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9적 허용’.
GQ <D.P.>를 다시 보면서 왜 한호열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이 사람에겐 의도가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돼요.
KH 태생이 그렇죠, 태생이.
GQ 심드렁한 어깨처럼 느껴졌어요. 언제든 툭 기댈 수 있는.
KH 심드렁한 어깨. 좋은 표현인데요, 진짜. 맞아요. 호열은 대가를 바라지 않죠. 자기가 어떤 선한 행동을 해도 보상을 기대하지 않아요.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왜 그래?’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저랑 완전 반대죠. 아핳핳.
GQ 정말요? 그런데 한준희 감독은 “교환이 형 그대로 있어주면 된다, 호열이는 그런 캐릭터다”라고 했는걸요.
KH 그건 사석에서 보여준 유머 때문이죠. 감독님과 현실에서 대화할 때 문장마다 반은 유머, 반은 진담을 섞어 말하거든요. 그런 면을 기대하셨을 거예요.
GQ <D.P.>에서 저의 ‘최애’ 신을 고백하자면, 호열이 준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 해서 라면 끓여주는 날이에요. 여느 때처럼 유머도 치고 해사한 얼굴로 말하는데 왜 슬프지? 그날따라 밝음에서 어둠이 보였어요.
KH 슬픔을 슬프지 않게, 기쁨을 기쁘지 않게, 화를 화내지 않고 표현하는 걸 좋아해요. 연출할 때부터 자주 취한 방법이에요. 슬픈 장면에서 슬픈 음악 트는 거 싫어하고, 행복한 장면에서 해피한 음악 넣는 거 좋아하지 않고요. 그런 취향 이 연기 톤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같아요.
GQ <D.P.> 시즌 1 후 인터뷰에서 “사람들을 그곳에 두고 온 것 같다”고 한 표현이 마음 쓰이더라고요. 시리즈 작품은 처음이니까 두고 온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것도 처음일 텐데, 재회하는 기분이 어떻던가요?
KH 다행이죠. 다시 만나서 다행이에요. 반가운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캐릭터)도 있었지만,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죠. 시즌 1의 완결이 다 나지 않았고 애초에 시즌 2를 염두에 두어서 다시 돌아올 것 같았어요.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에서 감사하게도 투자를 결정해주신 덕분에.(웃음)
GQ 그러고 보면 연기라는 작업이 나로부터 떼어낸 인물을 어딘가에 계속 두고 오는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두고 와서 계속 마음이 쓰이는 인물이 있어요?
KH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꿈의 제인>의 제인이요. 문득문득 계속 생각나고, 보고싶어요. 살아있을 것 같아요, 어딘가에. 제가 연기를 잘해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GQ 만나면 무슨 이야기하고 싶어요?
KH “돌아왔구나, 안녕?” 영화에서처럼.
GQ 정해인 배우가 “호열은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도 저는 제인을 떠올렸어요. 어쩐지 판타지적인 인물 같아서. 호열은 어쩌면 준호의 다른 페르소나이거나, 정말로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까요?
KH 어쩌면요. 해인이랑 캐릭터에 대해 농담을 정말 많이 했어요. 평소에 농담에서 영감을 많이 얻거든요. 농담이란 게 결국 그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농담이라도 충분히 진담처럼 느껴져요 저는.
GQ 다시 돌아온 호열에겐 그사이 어떤 성장이랄까, 변화가 있었어요?
KH 성장이라기보다는 변화가 있었죠. 호열의 달라진 모습을 낯설어하는 관객 분도 있을 것 같아요. 새로운 큰 사건이 일어났으니, 사람에게도 변화가 일어나는 건 당연하잖아요. 저도 아까 촬영할 때랑 지금 변화가 일어났고요.
GQ 맞아요. 구교환도 5초마다 변한다고요.
KH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
GQ 시나리오에서 인물의 변화를 마주해도 담담하겠군요.
KH 네, 담담하죠. 시나리오라는 건 지도나 악보 같은 거라서 받으면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구나, 이렇게 소리내야 하는구나’ 받아들여요. 연주할 곡을 받고 “이번 곡은 이상하군요! 어렵군요!”라고 반응하진 않는다는 거죠.
GQ 지문에서 많은 걸 읽는다고 했죠.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지문이 있나요?
KH 영화 <탈주> 찍을 때 이종필 감독님이 촬영 일에 어떤 편지를 써서 주셨어요. “팬픽처럼 한번 써봤어요.” 제가 맡은 인물의 팬픽을 쓰셨다는 거예요. 와! 되게 흥미롭다. 읽어보니 시나리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대본이 아니라 그 날의 감정을 설명해주는 인물의 서브 스토리인 거죠. 감독님의 작업 방식이 저와 굉장히 비슷하더라고요. 저도 그런 식으로 인물에 접근해요. 이 인물이 좋아하는 음악은 뭘까? 연애는 어떻게 할까? 사적인 것을 마구 질문해요. 이를테면 공식 설정은 아니지만 ‘호열이가 안준호와 동갑이었다면? 준호보다 더 어렸다면?’ 상상해보기도 하고요. 그러면 연기 톤이 바뀌어요.
GQ 그런 김에 저도 상상 속에서 궁금했던 것을 묻겠어요. 호열은 입대 직전 마지막으로 무엇을 먹었을까요?
KH 지금 상상해볼게요. 이탈리아 식당에 혼자 앉아서 뇨키랑 스테이크, 스파게티 먹었을 것 같아요. 올리브스파게티 아니면 크림스파게티.
GQ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방구뽕이랑 만나면 어떤 대화를 할까요?
KH 방구뽕한테 그럴 것 같아요. “네 유머 재미없어. 내 스타일 아니야”.
GQ 제대하면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까요?
KH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전공을 살려 흥신소를 차린 다음 사설 탐정이 되거나, 결혼 정보 회사를 만들어서 1백억을 벌 것 같습니다. 사람을 보는 날카로운 눈썰미가 있고 눈치도 빠르니까 굉장히 매칭을 잘해줄 것 같아요. 결혼 정보 회사에서 하는 일이 그거 맞죠?
GQ 탈영병을 쫓는 일과 남녀의 로맨스는 조금 다를 것 같은데.
KH 남남을 엮을 수도 있고, 여여도 엮어줄 수 있고, 이 회사의 장점은 한계가 없다는 거예요. 매칭한 커플의 결혼 직전에 한 명의 안 좋은 면을 알게 되면, 돈을 벌 것인가 정의를 따를 것인가 고민하다가 결국 결혼을 망쳐버릴 것 같아요. 자기 고객이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임에도 기꺼이 결혼을 파투내주는 거죠.
GQ 흥신소와 결혼 정보 회사 중 어느 쪽으로 가길 좀 더 바라나요?
KH 시리즈의 스핀오프가 만들어진다면 흥신소, 그런데 좀 더 제 취향에 가까운 건 결혼 정보 회사.
GQ 현실의 구교환은 사람을 잘 보나요?
KH 잘 못 봐요. 사람 쉽게 좋아하고 쉽게 싫어해요. 컿컿컿.
GQ <서울체크인>에서 그랬잖아요. 너무 미우면 사랑해버린다고.
KH 그렇죠. 그런데 그 말이 의도보다 확대되어 전달된 것 같아요. 미움의 대상이 증오나 보복의 대상은 아니었어요. 원수는 저도 밉죠. 제 야망을 막는 사람은 지독하게 미워할 겁니다. 어떻게 사랑해요? 그보다는 얼굴을 찌푸릴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 꼴불견이나 진상이라고 할 만한 사람도 사연을 들여다보면 어느 영화의 주인공보다 극적인 상황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앞 신과 다른 상황들을 살펴보면 밉게 보이던 행동도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의미였어요. 예를 들어 제가 지하철을 탔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손톱을 딱딱 깎았고 제가 그 손톱에 탁 맞은 거예요. 기분이 나쁘죠. 그런데 그 사람은 오늘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무심코 손톱을 보니 길어진 걸 깨달은 거예요. 그런데 지금 만나기 10초 전인 거죠! 그런 상황을 알면 손톱을 깎는 행위가 얼마나 로맨틱해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신경 쓰이는 일도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도 충분히 서사가 있는 행동일 수 있다는 거죠.‘ 그럴때 좀 더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가 제 해명입니다.
GQ 해명을 요구한 건 아니었는데.(웃음) “미우면 사랑해버린다”가 구교환이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이 진화된 형태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KH 그거예요. 맞아요. 긍정 전도사는 아닌데 ‘모든 것엔 이유가 있다’고 보거든요.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대사를 절어도 그것대로의 매력이 있잖아요. 나이브함. 어느 장면에서 대사를 하다가 마가 생기거나 대사를 생각해 내려고 끙끙대는 내 모습을 볼 때가 있는데, 그것조차 그 상황에 어울리기도 해요. 우리도 삶에서 이야기하다가 잠깐 마 뜰 때 있잖아요. 그런 삐끗한 순간도 즐겨요. 실수를 무척 사랑해요. 특히 저희같은 작업에서는 정확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면 재미없잖아요.
GQ 그런데 평소에 “망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자주 하잖아요.
KH 입버릇처럼 많이 하죠. “저 망했죠?”
GQ 실수를 사랑하면 망한 것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KH 그러네요? 오류가 있네요.
GQ 실수와 실패 사이 구교환 나름의 다른 정의가 있는 건 아닐까요?
KH 사실 “망했죠?” 묻는 것도 아직 망하지 않았으니까 물어보는 거 아닐까요? 과정 중에 제가 어떤 상태인지 체크해보려고요. 지금 제 방향성이 맞습니까? 진단하는 차원에서요. 제가 저를 판단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위로받고 싶어서, 칭찬받고 싶어서 하는 말이에요.
GQ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어요. “망했죠?” 하면 보통 “아니야, 잘하고 있어”라는 답이 되돌아 오니까요.
KH 그렇죠! 소개팅 전에 제 사진을 보내야 하면 제일 못생긴 사진을 보내요. 만났을 때 감동을 극대화시키려고. 기대 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GQ 스스로에게는 기대 많이 하죠?
KH 저 자신에겐 그런데, 누군가 저에게 기대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가끔 기대받고 싶은 제 모습을 보면 징그러워요. 그럼 제가 저보고 “미쳤어? 너 지금 완전히 ‘연예인병’ 걸렸구나” 하죠. 농담이에요.
GQ 자각해요?
KH 가끔 소름 돋을 때 있어요. 가끔 현장 가서 “연예인 왔습니다, 영화배우 왔습니다” 말할 때 있어요. 정말 농담이에요.(웃음)
GQ 이효리가 자신에게 ‘슈퍼스타’라고 사랑스럽게 말하는 것처럼요.
KH 맞아요! (마가 뜬다.) 사실은 신기해요. 대중을 많이 만나고 싶은 욕망은 있었는데 이 정도로 많이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맞닥뜨린 상황이 신기하고, 굉장히 기분 좋아요.
GQ 무섭진 않아요?
KH 무섭지는 않아요. 이럴 때일수록 항상 솔직하자고 마음먹죠. 어차피 거짓말해도 끝까지 숨기지 못하거든요.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다 보면 결국에는 다 들켜요. 디테일에서 드러나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도 오해가 생기는데, 거기에 프레임을 한 번 더 씌운다? 위험하죠. 어떻게든 항상 나라는 사람을 잘 전달하자고 다짐해요.
GQ 왠지 구교환은 누군가 오해해도 애써 바로잡지는 않을 것 같아요.
KH 맞아요. <메기>에도 나오는 말인데, “어른이 된다는 건 오해를 견디는 일이다”. 제 실수가 어느 때는 반대로 연기력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을 거고, 오해를 받아서 잃는 게 있는 만큼 얻는 것도 엄청 많았을 거란 말이에요.
GQ 오해를 예쁘게 바라볼 수 있다니, 굉장히 어른같기도 하고, 아이같기도 해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류승완 감독이 구교환을 표현한 말이 떠올라요. “현장에서 지켜본 배우 구교환은 ‘호기심 천국’, 매력적인 사람 구교환은 ‘마흔 넘은 어린이”라고 했죠. 마흔이 넘어서도 계속 새롭게 마주하는 즐거움이 있나요?
KH 최근에 뇨키를 처음 먹었는데, 먹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왜 마흔세 살이 되도록 여태 뇨키를 안 먹고 살았지? 이 이름도 귀엽고 맛있는 뇨키를 왜 몰랐을까!
GQ 이름처럼 맛있죠, 뇨키.
KH 가끔 이름이 맛있는 것들이 있어요. 만두, 뇨키, 피-좌. 만두가 ‘두만’이었다고 생각해봐요. 입맛 떨어지잖아요.
GQ 뇨키에 ‘입덕’하셨군요.
KH 저는 삶을 ‘입덕’하는 것 같아요. 어떤 그룹에 입문할 때 ‘입덕’ 캐릭터가 있고, ‘입덕’한 뒤에는 다른 멤버들의 매력이 눈에 들어오잖아요. 삶에서도 어떤 것에 한번 빠진 다음 계속 다른 것들의 즐거움에 눈을 뜨는 거예요.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 가면 대체로 재미를 느껴요 .‘입덕’은 제 인생을 관통하는 역사예요.
GQ 인생 첫 덕질의 대상은 누구였어요?
KH 엄마요.
GQ 이소라 ‘덕후’로서 콘서트는 가지 않겠다고 한 점이 퍽 신선하더라고요.
KH 팬인 걸 괜히 밝힌 것 같아요. 분명히 그분께 닿았을 것 같아요. 좋아하지만 이 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싫다고 해야겠어요. 농담이에요.(웃음) 좋아하는 대상을 제 안에 더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보고 오롯이 쉴 수 있는 내 취향의 대상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GQ 언젠가 <지큐> 에디터들이 꿈꾸는 팝업 시네마 기획을 한 적이 있어요. 어디에든 영화관을 차릴 수 있다고 가정하고, 그곳에서 틀고 싶은 영화를 고르는 기획이었어요. 상상 속에서 간이 영화관의 주인이 될 기회를 ‘배감’ 구교환에게도 꼭 주고 싶었어요. 불가능은 없어요.
KH 제가 연출하는 영화 현장에 아이맥스 극장을 만들어놓고 테이크 모니터링을 실시간 아이맥스로 해보고 싶어요. 화보 현장도 재밌겠다. 꼭 극장에서 영화만 틀 필요는 없잖아요. 오늘 찍은 스틸들을 큰 화면으로 다 같이 감상하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안 볼 거예요.(웃음) 시스템 구현은 힘들겠지만, 공영 주차장에 영화관을 차려놓고 주차한 뒤에 시간있는 분들이 볼 수 있게 계속 틀어놓는 것도 좋겠어요. 그리고 웨이팅이 긴 맛집 앞에 차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GQ 어떤 영화 틀 거예요?
KH <음식남녀>.
GQ 오늘 인터뷰 망했나요?
KH 제가 지금 물어보려고 했는데 선수 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