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은 달리기를 사랑하는 도시의 가장 큰 축제다. 호주의 겨울이 시작되는 7월, 벨벳처럼 고운 해변과 금빛 햇살이 펼쳐진 골드코스트 마라톤 풀 코스를 달렸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라톤이라고 했다. 서퍼스 파라다이스부터 벌리 헤드까지 42.195킬로미터를 달린 뒤에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골드코스트 마라톤에 나간다고?” 골드코스트 마라톤에 나간다고 얘기하면 친구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과일을 한입 베어 문 것 같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세계 4대, 5대 마라톤으로 알려진 도시도 아니고 머나 먼 호주까지 마라톤을 하러 간다는 게 엉뚱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나 역시 여행으로 골드코스트를 두 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달리기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도쿄나 뉴욕, 포틀랜드, 독일의 중소도시로 여행을 갈 때는 어떻게든 배낭에 러닝화를 챙겼다. 낯선 도시의 아침을 달리기로 맞이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숙소 주변을 달리면서 길의 생김새나 벽에 그려진 그림들, 자동차, 호텔, 상점을 구경했고 가볼 만한 식당과 카페의 위치를 익혔다. 그리고는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열면서 “내가 엄청 괜찮은 곳을 찾았어!”라고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외쳤다.
그러나 골드코스트는 6피트의 서프 보드와 잘 마르는 보드숏, 얇은 플립플롭 외에는 챙길 것이 없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 골드코스트는 달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름의 근거는 있었다. 남반구의 호주는 우리나라와 계절이 정반대이다 보니, 겨울의 추위를 피해서 온 이 도시의 여름은 너무나도 더웠기 때문이다. 바다로 뛰어 들고 싶은 욕구를 잠시도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폭염이 불쾌지수를 높이는 7월의 여름, 이곳은 10도 내외로 달리기 딱 좋은 기온이다. 습도도 낮아서 거리에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커피 향과 함께 시원한 바닷바람이 밀려 온다.
나는 지난 봄, 도쿄 마라톤에서 풀 코스를 완주했다. 몇 달 간의 훈련을 통해 장거리 달리기에 적합한 몸이 되어 있었다. 몸무게는 2~3킬로그램 가벼워진 반면, 근육에선 전에 없던 탄력이 느껴졌다. 덕분에 첫 풀 코스 마라톤에서 서브 4라는 만족할 만한 기록도 달성했다. 뚜렷한 목표 없이 휴식기를 가지기는 아쉬웠다. 올해 한두 번의 대회에 더 참가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름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달리기를 하기에 서울은 습식 사우나처럼 덥고 습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면 아침 날씨가 선선해지는 10월까지는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호주 골드코스트 마라톤의 한국 인스타그램 계정을 알게 됐다. 호주가 겨울을 맞이하는 7월, 골드코스트의 길고 아름다운 해변을 따라 달리는 대회였다. 겨울이라고 해봐야 우리나라의 늦가을 정도로 선선한 날씨였다. 골드코스트 마라톤 코스는 브리즈번으로 서프 트립을 왔을 때 몇 번이고 차로 오가던 길이었다. 운전을 하다가 언덕 위에 차를 세우고 바다 쪽을 바라 보면 파도를 오르내리는 서퍼들의 모습이 보였다. 벨벳처럼 고운 해변, 금빛 햇살, 부풀어 오른 커튼처럼 우아한 너울. 그곳을 달려 보고 싶었다. 바다를 보며 달리는 것은 러너로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골드코스트 마라톤 참가를 결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달리기를 계속 한다면 언젠가는 가야 할 곳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도쿄 마라톤을 완주하면서 한 도시를 마라톤으로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경험인지 알게 되었다. 도시는 많은 것들이 차도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도로의 넓고 빠른 길은 자동차가 우선이었다. 인도는 아주 작고 기능적으로도 소외돼 있다. 자동차에게 빼앗겼던 도로의 중심을 달리면서 도시를 인간의 눈높이와 호흡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마라톤은 다름 아닌 시민을 위한 축제였다.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통제하고 단 하루만큼은 시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골드코스트는 내가 가본 곳 중 가장 아름다운 해양 도시였다. 바다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건축물과 공원이 있고 어딜 가든 바다에서 밀려온 공기가 파도처럼 드나들었다. 42.195킬로미터 코스 내내 서퍼스 파라다이스, 벌리 헤드로 이어지는 해변을 감상할 수 있으니 빌딩 사이를 달리는 도시 마라톤에 비하면 그 풍경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할 것이다. 서핑이나 수영을 즐기는 마라토너라면 마라톤 이후의 계획은 아주 심플하다. 실제로 나는 골드코스트까지 서프보드를 가지고 왔고 마라톤이 끝나면 곧장 퀸즐랜드 주의 최남단인 쿨랑가타로 환상적인 서핑 포인트를 찾아 떠날 예정이었다.
나는 마라톤 전날 브리즈번 공항에 도착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공항 내부까지 전해졌다. 도착 시각은 새벽 5시 30분이었다. 다음 날 마라톤 출발 시각이 6시 15분이니 대회 당일의 기온이 짐작됐다. 서늘한 공기가 호흡과 근육을 깨우는 듯했다. 첫날은 골드코스트 마라톤 엑스포에 들러 기록용 칩이 삽입된 배번호를 받고 팀탐 같은 호주 과자를 먹으며 탄수화물을 몸에 충분히 저장했다.
마라톤 당일, 호텔 앞 교차로에는 트램을 타기 위해 가벼운 러닝 복장으로 종종걸음을 하는 러너들의 모습이 보였다. 골드코스트 시내에 있는 어느 호텔에 묵든지 트램 한번이면 출발점인 사우스포트로 갈 수 있었다. 더구나 골드코스트 마라톤 참가를 인증하면 주말 동안 트램 이용이 무료였다. 대회 당일에는 해변과 인접한 도로가 통제되고 인근의 주차장도 만차이기 때문에 트램 이용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날의 아침 기온은 정확히 10도였다. 호텔 밖의 첫 공기는 약간 서늘했지만 가볍게 달리는 것만으로 체온이 오르고 몸이 풀렸다.
골드코스트 마라톤이 시작되는 사우스포트의 공원에는 도로를 통제하는 교통 경찰과 마라톤 대회 관계자, 러너로 붐볐다.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다. 공원의 분위기는 여느 마라톤 대회에 비하면 자유로웠다. 필요한 준비물은 대회 전날 엑스포에서 미리 받아 두었기 때문에 당일에는 특별히 거쳐야 할 절차가 없었다. 공원에는 반려견을 데리고 온 주자의 가족들도 보였다. 나와 일행은 공원의 카페에서 들러 따뜻한 커피를 주문하는 여유도 누릴 수 있었다. 출발 시각이 가까워 오자 바다의 하늘이 밝아졌다. 주자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출발선으로 향했다.
나는 3시간 30분 그룹에 서 있었다. 그곳에 서 있긴 했지만 3시간 30분이 목표는 아니었다. 3시간 30분으로 달리려면 1킬로미터를 4분 50초 대로 달려야 했다. 그렇게 빠른 페이스로는 20킬로미터를 달려 본 것이 고작이었다. 다만 할 수 있는 데까지 그 흐름을 타 보고 싶었다. 마라톤이란 혼자서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의 흐름이나 철새의 이동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며 나아간다. 옆에서 함께 달리는 수백 명의 러너들과 나 자신을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곧이어 출발을 알리는 피리 소리가 울리고 2만여 명의 주자들이 사우스포트를 빠져나와 서퍼스 파라다이스 해변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떠오른 골드코스트의 금빛 햇살이 길을 밝혔다.
주자들은 가장 먼저 서퍼스 파라다이스의 해변을 달렸다. 골드코스트 사람들은 해변에서 산책하거나 독서를 하는 일과를 너무나 소중하게 여겨서 이 근처의 집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다. ‘저 집에서 살면 아침마다 문 앞에서 서핑할 수 있겠군’하는 생각을 하며 달렸다. 유심히 보니 골드코스트의 많은 아파트가 성의 요새처럼 둥근 형태이고 곡선의 외벽을 따라 테라스와 창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조금이라도 해변이 보이도록 집을 설계하다 보니 이런 구조가 되었다고 한다.
생각했던 것 보다 이 도시는 훨씬 더 바다와 달리기를 사랑하고 있었다. 해변은 책장처럼 평평하고 공원마다 물을 마실 개수대가 있다. 너무 더울 땐 서퍼들을 위한 간이 샤워기를 사용해도 좋을 것 같았다. 뜨거워진 몸으로 바다에 뛰어 들어간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었다. 이런 골드코스트 마라톤은 매년 2~3만 명의 러너가 참가하며 4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마라톤 대회는 달리기를 사랑하는 도시가 아니고선 만들 수 없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는 일과 같다. 한 해 중 가장 날씨가 좋은 때를 기다려 러너를 위해 도로를 통제하고 편의 시설을 제공하며 시민 모두가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특히 첫 번째 반환점이 있는 16킬로미터 지점의 벌리 헤드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있었다. 벌리 헤드는 나무의 옹이처럼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아름다운 언덕을 가지고 있다. 언덕 바로 아래로는 둥근 파도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부서져 내리는 서핑 포인트가 있다. 언제인가부터 여기저기서 서퍼들이 이 동네를 많이 찾기 시작한 뒤로 현재는 골드코스트에서 가장 힙한 동네가 되었다고 한다. 언덕에 마련된 서프 보드 모양의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는 일몰이 무척 아름답다.
레이스는 출발점인 사우스포트에서 남쪽으로 서퍼스 파라다이스를 지나 벌리 헤드까지 16킬로미터를 달린 뒤, 다시 북쪽으로 약 20킬로미터를 되돌아 올라 간다. 바다에서 막 떠올랐던 해는 이제 해변의 나무 만큼 높았다. 엷은 햇볕은 굳어 있던 피부를 살짝 녹일 만큼 따뜻하고 그 위로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30킬로미터를 넘어서자 출발점이었던 사우스포트를 지나 네랑 강과 바다가 만나는 브로드워터에 다다랐다. 골드코스트 북쪽은 긴 섬들이 파도를 막아 주기 때문에 물살이 거의 없고 호수처럼 잔잔하다. 삼삼오오 정박되어 있는 요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왔다. 이 구간은 세일링을 준비하거나 낚시채를 물에 띄운 고요한 풍경이다.
이쯤해서 나의 페이스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나는 출발선에서 3시간 30분 페이스의 주자들과 함께 서 있긴 했지만 그것이 목표는 아니었다. 3시간 30분 안에 피니시 라인을 들어 오려면 적어도 4분 59초의 페이스로 달려야 했는데 나는 한번도 20킬로미터 이상 그렇게 달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벌리 헤드의 반환점을 지나 골드코스트 북쪽의 두 번째 반환점인 런어웨이 베이에 가까워질 때까지 나의 페이스는 4분 50초 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35킬로미터 이상 달려온 시점이었다. 솔직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복부가 아파 왔고, 호흡은 거칠었다. 완주를 위해서라면 페이스를 낮추고 천천히 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1킬로미티씩, 최선을 다해 달리기로 했다. 중간에 멈추더라도 말이다. 완주가 아닌 한계에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1킬로미터씩 달렸다. 단 1킬로미터가 남았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했다. 애플 워치가 250미터마다 나의 페이스를 음성으로 알려 주고 있었지만 결승점에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민들의 응원 소리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페이스는 오직 호흡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옆의 주자와 함께 달리며 속도를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3시간 28분 36초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평소의 기량에 비하면 무척 좋은 기록이었다.
레이스를 모두 마친 뒤 내가 어떻게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록을 낼 수 있었는지 복기했다. 그날의 컨디션이나 훈련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다만 나는 스스로 나의 잠재력을 믿었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한계 너머에 또 다른 내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계산적으로 레이스를 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레이스를 한 것이다. 기록을 떠나서 모든 걸 쏟아 부을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골드코스트의 해변을 따르는 아름다운 코스와 환상적인 날씨가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는 낼 수 없었을 지 모른다. 러너는 대회를 통해 성장하고, 대회는 러너를 통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골드코스트 마라톤은 풀코스 마라토너나 기록을 중요시하는 주자들만을 위한 대회는 아니다. 골드코스트 마라톤은 모두를 위한 축제다. 아이들을 위한 5킬로미터부터 10킬로미터, 하프, 풀 코스까지 체력과 취향에 따른 다양한 코스가 이틀 동안에 걸쳐 펼쳐진다. 그래서 가족 단위의 러너들도 많이 찾는다. 아빠는 풀 코스를 달리고, 아이는 5킬로미터 코스에 참가하는 식이다. 달리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골드코스트를 기억하길 바란다. 골드코스트는 러너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골드코스트 마라톤이 열리는 7월만큼은 이곳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러너스 파라다이스!
RUNNER’S RECOMMENDATION
골드코스트 마라톤을 찾는 러너들을 위한 유용한 숙박 및 렌터카 정보.
1. VOCO GOLD COAST
서퍼스 파라다이스 해변이 바라다 보이는 보코 골드코스트는 골드코스트 마라톤 대회장과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호텔 바로 앞 트램 정거장에서 마라톤 배번호를 보여 주면 무료 이용이 가능하다. 골드코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서퍼스 파라다이스는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 대회 전, 해변을 달리면서 가볍게 몸을 풀거나 쇼핑을 하거나 맛집을 찾아 다니는 재미도 만끽할 수 있다. 사실, 마라톤의 진짜 재미는 마라톤이 끝나고 나서가 아닐까? 보코 골드코스트는 이 도시에서도 가장 핫한 시내 중심에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1층의 레스토랑에서는 현지 육류와 해산물을 직화로 구운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다.
2. BUDGET RENT A CAR
골드코스트 마라톤에 참가하는 러너라면 숙소부터 대회장까지 트램을 이용하길 권하지만, 그 외에 골드코스트에서의 교통수단은 렌터카 만한 것이 없다. 트램은 골드코스트 시내에 한정되어 있고 요즘 가장 힙한 플레이스로 손꼽히는 벌리 헤드나 구석구석 숨은 맛집을 찾아 가려면 렌터카가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에디터는 사전 예약을 통해 브리즈번 공항에서 간단한 절차만으로 차를 찾을 수 있었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유럽 등 180개 이상 국가에서 영업 중인 버젯 렌트카는 한국어 홈페이지에서 예약 및 여행 일정 관리 등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