 받은 것처럼 기쁘게 당황한다. 어제 한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말고는 나에게 과일을 선물해준 사람이 없었어, 너에게 살구를 받으니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네.
나에게 속옷을 사주는 일과 타인에게 과일을 선물하는 일. 시나 소설에는 쓰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지난하고 사적인 질감으로만 맺히는 사물들을 세계와 나만의 방식으로 교환하는 일. 자주 하던 일과 처음 해보는 일 사이를 1월에 산 속옷을 입은 채 활보하는 일. 올여름은 슬리브리스와 과일들의 부드러움 사이에서 내내 끝나지 않고 남아 있을 것 같다. 김연덕(시인, <액체 상태의 사랑> 저자)
7월부터의 다짐ㅣ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기쁘게, 자신 있게 입기. 정확한 과일을 골라 최대한 많은 친구에게 선물하기.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사랑 멈추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