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담아, 예지.
GQ 예지 씨가 지난 ‘GQ NIGHT’에서 디제잉할 때, 제 앞에서 내내 함께 스탠딩으로 즐기던 관객이 있어요. 알고 보니 예지 씨 부모님, 고모, 삼촌이시라더군요.
YJ 프흐흐흐흐, 맞아요. 할머니도 오셨어요.
GQ 온 가족이 클러빙을 즐기는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어떨까, 만나고 싶었어요.
YJ 생각해보니까 일본 클럽에서 공연할 때는 할아버지가 오셨네요.(웃음) 제가 처음 예지 Yaeji라는 아티스트로 시작할 때는 집에서 반대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취미로 생각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받아들여주셨어요. 내가 음악을 한다는 걸. 그리고 이제는 되게 자랑스럽게 생각해주고 계세요. 제가 일하는 모습,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셔서 클럽에서든 공연장에서든 보여줄 수 있으면 다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GQ 가족과 친구에게 감사를 표한 앨범이 2020년 이고, 그런데 3년 만의 새 앨범 에는 ‘분노’란 단어가 담겨 있네요?
YJ 분노라고 하게 된 건 적합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였어요. 미국의 한국 교포 친구들은 “그건 분노와 한 사이의 무엇이 아닌가” 하더라고요.
GQ 좋아요. 망치로 부수고 싶은 일을 얘기해봅시다. 무엇이 ‘그’ 감정을 불렀어요?
YJ 팬데믹 때 제가 살던 뉴욕이 락다운되면서 집에 완전히 고립돼 있다 보니까 일상이 너무 바빴을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유년기 때의 트라우마나 상처, 기억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거기서부터 분노라는 키워드, 분노한 감정을 마주하게 됐어요. 그런데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게 이 앨범이 딱 분노나 한, 이런 게 아니라… What Does It Look Like When Anger Passes Through Me? 그러니까, 감정이나 경험이나 관계도 한 곳에 머물지는 않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화가 나더라도 그 화가 평생 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언젠가는 사그라지거나 잊히거나 사랑으로 바뀌거나 다른 모양으로 잡히게 되는데, 그래서 이 앨범은 화로 시작했지만 그게 어떻게 변하는지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통해 내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것이기도 해요. 지금도 어떤 모습으로 화가 변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앨범이 나오고, 공연도 하고, 제 음악을 들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인터뷰하면서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Vulnerable? 취약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의 창피한 모습이든 약한 모습이든, 계속 변해서 일정하지 않은 모습일지라도 그냥 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직도 나는 답을 모르는데 괜찮다’, 그냥 공유하고 싶었어요.
GQ 흥미로운 게, 를 듣는데 이전 앨범이 시냇물 같다면 이번에는 거친 강물 같았거든요. 휘몰아치기도 하고, 천천히 흐르기도 하고, 폭포처럼 내리 꽂히기도 하는, 말 그대로 계속 변화하는 강물 같았어요.
YJ 정말 좋은 표현이에요. 거친 강물 같은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제가 경험한 지난 2~3년이. 깨달은 게 너무 컸어요. 분노가 시작된 이유가 어렸을 적 기억이 다시 돌아와서라고 그랬잖아요. 락다운으로 고립된 동안 어릴 때 봤던 만화를 다시 봤어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세일러문>, <웨딩피치>, <리리카 SOS>, <천사소녀 네티>, 대부분 마법 소녀 장르였는데, 이게 그 시절과의 포털 Portal처럼 된 거죠. 예를 들면 저는 부모님의 이민으로 뉴욕에서 태어났고 애틀랜타로 이사 갔어요. 그때 초등학생이었는데 학교에 백인밖에 없었고, 동양인은 저밖에 없었어요. 그때 그 아이들이 저를 놀리는 방식이 진짜 희한했거든요. 그런 건 그냥 억누르고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요. 잊혀졌던 이유가 있던 것 같아요. 방어기제처럼요. 그런데 그 기억이 나면서 그때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내가 그런 일들을 당하면서 왜 나 자신을 지킬 생각을 안 했을까? Why Didn’t I Stand Up For Myself? 화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누군가에게 공격 당하거나 혹은 옳지 못한 일을 당했다고 인지했을 때 화를 낼 수 있는 거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화를 느낀다는 건 이제까지는 나 자신을 믿거나 사랑하지 않았구나’, ‘이제 처음으로 내 자신을 믿는 거구나. 그래서 어릴 때 당했던 일이 지금 억울하고 화가 나는구나’, 그렇게 깨달아서 시작된 일이에요.
GQ 가장 처음 완성한 곡은 뭐예요?
YJ 타이틀곡인 ‘With A Hammer’예요.
GQ “진짜 화가 나 / 못 참겠다 생각했어”.
YJ 헤헤헤, 맞아요. 그 곡을 쓴 게 오혁이랑 같이 ‘29’, ‘Year To Year’ 작업하던 타이밍(2021년)이었는데, 그때 제가 화가 많이 나 있었어요. 말한 대로 어릴 때 기억이 나면서 화가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때 미국에서는 팬데믹이어도 마스크도 잘 안 쓰고, 쓰면 오히려 공격당할 수도 있을 만큼 위험했거든요. 그래서 쓰게 된 곡인데, 제가 듣기에도 흔한 화의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생각한 기억이 나네요. “진짜 화가 나”를 소리 질러 부르는 것도 아니고…
GQ 조용조용 곱씹는 느낌이죠.
YJ 네. 엄청 끓어오르고 있지만 억누르는. 그게 그냥 제 솔직한 표현법이었어요.
GQ 마지막으로 맺은 곡은요?
YJ ‘Michin’일 거예요. 안 쓸 뻔한 곡이에요. 앨범을 거의 완성했을 때 “이 앨범은 화에 대한 것이라고 했지만 흔히 생각하는 엄청 센 화의 느낌은 아니구나”라는 식의, 나쁜 피드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때 제가 처음으로 깨달은 거예요. 이게 분노에서 시작됐지만 분노라고 딱 느껴지는 곡이 없구나.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궁금했어요. 그때쯤은 화가 막 나는 단계는 아니었어요.(웃음) 앨범 작업 시작하고 한 2년 정도 지나, 이제 다른 감정으로 변한 때였거든요. 그런데 그냥 궁금했어요. 내가 남들이 생각하는 분노를 표현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이 곡 가사에 유일하게 망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요.
GQ “망치를 들고 부수면 돼 / 부수면 돼”라고 말이죠.
YJ 속이 시원하기는 했어요.(웃음)
GQ 그런데 이전에도 음악을 만들어왔는데 왜 이번에 특히 ‘데뷔 앨범’이라 칭해요?
YJ 제가 곡 작업을 할 때 항상 비슷한 점이, 미리 계획하고 쓰지는 못하거든요. 보이스 노트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주로 순간순간에 떠오르는 것들을 쓰는 식으로 작업해요. 도 일기를 쓰는 것처럼 그때그때 느낀 걸 기록하는 식이었고, 이건 앨범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앨범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기준은 딱히 없지만 제게는 앨범이란 무언가 뚜렷한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의도가 있어야 하는 것 같거든요. 이번에는 앨범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쓰는 과정을 바꿀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생각했을 때 ‘With A Hammer’라는 스토리를 먼저 만들고 그 스토리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음악을 만들면 그게 어떤 내용이더라도 하나의 의도를 가진 음악이 될 것 같았어요.
GQ 예지에게 망치란 무엇이에요? 부정적인 감정을 깨부수는 망치. 진짜 망치를 들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YJ 이 앨범을 만들면서 가장 크게 깨달은 점이기도 한데요, 다른 표현법이 없어요. 그냥, 사랑이에요. 화는 자기 자신을 믿어야 낼 수 있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해야 되는구나. 그런데 그게 서툰 거예요. 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해본 적이 많지 않아서.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런데 나는 남을 사랑하는 건 진짜 잘하는데’ 싶은 거예요. 그럼 내가 내 자신을 남처럼 대하면 어떻게 되나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그렇게 대하기 시작했어요. 진짜 웃길 수도 있는데요, 팟캐스트에서 어떤 사람이 맨날 “Look At The Mirror, And Say ‘I Love You’”라고 말하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한 달 동안 수시로 해봤어요. 제 자신한테 “사랑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진짜 변화가 생겼거든요. 그런 말 있잖아요, 몸과 마음은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냥 웃기만 해도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고. 스스로 계속 사랑한다고 하니까 진짜 그렇게 됐어요. 내 자신을 남처럼 대하면 사랑하기 쉽고, 내 자신을 사랑으로 채워주면 줄 수 있는 사랑이 더 많아져요. 그 폭이 더 넓어지고, 그러면 진정한 변화는 찾아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