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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볼 때 자막과 더빙 중 무엇을 골라야 할까

2023.07.27김은희

목소리에 대한 기존의 관성적인 태도를 되짚는다. <인어공주>를 통해 귀 기울여보는 영화라는 소리.

글 / 이지현(영화평론가)

<인어공주>(2023)를 N차 관람했다. 자막 버전을 보고 나서, 한국어 더빙 버전을 봤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보는데 문득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이상한 연상이다. 둘 다 뮤지컬 영화이고 실사 영화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공통점이 없다. 그럼에도 자꾸 두 작품이 연관된 듯 느껴졌다. 내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1960년대 고전임에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뮤지컬 영화다. 두 영화의 비극성이 흡사한 것인지, 육체가 아니라 공간에 집중한 연출 방식 때문인지, 주제의 분위기 탓인지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도입부의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확실히 두 영화의 그로테스크한 시작부 분위기는 형용하기 힘든 감상을 준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오프닝 신, 70밀리미터 필름 카메라의 리듬감 있는 움직임이 도시를 직부감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사실 이 장면의 어떠한 요소도 영화의 스토리와는 관련이 없다. 다만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의 하향곡선을, 그리고 주인공이 사는 공간의 분위기를 압축해 보일 뿐이다. 이 방식은 <인어공주>의 첫 번째 시퀀스와 흡사하다. 파도로 가득 찬 회색빛 바다는 한마디로 음울하다. 음악이 실제 이미지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이 영상의 분위기는 전한다. 모든 뮤지컬 영화가 가볍거나 흥겨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이 장면은 넌지시 전달한다.

<인어공주>의 캐스팅과 관련한 왈가왈부에 이어서, 얼마 전 한국어판 더빙 이슈가 한참 관심을 끌었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 ‘뉴진스’의 다니엘이 에리얼의 더빙 역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큰 기회는 늘 성우가 아닌 스타를 향한다며 투덜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번 영화는 예상과는 다른 질감을 안고 있다. 시작부의 영상 디자인이 지적하듯, 오랜 관습을 지닌 뮤지컬 영화에 대해 이 새로운 영화는 자기 반영적으로 행동한다. 어쩌면 ‘목소리’에 대한 기존의 관성적인 태도를 되짚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의 시대를 거쳐 더빙 시스템이 자리 잡기까지, 영화의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운드의 본질을 생각하기 위해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최초의 유성 영화는 <재즈 싱어>(1927)다. 이 흑백 영화의 주인공은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가수 알 졸슨이 맡았는데, 가난뱅이에서 스타가 되는 이 역할에 관중들은 환호했다. 초기 작품인 만큼 기술적으로 완벽한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재즈 싱어>는 세계를 뒤흔들었다. 1930년대의 미국은 경제 위기로 인해 혼돈 상황이었지만, 할리우드는 이 영화의 잠재력을 믿었다. 그들은 유 성 영화 시스템에 투자했고, 결국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사운드의 물결이 영화의 조류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후 세계 영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유성 영화의 정착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배우의 세대 교체였다. 처음에 관객들은 카우보이 역할을 독일 억양의 배우가 맡아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대중들은 배우들의 진짜 목소리를 알고자 했다. 이미지와 음성의 미스매치는 적극적으로 일부의 인물들을 스크린 바깥으로 내몰았다. 진 켈리의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1954)에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벌어진 상황들이 자세히 묘사된다. 월레스 비어리, 레이몬드 그리피스 등 무성 영화의 스 타들이 유성 영화 시대에 사라졌다. 영어를 익히지 못한 일부 배우들은 유럽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그레타 가르보는 이 시기의 승자였다. 그녀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오히려 그녀가 맡은 배역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무성 영화의 종말은 의외의 효과를 낳기도 했다. 당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설립된 이유도 넓은 의미에서 이 과정과 연관된다. 실제로 시네마테크의 설립자 앙리 랑글루아가 필름 수집에 뛰어든 이유는 다름 아닌 무성 영화의 걸작들을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특히 그는 1920년대 루이즈 브룩스가 출연한 영화의 사본을 찾아서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필름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는 “지난 몇 년간 찾아낸 무성 영화 자체를 그녀는 요약해 보여준다”고 자랑한 적도 있다. 또한 누벨바그를 주도한 영화감독들 역시 무성 영화의 쇠퇴기에 성장했다. 이 별 것 아닌 사실은 결국 현대 영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대사의 용이성에 빚지지 않는 이미지의 표현을 선호하는 영화들을 예술의 반열에 올렸다. 즉, 어떤 의미에서 현대 영화의 시작은 무성 영화의 침묵과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더빙된 <인어공주>를 보며 기존 애니메이션에서는 느끼지 못한 화면의 특질들을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더빙된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기껏해야 일부 애니메이션이 전부다. 실사 영화는 사실상 거의 더빙되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 유성 영화의 전환기에 이런 일은 빈번했다. 오리지널 자막 버전과 더빙된 영화들에 관해, 영화계의 의견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유명 영화감독들 중 특히 장 르누아르는 더빙에 완전히 반대하는 부류에 속했다. 그는 외국어 영화에 새로운 목소리를 입히는 과정이 주술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나의 영혼과 하나의 몸을 가진 사람이 완전히 다른 영혼과 몸을 소유한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합류한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외국 영화의 더빙을 선호하지 않는 다수의 관객들은 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완벽한 더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기술의 이점은 명확하다. 이를테면 알프레드 히치콕은 자막보다 더빙이 훨씬 덜 피곤한 방식이라고 설명하는 연출자였다. “한 편의 영화는 만약 자막이 있으면 15퍼센트의 힘을 잃고, 잘 더빙된다면 10퍼센트의 힘을 잃는다.” 그가 남긴 명언은 일견 과학적으로 들린다. 실제로 더빙 지지자들은 자막이 이미지를 왜곡한다고 여긴다. 좋은 더빙이야말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도 믿는다. 물론 영화를 자막 있는 원본으 로 볼 것인지 더빙된 버전으로 볼 것인지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이다. 단정적으로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세계 곳곳에서 이 논쟁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외국 영화들을 자막으로 소개하는데, 프랑스 는 다수의 상영관이 더빙 버전을 상영한다. 그저 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분명한 점은 자막과 더빙을 단순히 개별의 장단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다니엘이 연기한 에리얼의 목소리는 할리 베일리의 육체와 결합된다. 일부의 관객들에게 이 둘의 만남은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디즈니의 작품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23년 창립 이래, 디즈니는 수많은 음악 영화를 창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이르러 그들은 소위 노스탤지어 마케팅을 강화했다.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배우의 목소리는 동화를 대체하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적 프리즘’이 된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에게, 오리지널 버전의 자막은 친숙한 과거의 변형이 된다. 만일 일부의 더빙이 취향에 맞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저 다른 버전을 찾아 나서면 될 것이다. 이것이 디즈니의 해결책이고, 그들의 순수한 이벤트다. 이는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순전히 주관적으로 개 인이 결정할 영역으로 모든 관심의 폭은 넘어간다.

영화가 사운드를 포함하는 것은 더 이상 옵션이 될 수 없다. 영화의 목소리, 그것은 고요하지만 기만적으로 이미지의 힘을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요소로 활동한다. 그리고 간혹 사운드는 영화의 운명이 되기도 한다. 롭 마샬 감독은 이번 영화를 “제자리에 있지 않다고 느끼는 어린 소녀에 대한 매우 현대적인 이야기”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새로운 <인어공주>의 모더니티는 내러티브의 진취성에서도 느껴진다. 그리고 목소리의 다양성이 그 한 축을 담당한다. 확실히 사운드는 이미지에 대한 시선을 굴절시키는 데 영향을 준다. 비단 극장에서만 이러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 등의 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디즈니의 사운드트랙은 벌써 널리 유통되고 있다. 극장의 목소리는 장치를 넘어선다. 다양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경계를 뛰어넘는 시도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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