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훈이 숨을 고르는 시간.
GQ <약한영웅 Class1>에서 잊히지 않는 박지훈의 얼굴이 있는데… 문득 궁금해지네요. 지훈 씨가 좋아했던 본인의 얼굴은 뭐예요?
JH 저는 무표정이 제일 좋았습니다.
GQ 신보 홍보인가요?
JH 아뇨, 아뇨, 하하하하하. 그렇네요. 공교롭게도 이번 신곡 제목도 ‘Blank Effect(무표정)’이긴 한데, 저는 시은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걸 파악할 수 없는 얼굴이 너무 좋았어요. ‘얘는 무슨 생각할까’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얼굴이 있거든요. 그 얼굴이 되게 좋았어요.
GQ 그 얼굴은 대본 지문으로 쓰여 있었나요?
JH 아뇨, 표정은 전혀 적혀 있지 않은.
GQ 지훈 씨 생각에 시은은 그런 얼굴의 사람이었던 거네요.
JH 맞아요.
GQ 저는 그 순간이 좋았어요. 첫 화에서 두꺼운 물리책을 집어 들고…
JH “힘은 가속도에 비례한다.”
GQ 딱 그 목소리와 함께 영빈을 후려칠 때의.
JH 일그러진 얼굴, 네.
GQ 잔뜩 힘줘서 턱살도 좀 접히고. 그런데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기세가 응집된 얼굴이 슬로 모션처럼 흘러갔죠.
JH 저도 그 얼굴 좋아해요. 연기할 때 얼굴이 이쁘게 나와야 된다, 잘생기게 나와야 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사실 그게 마음에는 안 들어요. 연기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서 그 사람을 연기하는 건데 왜 내가 예뻐야 되지? 왜 나라는 사람이 예뻐 보여야 하고 잘생겨 보여야 하지? 저는 연기할 때만큼은 제 얼굴에 신경 안 써요. 그 장면이 티저 영상으로 먼저 공개됐잖아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신경 안 써서 좋다. 신경 안 쓴 게 보여서 좋다.
GQ 그런데 아까 꽃 들고 촬영할 때부터 손가락에 계속 눈이 가서 말인데요.
JH 여기 갈라진 것들요?
GQ 네, 벗겨지고 일어난 거스러미들. 혹시 손 많이 쓰는 일 하고 있어요?
JH 아, 그, 레슬링 해요.
GQ 레슬링요? 그러고 보니 손끝도 딴딴해 보여요. 한 지 좀 된 손 같은데요?
JH 다시 배운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시작한 지는 좀 됐어요. 작품 들어가면서 다치면 안 되니까 잠시 쉬었다가 지금 다시 미쳐 있습니다.
GQ 작품이라 하면 <약한영웅> 말인가요? 액션을 위해 배웠어요?
JH 아뇨, 별개로. <약한영웅> 들어가기 전에 배우기 시작한 건 맞는데 작품과 별개로 운동을 하고 싶었어요. ‘레슬링이 재밌다고? 이게 왜 재밌을까?’ 싶었는데 상대를 넘어뜨렸을 때의 그 짜릿함? 뿌듯함? 내가 정자세로 상대방에게 태클을 걸고, 그게 걸렸을 때의 짜릿함은…, 이 맛에 운동하는구나 싶어요. 그래서 계속하고 있어요. 이번에 승급 심사 봐서 2단 승급도 했어요.
GQ 1단이 시작점이에요?
JH 0단부터요. ‘그랄’이라고 하는데 화이트(벨트), 그러니까 0그랄부터 시작해서 1, 2, 3, 4그랄, 그러고 블루로 넘어가요. 지금까지는 0그랄이었는데 이번에 승급 심사 보면서 한 번에 두 단계가 승급돼서 이제는 2그랄입니다.
GQ “우와”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JH 그만큼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죠.
GQ 왜 레슬링을 택했어요?
JH 힘든 게 뭐가 있을까? 그러면서도 ‘레어’한 종목이 뭐가 있을까 찾았어요. 펜싱, 주짓수, 여러 후보가 있었는데 레슬링 체육관이 집과 가까워서 가봤다가 첫날부터 그냥 매료돼버렸죠. 이거다.
GQ 처음에 뭘 배우는데요?
JH 보여드릴까요? (의자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는다.) 꽃게 자세라고도 하는데 이게 기본자세예요. 스쿼트 자세에서 허리 딱 펴고, 한 발씩 한 발씩 옆으로 움직이는 걸 계속 반복해요. 이 기본자세에서 (레슬링할 때는) 오른손잡이면 왼발과 왼손을 한 발 뒤로 보내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싣고, 머리로 상대방 무게와 내 무게를 계속 맞대면서 상대방 목을 잡고 싸우는 거예요. 황소 뿔싸움하듯이. 상대방 힘을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태클을 걸 수도 있어요. 기본자세만으로도 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요. 전신 운동이에요.
“연기할 때 얼굴이 이쁘게 나와야 된다, 잘생기게 나와야 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사실 그게 마음에는 안 들어요. 연기할 때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서 그 사람을 연기하는 건데 왜 내가 예뻐야 되지?”
GQ 스파링 한 판에 몇 분 걸려요?
JH 2분 하고 30초 쉬고 또 2분 해요.
GQ 그걸 하루에 몇 번 해요?
JH 저녁 6시 수업이면… 그런데 제가 요즘 너무 미쳐 있어서 10시에 집에 가요. 주말 빼고 매일 가요. 수업 끝나면 매트에 물 뿌리고 청소하고, 가슴 밀기라고 팔굽혀펴기 자세에서 웨이브로 올라오는 운동도 하고. 레슬링장에 갔는데 땀을 못 흘리고 나오면 아깝다 그래야 하나? 뭐라도 하고 나와야 뿌듯하지 배움 없이 나오면 허무해요.
GQ 저도 지금 레슬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지는데요.
JH 하하하하하.
GQ 가장 최근에 배운 건 뭐예요, 그럼?
JH 업어치기.
GQ 2그랄 되면 배우는 기술인가요?
JH 그게, 저는 지금 2그랄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으로 배우고 있어요.
GQ 우수 모범생이군요.
JH 관장님이 저를 거의 선수로 키우시려는 것 같아서 가끔 의구심이 들기는 하는데, 흐하하하. 반의 반도 못 따라가긴 하지만. 그런데 유도 업어치기랑 레슬링 업어치기는 좀 다른 것 같더라고요. 유도는 상대 옷깃을 잡아서 메치는 것 같은데 레슬링은 상대의 팔을 잡고 파고 들어가서 회전을 확 빠르게 해서 업어쳐요. 그렇게 해서 넘어뜨렸을 때의 그 짜릿함은 정말 해본 사람만 알아요.
GQ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고 봐주는 건 없고요?
JH 서로 서로 “스파링 하실래요?” 물어보면서 자유롭게 상대가 매칭되는 편인데요, 저는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요. 그래야 늘어요. 어려운 기술을 당해봐야 ‘이렇게 당하는구나’ 수를 알 수 있다고 해야 될까요? 게임도 그렇잖아요. 잘하는 사람이랑 해봐야 실력이 늘잖아요. 잘하는 사람과 붙어봐야 힘도 들고, 내가 팔을 많이 주면 메치기를 당하는구나, 업어치기를 당하는구나, 이럴 때 이런 기술을 당하는구나 파악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겸손해집니다, 사람이. 항상 겸손해야 하고요.
GQ 일부러 힘든 길을 고르는 게 취미예요?
JH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너무 나태해진 것 같다는 생각. 그때는 뭐라도 해봐야겠다, 뭐라도 하려고 움직여요.
GQ 그 손에 정말 히스토리가 있었네요.
JH 손도 많이 다치고, 여기 목에도 상처 하나 있는데 어디 갔지? 잡힌 목 뿌리치다가 손톱에 긁혔어요. 여기, 여기, 다 레슬링 하다가. 지금은 연해졌네요.
GQ 영광의 흔적이에요?
JH 일단은 이겨야죠.
GQ 지면 분해요?
JH 그러진 않아요. 분하다기보다는 ‘와, 잘한다’. 상대를 계속 읽어보려고는 해요. 버릇이 뭘까? 태클 걸기 전에 잔 스텝을 밟거나, 기술 쓰기 전에 꼭 목을 잡거나, 다들 버릇이 조금씩 있거든요. 깔끔하게 (기술이) 들어오면 파악을 잘 못 하는데. 내 버릇은 뭐지? 계속 유의해요. 저도 버릇이 있기는 해요.
GQ 뭘까?
JH 그건 못 알려드리죠. 하하하하하.
GQ 스파링 붙어봐야겠군요.
JH 사실 저는 상대 목을 한 번 당기고 나서 태클을 걸어요. 상대방 중심을 흐트리고 들어가는 건데, 그 습관을 빼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요. 그래도 계속 생각하려고는 해요. 아드레날린이 터지면 아무 생각도 안 들잖아요. 그보다는 조금 차분히 식히면서 내가 지금 불리한 게 뭘까? 내가 손을 주고 있나? 아니면 내가 손을 잡고 있나? 상대 버릇은 뭘까? 무슨 기술을 나한테 쓰려고 할까? 계속 생각하려고 해요. 물론 그렇다고 다 방어가 되거나 공격이 될 수 없기는 한데, 그래도 생각하면서 하다 보면 한두 개쯤은 성공해요.
GQ 이번 새 앨범명이 이잖아요. 박지훈 씨가 요즘 채우고 싶은 빈칸은 뭐예요?
JH 글쎄요, 빈칸이 딱히 없는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걱정하는 것도 너무 많고, 불안한 것도 있고, 감이 안 오는 것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빈칸이 있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빼곡하게 다 채워져 있어요. 그게 좋은 것이든 안 좋은 것이든, 너무 빼곡하게 차 있어서 빈칸이 없어요.
GQ 지훈 씨에게 빈칸이란 여유 같은 대상인가 보네요?
JH 네, 그런. 제게 빈칸은 여유, 자유로움, 그런 것 같은데 현재는 빈칸이 없어요.
GQ 2그랄도 됐겠다, 뭐가 걱정이에요?
JH (프흐 웃는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많은 일이 걱정되기도 하고…
GQ 아, 당장의 새 앨범 활동에 대한 긴장만이 아니군요?
JH 그렇죠. 누구나 걱정없이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럼에도 제가 조금 더 변했다고 느끼는 건… 확실히 예전보다 잔걱정이 많아졌어요. 뭔가 이상해요.
GQ 왜 그럴까?
JH 그걸 모르겠어요.
GQ 음, 6년 전 오늘을 떠올려봅시다. 6년 전 오늘 기억해요?
JH 6년 전? 2017년? 고등학생 때? 연습생 시절 같은데요? 무슨 일이 있었지?
GQ <프로듀스 101> 시즌2 첫 방송일이에요. 박지훈이라는 사람을 본격적으로 대중 앞에 드러낸 날.
JH 아아, 정말요?
GQ 오묘한 얼굴이네요.
JH 으하하하하. 모르겠어요. 뭐랄까, 이상하네요.
GQ 6년 전 같은 날인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다만 무언가 변했다고 하니 그때와 지금, 그사이 흘러온 시간이 궁금해졌어요.
JH 그렇네요. 예전에는 무작정 돌파해보고 싶고, 도전해보고 싶고, 뛰어들어야겠고, 뭐든지 자신감이 있었어요. 지금은 한 번씩 더 거쳐 생각하게 돼요. 어쩌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난 원래 약한 사람인가? 그래서 강해 보이려고 무작정 돌진했던 거 아니야? 그런데 운이 좋아서 결국 잘된 거야. 이런 생각이 계속 들고 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멈췄어요. 그런 나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GQ 그런 생각을 누구와 나눠요?
JH 연습생 시절부터 같이 보낸 형이 있어요. 당시에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항상 이성적인 형이에요. 해결책을 들으려고 말한 건 아니지만, 제가 바뀌는 것 같은 변화가 힘들어서 조언을 구했죠. 그때 형이 해준 말은 “지나가는 시간이다. 혹은 바뀐 걸 인정하고 네 모습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어요.
GQ 동의해요?
JH 무언가 바뀐 지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가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굳이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지금은 이러하고, 여기에 적응하면 된다는 느낌이에요. 뭐 어쩌겠어요. 맞춰가야죠. 바뀐 나에게 내가.
GQ 그럼 요즘의 박지훈을 뭐라고 소개하겠어요?
JH 겁 많은 지훈이.
GQ 레슬링 할 때는 겁 없잖아요?
JH 겁 있죠. 겁나죠. 이 기술 안 먹히면 어쩌지? 다치면 어떡하지?
GQ 그러면서 월화수목금 밤 10시까지 레슬링 한다고요?
JH 방법이 있어요. 기술 당할 때는 악바리로 버티는 것보다 그냥 당하면 돼요. 그게 덜 다쳐요. 내가 (상대 기술에) 반까지 걸렸으면 몸의 힘 풀고 그냥 낙법만 딱 쳐야지, 막 몸 빼려고 하면 오히려 더 다쳐요. 그리고 2분 경기하고 30초 쉬잖아요. 그 30초가 황금이에요. 그때 숨 많이 쉬어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